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이혼하지 않으면 대가를 치를 거야2022.02.22.
창립기념일 파티가 있는 날이다. 부부동반으로 참석하는 중요한 자리인지라 은조는 디자이너 숍에 들러 드레스를 차려입고 행사장으로 갔다. 행사장에는 경제지 기자들도 여럿 있었다. 한주 그룹 계열사 및 임원뿐 아니라 국내 기업들의 대표와 임원들도 참석하는 자리였다. 민후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입장하니 사진기자들이 플래시를 쉴 새 없이 터트렸다. 전문가의 손길로 메이크업을 받은 은조의 미모는 오늘따라 유독 빛났다. 민후도 원래 배우도 울고 갈 미남이라 두 사람의 등장은 주변의 이목을 끌었다. 은조와 민후는 축하해주기 위해 오신 귀빈들과 악수하며 인사를 나누었다.
“축하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최 대표님.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차례로 인사를 나누던 은조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할머니가 명신제지 대표의 자격으로 참석한 것이다. 지난번 한식집에서의 일이 있어서 그런지 은조가 윤 회장을 보고 몸이 경직되었다. 자신감 넘치는 걸음으로 다가온 윤 회장이 먼저 한주 그룹 회장님과 인사했다.
“회장님. 창립 45주년 축하드립니다.”
“어이구, 사돈어른, 이렇게 축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강 회장이 반갑게 맞이하며 악수했다. 강 회장과 덕담을 나누다가 윤 회장이 민후에게 시선을 돌렸다. 민후를 보자 윤 회장의 표정이 차갑게 돌변했다. 민후가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회장님.”
윤 회장이 민후와 악수하며 말했다.
“강 전무는 내가 반갑지 않을 테지만 회장님이 초대장을 보내주셔서 왔어요.”
“반갑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제지산업의 1위 기업 회장님이신데요. 바쁘신데 귀한 걸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민후는 감정을 숨긴 포커페이스로 응수했다. 윤 회장은 픽 조소를 흘리고는 몸을 돌렸다. 이어서 은조의 차례가 되어 윤 회장이 앞에 섰다. 은조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윤 회장의 손을 잡았다.
“아, 안녕……하세요.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떨리고 목소리에 긴장한 티가 역력히 났다.
“오늘은 웬일로 인사를 하는구나.”
윤 회장이 빈정대듯이 말했다.
“나는 너 인사예절을 잊어버린 줄 알았다.”
지난번 한식당에서 끝까지 인사를 하지 않았던 것을 두고 비아냥댄 것이다. 지난번 일을 거론하며 은조를 압박하자 민후가 나섰다.
“윤 회장님. 공과 사는 구별해주시죠. 지금 한주 그룹 창립기념 행사 자리입니다. 사적인 일을 연루하지 마십시오.”
윤 회장이 민후를 매섭게 쳐다보았다. 이번에도 은조와 자신 사이에 끼어든 민후가 못마땅했다.
‘은조를 아주 끼고 돌아서 무슨 말도 못 붙이게 하네.’
지난번 투자를 받는 조건으로 결혼 생활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약속은 했지만, 이 정도로 접근조차 하지 못하게 할 줄 몰랐다. 윤 회장은 전처럼 은조를 제 뜻대로 하지 못해서 불만이 쌓여갔다. 하지만 주변에 보는 눈도 많고 강 회장도 옆에 있고 해서 윤 회장은 그만 물러나야 했다. 행사가 시작되고 민후가 기조연설을 하기 위해 무대에 올라갔다. 민후가 기조연설을 하자 차기 경영 후계자의 윤곽이 잡힌 셈이라 모두 관심 있게 보았다. 윤 회장은 민후가 기조연설을 하는 모습을 굳은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강 전무가 강력한 한주 그룹 차기 회장?’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젓던 윤 회장이 시선을 돌려 은조를 보았다. 민후가 연설하는 모습을 존경의 시선을 담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저것이 한주 그룹 회장 사모님이 된다고?’
윤 회장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안 되지, 대용품인 주제에 그렇게 되도록 놔두지는 않을 거야.’
윤 회장이 표정을 굳히며 은조를 노려보았다.
‘회장으로 선출되기 전에 이혼시켜야 해. 계약이 끝나거든 바로 이혼하라고 해야겠어.’
