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아기가 생겼어요2022.02.08.
“임신이 맞는다면 이거로 증명해 봐, 당장.”
식탁 위에 올려진 임신테스트기를 보는 은조의 눈동자가 동요하며 떨렸다. 불안했다. 최근 식욕이 늘어나긴 했었지만 테스트를 해보지는 않았다. 오늘 가족 식사가 끝나고 집에 가면 임신테스트를 해보려고 했었다. 은조조차 지금 임신이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임신이 안 되었으면 어떡하지?’
예지가 테스트기를 뜯어서 은조에게 내밀었다.
“자, 화장실 가서 하고 진짜 임신인 거 증명해.”
예지는 확신에 찬 얼굴로 씩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보고 있던 민후가 목소리를 높였다.
“화장실 가서 테스트하라니. 모욕적이라고 생각 안 해요?”
민후는 예지를 향해 사납게 인상을 썼다.
“아니에요. 할게요.”
그때 은조가 말했다. 방금까지 당혹스러워 보이던 은조의 표정이 어딘지 모르게 결연해 보였다. 민후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은조를 보았다. 은조가 민후의 팔을 살며시 잡았다. 민후가 불안해하는 걸 알기에 안심하라는 듯 눈을 느리게 한 번 감았다가 떴다. 은조가 테스트기를 받으며 말했다.
“여기에 양성 반응이 나와야 믿으시겠다는 거죠?”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요. 대신 형님 말이 틀렸으면 어떡하실 건데요?”
은조가 결연한 얼굴로 예지를 똑바로 주시했다. 예지는 은조가 너무 자신 있게 나오자 조금 불안했다.
“어떡하실 거냐고요? 형님이 틀렸으면.”
“뭘 어떡해? 일단 하기나 해 봐. 큰소리치지 말고.”
“절 이렇게 모욕주면서까지 형님이 틀리면.”
은조가 한 박자 쉬었다가 말했다.
“이제 형님을 손윗동서 대접 안 합니다.”
은조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예지가 고개를 기울이며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무슨 의미인지 파악이 되지 않은 듯했다.
“형님이라고 부르지도 않을 거고 존댓말도 하지 않을 거예요. 형님이랑 저 동갑이잖아요? 예지야 이름 부르면서 동등한 위치에서 대할 거예요. 그러니 형님도 전처럼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아랫사람 부리듯 하지 말아요.”
예지가 어이가 없는 듯 입이 점점 벌어졌다. 쟤 말하는 것 좀 보라는 듯 강 회장과 기현을 쳐다보기도 했다.
“손윗동서면 손윗사람다워야 대접을 해주죠. 기본도 안 되어 있는 사람한테 존댓말 써가면서 손윗사람 대접해주기 싫어요.”
은조는 예지를 똑바로 바라보며 똑 부러지게 말하고는 화장실로 갔다. 그 모습을 지켜본 민후가 흡족한 듯 픽 웃었다. 은조가 저렇게 자신의 할 말을 시원하게 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민후는 은조의 모습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예지가 무례하게 굴어도 참아내는 모습이 가끔 보여서 안타까웠는데 저렇게 멋지게 대처할 줄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을 숨겨야만 했다.
‘임신이 아닌 것으로 나오면 어쩌려고 저렇게 자신 있게 테스트를 하겠다고 나선 걸까?’
그때 예지가 벌떡 일어나 화장실 쪽으로 갔다.
“동서, 잠깐만!”
예지는 은조가 저렇게 강하게 나오는 게 조금 불안했다.
‘뭔가 믿는 구석이 있으니까 저렇게 강하게 나오는 거겠지? 뭔가 수상해.’
예지가 화장실 문을 두드렸다. 은조가 문을 열자 말했다.
“나도 들어갈게.”
“네?”
“테스트는 정확하게 해야지. 이런 걸 대비해서 뭔가를 준비하고 다니는지도 모르잖아?”
예지는 은조가 테스트기를 바꿔치기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은조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흘렸다.
“왜요, 제 소변이라도 직접 받으려고요?”
“운동선수들 도핑 테스트할 때도 검사관이 직접 화장실까지 들어가잖아. 정확성을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지.”
“해도 해도 너무하시네. 형수,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습니까?”
민후가 벌떡 일어나며 화를 냈다.
“좋아요.”
그때 은조가 민후를 향해 괜찮다는 듯 눈빛을 보냈다. 은조가 예지가 들어오도록 문을 더 열었다.
“그렇게 하세요.”
