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임신 증명해 봐2022.02.05.
윤 회장은 송화의 가게를 찾아갔다. 딸랑, 도어벨 소리를 듣고 송화가 안쪽에서 걸어 나왔다.
“어서 오세…….”
윤 회장을 본 송화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멈춘 걸음은 주춤거리며 뒤로 조금 물러났다. 경계심이 가득한 얼굴로 윤 회장에게 말했다.
“왜, 또 무슨 일로 오신 거예요?”
그동안 윤 회장이 송화를 찾아왔을 때는 항상 힘든 일만 있었기에 송화는 윤 회장의 등장이 반갑지 않았다. 윤 회장은 가게를 가득 메운 꽃들에 시선을 주고 말했다.
“요즘 장사가 꽤 잘되나 봐? 싱싱한 꽃들로 다 채워놓았네. 지난번에는 종류도 많이 없고 시들해진 것들도 있더니.”
“무슨 일로 오셨냐고요.”
송화는 여전히 불안한 얼굴로 쏘았다.
“자네, 얼마 전에 한주 그룹에 갔었지? 거긴 왜 갔어?”
“꽃 배달 갔어요.”
“거기랑 계약하고 정기적으로 납품한다지?”
송화는 윤 회장이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생각하며 다소 놀랐다.
“어떻게 이 구멍가게가 대기업에 납품하게 되었냐고.”
윤 회장은 민후와 송화가 서로가 누구인지 다 알고 있는지가 궁금했다. 민후는 아마도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둘 다 자신을 속이고 있는 건 아닌지 궁금했다.
“새로 오신 건물주가 그 회사 높으신 분이에요. 가게에 오셨을 때 저한테 도움을 주신 거고요.”
실제로 송화가 아는 것은 거기까지였다. 윤 회장은 고개를 기울여 송화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며 물었다.
“자네, 그 사람이 누군지…… 몰라?”
송화가 오히려 의아한 듯 물었다.
“누군데요? 회장님은 그분 아세요?”
윤 회장은 눈을 가늘게 뜨고 송화를 쳐다보았다.
‘저게 진짜로 모르는 거야? 강 전무는 다 알고 도와주는 것 같은데 말이야.’
윤 회장이 팔짱을 끼고 모른 체 대꾸했다.
“나야 뭐 사업하는 사람이라 두루두루 안면 정도는 있지. 그건 그렇고.”
윤 회장이 표정과 말투를 바꾸었다.
“가게, 다음 달 안으로 정리하고 지방으로 내려가.”
“네?”
송화가 놀라 굳은 얼굴로 두어 발 다가갔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진즉부터 은조 근처에서 얼쩡거리지 말고 지방으로 가라고 했잖아! 안 그러면 은조가 위험해질 거라고 했지!”
윤 회장이 무서운 얼굴로 호통쳤다.
“은조랑 연락하고 지내는 거 모를 줄 알아?”
송화가 고개를 저으며 다급하게 말했다.
“아니에요. 연락 안 해요.”
“안 하긴 뭘 안 해! 다 알고 있어. 내가 말했지. 은조가 시집간 그 집에서는 은조가 밖에서 낳은 자식이란 거 모른다고.”
송화의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자꾸 은조 근처에서 얼쩡거리면 그 집에서 알게 되는 건 시간 문제고 은조는 속이고 결혼했다고 얼마나 그 집에서 손가락질을 받겠어? 가뜩이나 뿌리를 중시여기는 집안인데 애를 얼마나 무시하겠냐고.”
“애초에 그걸 속이고 결혼한 게 잘못이죠. 처음부터 솔직하게 말했으면.”
윤 회장이 송화의 말을 가로채고 쏘아붙였다.
“뭐? 은조가 시집간 집이 얼마나 대단한 집안인데? 사생아인 거 드러냈으면 그런 집에 시집이나 갈 수 있었는지 알아?”
송화는 은조의 결혼에 자신이 해준 게 아무것도 없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내가 곱게 잘 키워서 아주 훌륭한 집안에 시집도 보내줬잖아. 네가 해주지 못할 것들을 난 다 해줬다고.”
윤 회장이 송화에게 가까이 얼굴을 대며 사납게 말했다.
“그러니 딸 인생 망치고 싶지 않거든 조용히 사라져.”