기한 있는 결혼 계약이지만 윤 회장은 불안했다. 민후도 그렇고, 은조도 그렇고, 둘 다 이혼을 원하지 않는다. 윤 회장이 보기엔 서로를 좋아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남들에게만 부부처럼 보이는 무늬만 부부가 아닌 그들은 지금 진짜 부부가 되어 있었다. 서로가 그렇게 진짜 부부로 살아가기를 원하고 있었다. 은조가 유정이 행복을 가로채 행복하게 살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은조한테 이혼하라는 얘기를 해야지. 제 엄마가 약점이니 송화를 이용하면 은조 저것도 어쩔 수 없을 거야.’
윤 회장은 은조를 보며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공식적인 행사가 끝나고 파티가 이어졌다. 연설을 끝낸 민후는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기조연설을 하고 나서 한주 그룹 차기 후계자가 될 가능성을 보여 줘 언론의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은조는 민후가 기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몇 걸음 떨어져 지켜보고 있었다. 민후를 바라보는 은조에게 윤 회장이 다가갔다.
“왜, 차기 회장 사모님 될 생각하니 좋아죽겠니?”
지척에서 들리는 할머니의 목소리에 은조가 화들짝 놀라 돌아보았다. 윤 회장이 은조를 깔보는 듯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하, 할머니.”
은조는 본능적으로 방어적인 자세가 되었다. 뻣뻣하게 굳어 뒷걸음질 쳤다.
“이리와. 내가 뭐 잡아먹기라도 하니?”
윤 회장은 뒷걸음치는 은조의 팔을 잡아서 당겼다.
“저쪽 가서 조용히 얘기 좀 하자.”
윤 회장은 가능한 민후와 멀리 떨어지는 장소로 은조를 데리고 갔다. 행사장을 빠져나와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곳까지 온 윤 회장이 팔짱을 끼고 은조의 몸을 훑어보았다.
“몸은 좀 어떠니? 배가 아직 안 나왔네?”
은조는 본능적인 몸짓으로 아랫배를 감쌌다. 배 속 아기가 할머니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으면 했다.
“출산 예정일이 언제야?”
출산 예정일을 며칠 전 산부인과에서 받았다.
“○월 ○일이요.”
“계약서를 보니까 너희 결혼 계약 만료일이 내년 6월 30일이더라. 그 날짜 되기 전에 합의 이혼해야 하니까…….”
이혼이란 단어에 은조가 놀라 윤 회장을 쳐다보았다.
“아기는 낳아서 그 집에 주고 넌 나와야 해. 알지?”
윤 회장을 보는 은조의 눈이 심하게 요동쳤다. 이혼하기 싫다고 할머니에게 울면서 말한 적이 있다. 남편을 좋아하게 되었다고, 이혼하기 싫다고 말했었다. 그때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었다.
‘꿈 깨, 강 전무가 너 같은 애한테 마음이 있을 리 없어. 너와 몇 번 잤다고 널 좋아할 거란 그런 생각은 하지 마.’
은조의 마음을 후벼 파는 모진 말을 하며 자존감을 짓뭉갰다. 그래서 은조는 이혼 얘기에도 아무 대꾸도 못 했다. 은조의 마음을 알아차린 윤 회장이 선수 치며 말했다.
“이혼하고 싶지 않다느니 이딴 말 할 생각은 하지 마.”
윤 회장이 은조에게 얼굴을 가까이 대고 낮게 말했다.
“만약 계약서대로 이혼하지 않으면 그 대가는 네 엄마가 치르게 될 테니까.”
은조의 눈이 놀라서 커다래졌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엄마가 대가를 치르다뇨?”
윤 회장은 싸늘한 표정으로 은조를 응시했다.
“잘 알잖아? 지금까지 네가 잘못된 행동을 하면 네 엄마가 그에 대한 대가를 치렀던 거. 기억하지?”
은조가 불안한 얼굴로 할머니를 쳐다보았다. 어릴 때부터 은조가 엄마를 찾아가거나 엄마와 연락이라도 하면 반드시 엄마에게 안 좋은 일이 생겼었다. 깡패들이 가게에 행패를 부리며 집기를 부수고 어떤 날은 꽃을 거짓으로 대량 주문해서 금전적인 손해를 입히는 일도 있었다. 은조는 얼마 전 엄마가 빚 때문에 가게를 정리하고 집까지 판다는 얘기를 들었다. 혹시 지금 엄마에게 일어난 일들이 할머니와 연관이 있지는 않은지 의심스러웠다.
