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사랑받는 아내가 된 것만 같아2022.02.12.
민후와 은조가 나가고 집 안 분위기는 처참했다. 3주 만에 하게 된 가족 식사는 엉망이 되었다. 강 회장은 굳은 표정으로 예지를 보았다. 예지는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멍했다. 은조를 공개적으로 망신 주려다가 거꾸로 자신이 망신을 당하게 되어 비참했다. 기현이 강 회장 눈치를 보다가 자기가 선수 치며 예지를 나무랐다.
“당신은 좀 잘 알아보지 않고는…….”
잘못했다가는 자신과 세트로 묶여 강 회장 눈 밖에 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지는 아무 대꾸가 없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이게 무슨 꼴이야. 가족 식사 시간이 엉망이 되었잖아.”
기현이 강 회장 눈치를 보며 팔꿈치로 예지를 쿡 쳤다.
“뭐 해. 아버지한테 사과 안 드리고.”
예지가 강 회장 앞에서 머리를 숙였다.
“죄송해요, 아버님.”
“크흠.”
강 회장은 굳은 인상으로 헛기침을 했다.
“큰 며느리는 지난번 일도 그렇고 누구한테 사과해야 하는지 파악을 잘 못하는구나.”
강 회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한테 사과는 왜 하는 거냐? 둘째 아가한테 해야지.”
강 회장은 예지를 스치고 지나갔다. 예지는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그대로 소파에 풀썩 주저앉았다. 기현이 예지에게 사납게 인상을 썼다.
“너 대체 가만히 좀 있어! 너 때문에 될 일도 안 되겠어.”
“이게 다 당신 잘되라고 하는 일이잖아. 당신 회장님 만들어주려고 그러는 거라고.”
예지가 눈을 가늘게 뜨고 말을 이었다.
“분명히 의료기록에는 없었단 말이야. 이상해.”
“뭐가 이상해! 같이 테스트 검사했잖아. 그거 90% 이상 정확하다며? 당신이 그랬었잖아.”
“그게 이상하단 말이야.”
기현은 혀를 찼다.
“어이구. 그냥 가만히 있어. 아무것도 안 하는 게 나 도와주는 거야.”
*
“호랑이요?”
은조는 민후도 자신처럼 태몽을 꿨다는 말에 흥미로운 얼굴을 했다.
“숲을 걷는데 새끼 호랑이를 만났어. 강아지처럼 날 자꾸 쫓아와서 머리도 쓰다듬고 귀여워해 줬더니 나한테 안기더라고. 안고서 쓰다듬어주면서 꿈에서 깨는데 이것도 태몽이려나?”
민후의 얘기를 듣고 은조는 핸드폰으로 태몽 검색을 해 보았다.
“호랑이도 태몽으로 많이 꾼대요. 호랑이는 아들이라는데요?”
“그래?”
민후가 신기한 얼굴로 웃었다. 아직 형체도 분명하지 않은 상태일 텐데 아들이라는 단어에 부모가 된다는 낯선 상황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참, 아까 병원 진료비 계산서는 어떻게 된 거예요?”
은조는 진료비 계산서를 내밀었을 때 깜짝 놀랐다.
“아, 그거.”
민후가 옅게 웃으며 대답했다.
“가짜 임신 연기하면서 내가 그 정도 준비를 안 했겠어? 의사도 섭외해놓았는데.”
민후가 은조를 보며 말했다.
“내일 아침에 바로 병원에 같이 가자. 가서 정확하게 검진해야지.”
“네.”
. . . 집으로 돌아온 민후는 은조에게 몸조심해야 한다며 아무것도 못 하게 했다. 심지어 엘리베이터 버튼도 못 누르게 했다.
“저 손가락 멀쩡하거든요.”
은조가 웃으며 말하자 민후가 말했다.
“돌다리도 두드려봐야지. 뭐든 조심해. ”
현관문도 열어주고 물도 갖다 주었다.
“다른 거 더 필요한 거 없어? 뭐든 말만 해. 내가 다 해줄 테니까.”
“없어요.”
은조가 눈을 휘며 웃었다.
“뭐 먹고 싶은 건 없어? 아까 밥도 거의 못 먹었잖아. 내가 뭐 해 줄까?”
“네? 민후 씨가요? 민후 씨 요리할 줄 알아요?”
민후가 셔츠 소매를 걷으며 말했다.
“미국에서 공부할 때는 혼자 자취해서 조금은 할 줄 알아. 뭐 해 줄까?”
“직접 요리까지 안 해도 돼요. 민후 씨도 밥 먹다 말아서 시장하죠? 우리 뭐 배달해서 먹을까요?”
“안 돼. 배달 음식에 조미료 많이 들어갔을 텐데 내가 해 줄게. 오믈렛도 할 줄 알고 파스타도 할 줄 알아.”