예지가 화장실에 들어가고 화장실 문이 닫혔다. 남아 있던 강 회장과 기현은 이 상황을 지켜보다가 어색한 헛기침을 했다. 민후가 기현을 향해 말했다.
“형수가 이제 별짓을 다 하네. 혹시 여기가 좀 아픈 거 아냐?”
민후가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가리켰다. 기현이 그에 발끈했다.
“뭐야?”
“아까 들었지? 형수가 틀리면 손윗동서 대접 안 한다고 했으니 나중에 형수한테 반말한다고 토 달지 마.”
기현이 분을 참는 듯 얼굴 근육이 꿈틀댔다.
“이렇게 사람을 모욕적으로 몰아붙이고 그냥 미안하다고만 하면 없던 일이 되는 게 아니니까.”
민후가 강 회장에게도 말했다.
“아버지도 그냥 모른 척하시고요.”
강 회장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요즘 예지의 행동이 하나도 마음에 안 들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예지가 억지를 부리는 거라면 예지는 윗사람 대접받을 자격이 없는 게 맞다. . . . 한편, 화장실에 들어간 은조와 예지는 테스트기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예지가 초조한 눈으로 보았다.
‘제발, 제발 한 줄이어라.’
초조하고 불안한 건 은조도 마찬가지였다. 임신 준비를 열심히 했지만 마음먹는다고 임신이 다 되는 것도 아니고 임신이 되었는지 모르는 상태였기 때문에 불안했다. 빨간색 선이 선명하게 나타났다. 두 줄이었다. 예지의 눈이 커다래지더니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반면 은조는 순간 소리를 지를 뻔했지만, 꾹 참았다. 지금 기쁜 티를 내어서는 안 된다.
‘아…… 임신이 됐어.’
속으로 안도와 함께 감격할 뿐 표정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예지가 사납게 은조를 쳐다보았다. 은조가 턱을 들고 말했다.
“보셨죠? 더 할 말 있어요?”
예지가 입술에 잔뜩 힘을 주고 말했다.
“하나 더 해 봐. 이게 불량일 수도 있잖아.”
예지는 자기 주머니에서 테스트기를 하나 더 꺼냈다.
‘오늘 아주 작정을 하셨네. 만반의 준비를 다 했구나.’
은조는 픽 웃고는 그것을 받았다.
“좋아요. 얼마든지 해봐요.”
예지가 건넨 다른 테스트기로 다시 해 보았지만, 결과가 같았다. 선명하게 두 줄이 나타났다. 예지는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눈을 부릅뜨고 은조를 노려보았다.
‘이럴 리가 없는데.’
화장실을 문을 열고 나가자 모두 궁금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은조는 덤덤한 채로 나왔고 뒤따라 나온 예지는 씩씩대며 흥분한 상태였다. 예지의 모습을 보면 결과 유추가 가능했다. 기현이 다가오며 물었다.
“어떻게 됐어? 진짜 임신이야, 아니야?”
테스트기를 든 예지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기대하던 결과가 안 나온 것을 눈치챈 기현의 표정이 서서히 굳었다. 예지가 말했던 대로 가짜 임신이었으면 한 방에 역전할 기회였는데. 기현은 예지를 짜증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어디서 허위정보를 듣고 와서는 경거망동하기는.’
안 그래도 요즘 예지 때문에 창피한데 이 일 때문에 더 창피하게 생겼다. 한편, 어떤 결과가 나올지 초조하게 기다리던 민후는 은조와 눈이 마주쳤다. 예지와 은조의 표정으로 임신임을 알게 되었다. 은조와 민후의 닿은 시선이 깊어졌다. 은조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민후 씨, 임신이에요. 아기가 생겼어요.’
민후의 얼굴에 벅찬 기쁨이 번졌으나 티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지금은 연기가 필요한 순간이었다. 민후가 일어나 기현과 예지를 보며 말했다.
“이제 됐습니까?”
예지는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못 했지만 몹시 분한 얼굴이었다. 민후가 은조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스트레스가 임신부에게 얼마나 위험한지 아시면 이제 그만들 하세요.”
민후는 은조가 임신했다는 것을 알고 진심으로 걱정되었다. 예지가 궁지로 몰아서 들킬까 봐 얼마나 불안감에 떨었겠나. 민후는 은조를 감싸 안고 강 회장을 향해 말했다.
“아버지, 이대로 식사를 더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임신부에게 너무 가혹한 시간이었네요. 오늘은 일찍 가겠습니다. 이해해 주세요.”