“그러니까 딴 생각하지 말고 계약 끝나면 이혼하란 얘기야. 만약 강 전무가 계약 연장이라든가, 혹시 다른 얘기를 하더라도 무조건 이혼하겠다고 해.”
윤 회장이 은조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지?”
은조는 더는 자신 때문에 엄마가 안 좋은 일을 당하는 것을 지켜볼 수가 없었다.
“왜 저 때문에 엄마를 괴롭히는 거예요? 엄마 만나지도 않았어요. 찾아가지도 않았다고요! 제발 엄마를 가만히 내버려 두세요!”
“나 몰래 전화했잖아.”
할머니가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 은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흥, 이번엔 잔머리를 굴렸더구나. 강 전무 시켜서 네 엄마 도와주는 거 모를 줄 알아?”
“……네?”
은조는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민후 씨 얘기가 왜 나와?’
“내가 말했었지. 엄마에게 손을 뻗으면 뻗을수록 네 엄마를 점점 나락으로 떨어트리게 될 거라고.”
“엄마가 빚 때문에 가게 정리한다고 했는데 그거 할머니가 그런 거예요?”
윤 회장이 입꼬리를 올리며 웃음을 흘렸다.
“이거 봐. 벌써 다 알고 있잖아. 나 몰래 둘이 내통하고 있었잖아!”
윤 회장이 목소리를 높여 소리쳤다.
“네 엄마가 돈 꿔달랬니? 네가 그만한 큰돈은 없을 테니 강 전무한테 돈 구해달라고 부탁하랬어? 돈 많은 사위 덕 좀 보려고 손 벌렸겠지.”
은조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네 엄마가 돈 달라고 했다는 말이 네 시댁에 들어가기라도 했어 봐! 강 회장님 귀에 들어갔으면 어쩌려고 그래?”
은조가 엄마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할머니를 노려보았다.
“돈 한 번 주면 그거로 끝날 것 같니? 거지 근성이 있어서 잊을 만하면 또 손을 벌리겠지. 흡혈귀처럼 붙어서 돈을 달라고 할 거라고.”
윤 회장이 표독스럽게 말을 이었다.
“이래서 출신성분 낮은 인간들하고는 연을 일찍 끊어내야 하는 거라고 말했잖아!”
그 말에 은조의 안색이 변했다.
“이게 다 너한테 도움이 되라고 해준 말이야. 네가 명신제지의 딸로, 한주 그룹의 며느리로 살아가려면 네 엄마하고는 연을 끊어내야 한다고 내가 몇 번을 얘기했어!”
은조는 엄마를 무시하는 할머니의 말을 어릴 때부터 수없이 들었었다. 자신에게 하는 어떤 모욕적인 말도 다 참을 수 있었지만, 엄마를 욕하는 건 참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어릴 때는 할머니가 더 두려웠기 때문에 울분만 키워갈 뿐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했다. 이제는 은조도 엄마가 될 것이고 내 아이에게 힘없이 당하고만 있는 엄마의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아이에게 억울하게 욕보이는 외할머니를 지켜내는 엄마로, 부당한 순간에는 용기를 낼 수 있는 엄마로 보이고 싶었다. 은조가 분노 가득한 시선을 들었다.
“우리 엄마한테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평소와 다른 은조의 목소리에 윤 회장이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뭐?”
목소리는 떨렸지만, 윤 회장을 노려보는 시선에 힘이 있었다.
“우리 엄마 거지 아니에요. 지금이 조선 시대예요? 출신성분이 낮은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런 할머니는 출신성분이 높아요? 할머니도 엿장수 딸이었다면서요?”
엿장수 딸이라는 말에 윤 회장이 눈을 부릅떴다. 어릴 때 언젠가 할머니와 누군가 대화하는 것을 엿들은 적이 있었다. 할머니의 아버지가 엿장수였고 거지 분장을 하고 노래를 부르며 엿을 팔아 돈을 많이 벌었다는 말을 들었던 적이 있었다. 윤 회장에게는 숨기고 싶은 콤플렉스였기에 순식간에 눈이 돌아갔다.
“이, 이게 지금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윤 회장이 손을 번쩍 들어 공기를 가르고 은조의 얼굴을 내리쳤다. 짝!
날카로운 마찰음과 함께 은조가 바닥으로 푹 쓰러졌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짐승이 포효하는 듯한 울림 있는 목소리에 윤 회장이 돌아보았다. 눈이 뒤집힌 민후가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