52. 악마의 유혹2022.03.01.
딩동! 딩동! 윤 회장 집에 찾아온 민후는 연신 초인종을 눌러댔다. 윤 회장 집에서 일하던 도우미가 문을 열어주려고 다가가자 윤 회장이 말했다.
“그냥 놔둬.”
윤 회장은 민후가 멱을 딴다느니, 은조에게 했던 짓을 그대로 돌려준다느니 해서 조금 두려웠다. 오늘 자신에게 달려들며 멱살을 거머쥐는 걸 보면 화가 나면 어른이고 뭐고 눈에 뵈는 것 없는 스타일인 것 같았다. 쾅! 쾅! 윤 회장이 문을 열어주지 않자 민후는 대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문 여십시오! 차로 부수고 들어가기 전에.”
윤 회장은 두려운 얼굴로 인터폰에 뜬 민후의 모습을 보고 서 있었다. 집에서 일하는 도우미도 불안한 얼굴로 발을 동동 굴렀다. 윤 회장이 인터폰을 누르고 말했다.
“야밤에 무슨 난동인가! 계속 이러면 경찰 부를 거야!”
“예. 경찰 부르십시오. 경찰이 온 김에 명신제지가 기업어음 부정발행한 정황들 파악되었다고 고발할 생각이니까.”
“뭐?”
윤 회장이 인상을 썼다.
“그게 무슨 소리야!”
“더 크게 얘기할까요? 옆집까지 들리도록?”
‘기업어음 부정발행한 건을 강 전무가 어떻게 알았지?’
윤 회장은 도우미 눈치를 보며 대문을 열었다. 민후가 현관문을 열고 성큼성큼 걸어들어왔다. 아까 낮에 보았던 그 얼굴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분노에 찬 얼굴이었다.
“이 야밤에 찾아온 이유가 뭔가? 내가 오늘 손찌검 한 번 했다고 지금 이 난리를 피우는 건가?”
윤 회장도 만만하지 않은 기세로 응수했다.
“손찌검 한 번?”
민후가 사나운 기세로 걸어오며 말했다.
“정말 한 번입니까? 정말 오늘 처음으로 때리신 거 맞습니까?”
윤 회장은 민후의 기세에 서늘한 긴장감이 척추를 훑고 지나갔다.
“하나 궁금한 게 있습니다.”
민후가 거칠게 숨을 내뿜으며 물었다.
“회장님은 아내를 왜 이 집에 데리고 왔습니까?”
윤 회장은 공식적으로 사생아란 얘기를 안 했기 때문에 시치미를 떼고 물었다.
“데려오다니, 무슨 말인가?”
“유일하게 남은 회장님 핏줄이어서 데려온 거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왜 함부로 대하고 억압합니까? 회장님 유일한 핏줄한테!”
말하면서 민후의 눈에 점점 분노가 차올랐다.
“왜 사람을 학대하는 겁니까!”
“학대라니! 말이 너무 심한 것 아닌가? 내가 무슨 학대를 했다고 그래!”
“이 집에 데리고 왔을 때부터 때렸다면서요. 친엄마를 못 만나게 하고 만나고 오면 때렸다면서요.”
“할미가 훈육도 못 하나? 하지 말라고 한 걸 했으니 혼낸 거야!”
윤 회장이 노기 띤 음성으로 말했다. 학대를 일삼는 친족들의 변명은 다 한결같았다. 다 훈육이고 사랑의 매라고 말했다. 민후는 인상을 쓰며 헛웃음을 흘렸다.
“허, 훈육이요?”
“그래. 자네가 출생의 비밀을 다 알고 있으니 하는 말인데. 엄마를 만나고 다니면서 사생아인 거 다 티 내고 다니라는 건가? 내가 얼마나 공들여서 명신제지의 딸로서 반듯하게 교육했는데!”
윤 회장은 악을 쓰며 소리쳤다.
“거지처럼 살던 애를 데려와 먹여주고 입혀주고 과외까지 해주면서 재벌가의 재원으로 교육했어.”
“회장님의 꼭두각시 노릇을 할 인형으로 키운 거겠죠.”
윤 회장이 매섭게 눈을 떠 쳐다보았다.
“그래서 사업 이윤을 위해 팔아넘기듯 계약 결혼도 시킨 거 아닙니까?”
“흥! 그건 자네도 할 말이 없을 텐데? 이익을 위해 계약 결혼한 당사자 아닌가?”
민후가 눈을 질끈 감고 호흡을 골랐다.
“그 얘기를 좀 하고 싶습니다.”
민후는 계약서로 묶인 관계를 어떻게든 좋은 쪽으로 정리하고 싶었다. 호흡을 가다듬고 조금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계약으로 결혼했지만, 은조는 엄연히 제 아내이고 제가 지켜줘야 할 사람입니다.”