강 회장도 예지의 무례한 행동이 이해 가지 않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새아가 고생 많았다. 들어가서 쉬어라.”
민후가 은조를 데리고 현관 쪽으로 향하다가 멈추고 돌아보았다.
“참, 아까 얘기한 거 잊지 않았죠? 형수님이 틀리면 손윗동서 대접 이제 안 한다고 했던 거.”
예지가 이로 입술을 짓이기며 표정을 구겼다. 민후는 은조를 데리고 저택에서 나왔다. . . . 주차장으로 간 민후가 뒷좌석의 문을 열어주었다. 은조가 이상하게 여기며 쳐다보자 말했다.
“조수석은 위험해. 뒤에 앉아.”
민후가 운전해서 가야 해서 혼자 뒤에 앉아 가기가 부담되었다.
“그래도 어떻게 저 혼자 뒤에 앉아 가요?”
민후가 웃으며 말했다.
“왜 혼자야? 둘이잖아.”
은조는 그 말의 의미를 선뜻 알아듣지 못하고 쳐다보았다.
“이제 홑몸 아니잖아.”
“아…….”
은조가 배시시 웃고 민후도 웃었다. 민후는 이제 행동 하나하나, 손길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웠다. 차에 태우고 벨트도 직접 당겨 매주었다. 운전도 평소보다 속도를 줄였다. 민후는 왠지 모르게 감정이 벅차올랐다. 아내와의 사이에 생명이 잉태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격하게 벅차오르는 이 감정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어떤 기쁜 소식을 들었을 때와는 뭔가 확연히 다른 감정이었다. 가슴이 들뜨고 환희에 찬 기분이랄까. 룸미러로 은조를 보니 그녀도 상기도 된 얼굴이었다. 믿기지 않는 것은 은조도 마찬가지였다. 은조가 손으로 아랫배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정말 이 배 속에 생명이 있을까?’
기분이 정말 이상했다. 임신 준비를 하며 여러 가지 상상을 했지만, 막상 아기가 생기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감격스러웠다. 좋아하는 사람의 아이를 가지는 건 상상 이상으로 기쁨을 주었다. 민후가 룸미러를 보며 물었다.
“혹시 임신한 거 알고 있었어?”
“아니요.”
“그럼 모른 채로 무모하게 테스트하겠다고 들어간 거였어?”
“네.”
“난 형수한테 손윗동서 대접 안 하겠다고 엄포까지 놓으면서 자신 있게 테스트하겠다고 들어가서 혹시 미리 알고 있었나 했어.”
“아니에요. 그때 몰랐어요. 저도 테스트하고 안 거예요.”
민후가 웃으며 말했다.
“보기보다 배짱이 두둑하네. 어디서 그런 깡이 나왔어?”
“왠지 양성이 나올 것 같았어요. 오늘 꿈을 꿨거든요.”
“꿈?”
“좀 이상하고 신기한 꿈이었는데 아침에 일어났을 때는 이상한 꿈도 다 꾼다 생각하고 지나갔거든요.”
은조가 아랫배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테스트를 해 보라고 막 재촉하는데 갑자기 오늘 꾼 꿈이 머릿속에 번쩍 생각나더라고요. 왜 그 급박한 순간에 꿈이 생각날까, 이상했는데 왠지 그 꿈이 태몽일 것 같았어요.”
“태몽?”
“네. 임신 징조의 꿈을 꾼다고 하잖아요.”
“그래? 어떤 꿈이었는데?”
“되게 예쁜 과수원이 있었어요. 꽃잎이 눈처럼 흩날리는 예쁜 곳이었는데 엄마가 복숭아나무라며 복숭아를 따야 한다고 하는 거예요. 엄마가 복숭아를 따서 저한테 줬는데 내 손에 닿자마자 복숭아가 수박만큼 커다래진 거예요.”
은조는 꿈을 상기하니 아직도 신기했다.
“엄마, 복숭아가 엄청나게 커! 그랬더니 그건 네 거야. 은조 거야. 그러시는 거예요. 근데 복숭아가 너무너무 예쁘고 탐스러웠어요. 너무 예뻐서 품에 이렇게 안고 있다가 깼어요.”
태몽 얘기를 듣던 민후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나도 며칠 전에 이상한 꿈 꿨는데 그것도 태몽인가?”
은조가 상체를 기울이며 신기한 듯 물었다.
“민후 씨도 꿈꿨다고요? 어떤 꿈이요?”
“호랑이 꿈을 꿨어. 태어나서 그런 꿈 처음 꿔서 신기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