“정말요?”
민후가 요리할 줄 안다는 사실이 꽤 놀라웠다. 요리하는 민후의 모습이 상상되지 않았다. 민후가 주방으로 가 냉장고를 열어보더니 말했다.
“여기 좋은 재료가 있네. 내가 또 스테이크 잘 굽지. 스테이크 괜찮지?”
“너무 좋죠.”
“조금만 기다려. 금방 해 줄게.”
민후가 싱크대에서 손을 씻으며 은조를 보고 웃었다. 은조는 이런 민후를 보며 행복한 기분을 느꼈다. 진짜 사랑받는 아내가 된 것만 같다. 임신에 성공해 기뻐하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왜 기쁘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민후가 시선을 들어서 은조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묻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경영권 승계를 위해 아기가 필요한 상황이니 임신이 기쁜 것인 걸 안다. 회장님에게 받았던 지분의 명분을 만들었고 출산하면 더 받을 수가 있으니까. 자신이 기쁜 이유와는 다를 것이다. 은조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렴 어때. 이렇게 나를 소중하게 대해주는데.’
이렇게 애지중지 대해주는 것만으로 행복했다. 이런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사는 것이 처음이라서 은조는 이 행복을 만끽하고 싶었다. 은조가 아랫배를 천천히 만졌다.
‘누구를 닮았을까?’
커다란 키로 싱크대에 서서 요리하는 민후를 보며 생각했다.
‘나랑 민후 씨를 반반씩 닮았으면 좋겠다.’
고소한 버터 향이 나더니 민후가 스테이크를 금방 구워냈다.
“뉴욕에서 공부할 때 자주 해 먹었는데 맛이 어떤지 한번 먹어 봐.”
접시에 먹음직스러운 스테이크와 아스파라거스를 담아서 주었다.
“와, 금방 뚝딱했네요.”
요리를 한번 하면 온 주방을 어지럽히는 자신보다 민후가 더 요리를 잘하는 것 같았다. 나이프로 고기를 썰어 맛보았다. 겉은 버터로 구워 바싹하고 풍미가 가득했고 속은 촉촉하게 육즙이 가득했다.
“음, 너무 맛있어요.”
은조는 포크로 고기 한 점을 더 찍어 입에 넣었다.
“진짜 맛있어요. 나보다 요리 더 잘해요. 민후 씨도 같이 먹어요.”
민후가 흡족한 얼굴로 말했다.
“많이 먹어. 내 것도 따로 있어.”
민후는 은조가 복스럽게 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민후는 임신한 아내가 맛있게 음식을 먹는 모습을 보는 것이 이렇게 행복감이 드는 것인지 몰랐다. 한 여자를 좋아하고 그로 인해 얻는 행복감이 이렇게 클 줄 몰랐다. 은조와 가까워지면서 그동안 모르고 살았던 행복을 느끼게 되었다.
* 다음 날 아침, 출근도 미루고 민후는 은조를 데리고 산부인과에 갔다. 운전하던 민후가 말했다.
“임신했을 때 운전은 하지 않는 게 좋대. 기사를 알아보라고 했어. 구할 동안 당분간은 김 기사가 대신 운전해줄 거야.”
민후는 은조가 운전도 못 하도록 기사를 붙여주었다.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
민후가 룸미러를 통해 은조를 보며 말했다.
“마음 같아서는 일하지 말고 집에서 쉬게 하고 싶어. 일하다 보면 스트레스도 받을 텐데 걱정돼. 스트레스 없는 직업이 없잖아.”
민후가 거울을 보며 물었다.
“육아휴직 같은 거 미리 쓰면 안 되나?”
“출산 휴가가 90일이고 육아휴직이 1년이니 임신했다고 먼저 써버리면 정작 아기 돌봄이 필요할 때는 휴가를 못 써요.”
은조의 직장이고 존중해줘야 하니 민후는 더는 얘기하지 않았다 민후와 함께 병원에 가서 검진을 받았다. 초음파로 아기집도 확인했다. 콩알처럼 생긴 생명체를 확인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그동안 가짜 임신 연기하며 보았던 가짜 초음파사진을 볼 때랑은 확연히 달랐다. 민후와의 사이에서 잉태한 생명체에 경이로운 기분을 느꼈다. 가슴이 벅차올라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다음에 오면 아기 심장 소리도 들을 수 있다고 했다. 병원을 나와 민후는 출근해야 하는 은조를 박물관까지 데려다주었다. 운전하는 민후는 내내 상기된 표정이었다. 평소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던 민후라 씰룩이는 입가만 봐도 그가 지금 얼마나 뛸 듯이 기쁜 상태인지 알 수 있었다. 민후가 룸미러를 통해 뒷좌석에 앉은 은조를 보며 말했다.