민후가 올곧은 시선으로 윤 회장을 보았다.
“아내를 사랑합니다. 이혼하고 싶지 않습니다.”
윤 회장은 마음이 복잡했다.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저렇게 솔직하게 말하니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모르겠다.
“결혼 계약서, 파기합시다. 원하는 조건을 말해요.”
윤 회장이 픽, 조소하며 말했다.
“거래를 하자고?”
민후는 윤 회장이 이혼문제에 관해서는 이상하게도 집착하며 물러서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윤 회장이 혹하도록 사업적으로 다가갔다. 윤 회장은 은조와 민후가 서로를 사랑하는 것을 알고는 이 결혼을 과연 깰 수 있을까에 대해 의문이 들었다. 두 사람이 서로를 좋아한다는데 그깟 계약서로 두 사람을 갈라놓을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하지만 죽은 유정이 꿈에 계속 나타나며 제 것을 뺏겨 분하고 슬프다고 호소하는데 이 결혼을 유지하게 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회장 사모님이 되게 생겼는데 그렇게 되도록은 못 하지.’
“원하는 조건이라……. 일단 생각을 해보겠네. 오늘은 그만 돌아가게.”
일단 민후는 돌려보내고 만만한 은조를 구워삶아야 한다. 민후는 집을 나서기 전에 윤 회장에게 분명하게 경고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경고합니다.”
민후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윤 회장 가까이 다가갔다.
“내 아내 털끝 하나 건드리는 날에는.”
민후가 주먹을 꽉 말아쥐고 윤 회장 얼굴 쪽으로 휙 날렸다. 빡! 민후의 주먹이 윤 회장 얼굴 바로 옆 나무 기둥을 세게 쳤다.
윤 회장이 놀라서 자라처럼 목을 쑥 집어넣었다. 쿵, 쨍그랑! 얼마나 주먹이 센지 진동으로 기둥에 걸려 있던 액자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유리가 깨졌다.
“나도 주먹 쓸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때는 이 주먹이 회장님 얼굴을 가격할 거니 그리 아십시오.”
놀란 윤 회장의 눈과 콧구멍이 동시에 커다래졌다. 숨을 크게 내쉬느라 가슴이 들썩이고 있었다. 민후가 저벅저벅 걸어 집을 나가고 윤 회장은 다리가 후들거려 벽을 짚으며 겨우 소파에 앉았다. 겁에 질린 채로 구석에 서 있는 도우미를 향해 소리쳤다.
“저거 안 치우고 뭐 해!”
만만치 않은 민후 때문에 이혼시킬 수 있을지 고민되었다.
“안 되겠어. 하나를 얻기 위해서 나도 하나를 내어놓을 수밖에.”
윤 회장이 핸드폰을 들고 은조에게 전화를 걸었다. * Rrrrrr. 잠들어 있던 은조가 전화벨 소리에 눈을 떴다. 화면에 할머니의 이름이 떴다. 오늘 할머니와 엄마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다 말아서 은조는 전화를 받았다. 엄마에게 일어난 일들이 할머니 때문이라면 제발 멈추라고 부탁하고 싶었다. 다시는 엄마와 연락하지 않을 테니 제발 엄마를 내버려 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었다.
“여보세요.”
[나다. 우리 아까 얘기하다 말았잖니?]
“네.”
[오늘 내가 했던 얘기 알아들었지? 네가 잘못을 저지르면 네 엄마가 대가를 치른다고. 그러니 내가 하라는 대로 넌 계약이 끝나면 이혼하는 거야. 강 전무가 어떤 얘기를 하며 널 회유하더라도 넌 이혼하겠다고 해.]
윤 회장의 섬뜩한 낮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안 그러면 네 엄마가 무사하지 않을 테니까.]
은조는 역시 할머니의 계획이었다는 확신이 들었다.
“엄마가 집을 팔고 시골로 가시겠다고 했어요. 빚이 많대요. 그거, 할머니가 그런 거예요?”
[그래.]
은조는 입술을 짓이기며 인상을 썼다.
“제발 엄마를 내버려 둬요. 제가 잘못했어요, 할머니. 엄마랑 다시는 연락 안 할게요.”
은조는 울분을 터트리며 윤 회장에게 빌었다. 윤 회장은 예전처럼 은조가 납작 엎드리며 빌자 흡족했다.
[네가 이혼하겠다고 이 할미랑 약속하면 네게 선물을 주마.]
은조는 엄마가 길바닥에 나앉을 정도가 된 상황에 선물이라는 말이 귀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네가 약속대로 이혼하면 네 엄마랑 같이 살게 해주마.]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훔치던 은조가 고개를 들었다.