“보니까 배 속 아기한테 이름도 지어주던데. 그걸 태명이라고 하나? 우리도 태명 같은 거 지어야 하잖아. 어떤 게 좋을지 생각해 봐.”
태명은 생각지도 못했는데 태명을 지을 생각을 하니 신났다.
“태명이요? 음, 어떤 게 좋을까?”
은조는 행복한 고민에 빠진 듯 창밖을 보면서 미소 지었다.
“오늘 각자 생각해서 집에 와서 서로 생각한 것 중에 고르자.”
은조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좋아요.”
아마 오늘은 종일 태명 생각하느라 하루가 즐거울 것 같았다. . . . 회사에 출근한 민후는 메모지에 펜으로 태명을 짓느라 열심히 뭔가를 끄적였다. 턱을 괴고 깊은 고민에 빠진 모습이 즐거워 보였다. 오후 3시가 조금 지났을 때 민후는 임신한 몸으로 출근해 일하고 있는 아내가 궁금해 메시지를 보냈다.
[몸은 어때? 괜찮아? 피곤하거나 그러지 않아?]
보통 메시지에 즉답이 왔던 아내가 이상하게 메시지도 읽지 않았다.
[피곤하면 얘기해서 조퇴하든지.]
두 번째 메시지도 보지 않았다.
‘바쁜가? 회의 중인가?’
민후는 반응이 없는 아내가 신경 쓰였다. 30분쯤 지나도 연락이 없어 전화를 걸어보았다. 전화를 받은 아내가 다소 급하게 말했다.
[민후 씨 지금 바빠서요. 나중에 전화할게요.]
그러고는 전화가 끊어졌다. 민후는 걱정되어서 얼굴이 굳어졌다. 평소 같으면 바쁘다는 말에 대수롭지 않게 지나갔을 텐데 지금 아내가 임신 초기이다 보니 바쁘다는 말에 걱정이 안 될 수 없었다.
‘얼마나 바쁘기에 전화통화도 제대로 못 할 정도로 바빠?’
은조가 그렇게 전화를 끊고 민후는 아내가 걱정되어서 일에 도저히 집중할 수가 없었다. 불안하고 초조해 계속 시간만 확인했다. 어서 아내가 여유가 되어서 전화를 걸어줬으면 좋겠다. 잠시 후 아내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오늘 전시실 한 곳에 습도조절시스템에 문제가 생겨서 좀 바빴어요. 이제야 문자 봤어요.]
아까 보낸 메시지를 이제 보고 연락을 한 것이다.
[이제 바쁜 건 끝났어?]
[아뇨. 전시물들을 다른 곳으로 급하게 옮기고 있어요. 아직 100점이나 남았어요.]
은조의 답을 본 민후의 미간에 세로로 깊은 주름이 잡혔다.
‘전시물을 옮기고 있다고?’
물건을 옮긴다는 말에 민후는 화가 치밀었다.
“임신한 사람에게 지금 무슨 일을 시키고 있는 거야!”
아내 걱정에 민후가 육성으로 불만을 내뱉었다.
[전시물들을 직접 옮기는 거야? 무거운 거 들면 안 돼. 그런 거 하지 마.]
이렇게 메시지를 보냈지만 바쁜지 읽지도 않고 더는 답도 없었다. 민후는 일도 못 하고 초조하게 계속 메시지만 기다리고 있었다. 걱정되어서 미칠 지경이었다.
‘임신부를 이렇게 마구 부려먹어도 되는 거야?’
그때 본 그 박물관 관장이 기억났다.
‘그자가 아내에게 물건을 들고 나르는 일을 시키는 거 아니야?’
무슨 일을 얼마나 시키는 거라서 전화도 못 받고 메시지도 못 읽을 정도일까? 민후는 속이 타들어 갔다. 불안함 속에 1시간여가 지나고 드디어 통화가 되었다.
“몸은 괜찮아? 임신한 사람한테 너무 일을 많이 시키는 것 아니야?”
[하, 어쩔 수 없어요. 습도에 예민한 종이나 나무 재질 전시물이 많아서요. 최대한 신속하게 옮겨야 하거든요. 중요한 유물들이잖아요.]
귀하게 다루어야 할 유물들이니 이해는 하겠는데 왜 하필 아내가 임신했을 때 이런 일이 터지는지 그게 속상했다.
“그래서 이제 끝났어?”
[아뇨. 오늘 야근해야 해요. 민후 씨, 먼저 가요. 저 택시 타고 갈게요.]
“뭐 야근?”
민후의 얼굴이 사납게 변했다. 청천벽력같은 말이었다.
‘나는 깨질세라 애지중지 모시는 임신부 아내한테 야근까지 시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