“네?”
[계약대로 기간이 끝나면 이혼해. 그러면 네 엄마랑 같이 살게 해준다고.]
은조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눈만 깜빡였다.
“어, 엄마랑 살게 해준다고요?”
[그래.]
은조는 불안했다. 할머니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동안 할머니가 저한테 했던 온갖 협박들이 있었기에 그랬다.
[네 엄마랑 셋이 만나 삼자대면하면서 약속할 수도 있어.]
“저, 정말이에요?”
[그래. 강 전무가 달콤한 말로 널 회유할 수도 있어. 그런 말에 현혹되지 말고 너는 원래 계약했던 대로 기간 끝나면 이혼하겠다고 하는 거야.]
은조는 뜻밖의 말에 어안이 벙벙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이혼했으면 하지만 계약서로 금전이 오간 게 있어서 그럴 수는 없고. 이혼하고 네가 그렇게 원하던 네 엄마랑 살아. 둘이 살 만한 집 정도는 내가 얻어줄 테니까.]
은조는 엄마와 다시 예전처럼 살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흥분되었다. 자그마치 11년 만이었다. 11년 만에 할머니 눈치 보지 않고 엄마와 떳떳하게 얼굴을 마주하고 함께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아, 그리고 이 얘기는 우리끼리 비밀이니까 강 전무한테는 입도 뻥긋하지 마. 만약 강 전무가 알게 되면 네 엄마가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될지 모르니까 잘 생각해.]
민후를 좋아하고 그의 아이를 낳아 가정을 이루고 살고 싶은 마음도 물론 있다. 그런데 엄마와 다시 예전처럼 살고 싶은 마음 또한 간절했다. 어쩌면 후자는 다시는 오지 못할 시간이라 생각했기에 더욱 간절한 마음이었다. 어차피 그는 전략상 아이가 필요한 것뿐이었다. 그렇다면 불확실한 미래보다 엄마와의 미래가 은조에게는 더 우선이었다.
“제가 믿을 수 있게 약속해주세요. 진짜 엄마랑 살 수 있게 해주신다고.”
[어떻게 약속할까? 혈서라도 써? 내일 집으로 와. 각서라도 써 줄 테니.]
각서를 써준다는 말에 은조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할머니가 이런 식으로 믿어달라고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무조건 당신의 말이 옳으니 믿으라고 강압만 했었다.
“내일 각서 받으러 갈게요.”
[그래. 기다리마.]
전화를 끊은 은조의 얼굴 위로 기쁜 감정이 한껏 차올랐다. 엄마와 예전처럼 함께 살고 싶다. 엄마랑 둘이 누워서 같이 자고 싶다. 엄마의 냄새를 맡으면서. * 윤 회장 집을 나선 민후는 곧장 집으로 갔다. 운전하는 민후의 얼굴이 조금 들떴다. 초조한 얼굴로 손끝을 이로 물기도 했다. 윤 회장에게 계약을 파기하자고 얘기했지만 생각해보니 순서가 바뀌었다. 아내를 사랑하고 있다고, 이혼하고 싶지 않다는 얘기를 아내에게 먼저 해야 했다. 아내가 맞는 장면을 보고 눈이 돌아가서 윤 회장을 찾아갔지만, 오늘 민후는 제 감정을 명확하게 느꼈다. 맞는 아내를 보고 미치도록 화가 났고, 아내가 우는 모습에 가슴이 찢어지려고 했다. 그 순간 민후는 이게 사랑이라는 걸 느꼈다. 좋아하고 있다는 감정을 느낀 것과는 또 달랐다. 이제 민후의 삶은 한은조를 떼어내고는 생각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민후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아니다, 민후의 전부가 되어버렸다. 사랑하고 있다는 말을 아내에게 해야겠다. 전에는 아내의 마음은 어떨까, 나와 같을까, 다르다면 부담을 느낄 텐데 이런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아내의 마음이 저와 같지 않아도 이 진심을 얘기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내가 당신을 마음 깊이 사랑하고 있다고. 당신을 평생 지켜줄 거라고 얘기해야겠다. 아내에게 제 진심을 고백하겠다고 생각하니 민후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운전하면서 그의 흉곽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 . . 집으로 돌아가니 은조가 잠에서 깨 침대에 앉아 있었다. 나오기 전까지 자고 있었는데.
“안 잤어?”
“네. 깼어요. 어디 갔다 왔어요?”
침실로 들어오는 민후의 모습이 외출하고 온 모습이라 은조가 물었다. 민후가 다가가 침대맡에 자세를 낮추고 앉았다.
“당신한테 할 얘기가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