윤 회장은 민후가 송화의 존재를 알고 도와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그것을 차단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은조의 친모까지 챙기는 걸 보면 생각보다 민후가 은조와의 결혼에 마음을 다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자신과 한 계약서는 무시하고 이혼하지 않을 생각인 게 분명했다. 송화를 민후의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멀리 보내버리고 서서히 은조와 민후의 이혼을 준비해야겠다.
‘은조에게도 계약 끝나면 이혼하라고 일러야지. 은조의 약점인 제 엄마를 이용하면 돼.’
윤 회장이 결의에 찬 표정을 지었다.
* 가족 식사하는 날이라 은조는 삼성동으로 갔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예지를 마주쳤다.
“동서, 어서 와. 오늘도 꼴찌네.”
집에 찾아와 자신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울며 용서를 빌던 때와는 판이해진 모습이었다. 원래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온 모습이었다. 은조는 예지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제 예전처럼 무조건 숙이고 들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예지도 은조의 올곧은 시선을 그대로 받아내며 응시했다. 마치 두 사람이 눈싸움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예지는 팔짱을 끼고 은조를 보며 속으로 말했다.
‘흥. 오늘 너 죽었어! 두고 봐. 내가 재미있는 걸 준비했거든.’
가짜 임신 사실을 까발려 망신시킬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다. 예지가 은조의 아랫배를 슬쩍 보며 말했다.
“동서는 왜 배가 하나도 안 나와? 이상하네.”
은조가 손으로 배를 가리며 말했다.
“보통 4개월은 되어야 나와요. 임신을 안 해봐서 잘 모르나 봐요.”
“흠. 그으래?”
예지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대꾸하고는 돌아섰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민후가 뒤늦게 들어왔다. 예지는 민후를 보고는 움찔했다. 자신의 약점을 쥐고 있는 사람이라 순식간에 긴장한 표정이었다. 반면에 민후는 여유 있는 태도로 인사했다.
“형수님, 잘 지냈습니까?”
“잘 지낼 리가 있겠어요?”
예지가 입을 삐죽이며 대꾸했다.
“아, 그렇군요.”
민후는 예지의 등 뒤에서 훗, 하고 웃었다. 웃음소리를 들은 예지는 분한 듯 입술을 짓이겼다.
“화면발 잘 받으시던데요? 이참에 연예계로 진출하는 건 어때요?”
민후는 와중에 예지를 놀렸다. TV 뉴스에 예지가 나온 것을 빗대어 빈정댔다. 그러자 예지가 도끼눈을 뜨고 노려보았다. 이 모든 것의 원흉이 민후라서 예지는 속에서 천불이 나려고 했다.
“야, 너 지금 그게 형수한테 할 소리냐?”
거실 소파에 앉아 있던 기현이 말했다. 제법 떨어져 있었는데도 그 소리를 들었나 보다.
“이제 다 해결되었지 않습니까? 저쪽에서 고소 취하했다면서요? 지나간 일이니 이제 웃으면서 얘기할 수 있지 않겠어요?”
싱글싱글 웃는 얼굴로 말하는 민후를 예지가 분한 듯 노려보았다. 고소 건은 해결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예지는 태어나 처음으로 치욕스러운 경험을 하고 손가락질을 받았다. 민후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치욕을 안겨준 것이다. 대리석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가 시작되었다. 다른 날보다 분위기는 무거웠다. 아무래도 예지의 사건 때문에 아직 강 회장의 심기가 편치 않았다.
“큰 며느리는 내가 말했던 대로 당분간 칩거하면서 조용히 있어. 괜히 이미지 쇄신한다고 봉사 같은 거 다니지 말고.”
강 회장의 말에 기현이 말했다.
“원래 활동하던 자선단체가 있어요. 그 활동은 하려고 하는데요.”
“그거 남들 보여주기식 봉사 아니냐? 가서 사진이나 찍고 오는 거지 제대로 일이나 하겠어? 괜히 해봤자 그것마저도 욕을 먹게 된다.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중간이라도 간다.”
예지는 강 회장의 말에 한마디 대꾸도 못 하고 있었다.
“집에서 책 보면서 수양을 좀 해라. 기본 인성이 맑아야지 사람 구실 하고 살지.”
예지는 자신이 강 회장의 눈 밖에 난 것을 실감했다. 그동안 얼마나 강 회장에게 인정받기 위해 공을 들이며 노력해왔는데. 이대로 추락할 수는 없었다. 만회해야만 했다.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고 고고하게 밥이나 먹고 있는 은조를 끌어내려야만 한다. 예지는 은조의 거짓말이 자신의 갑질 사건보다 더 악질이라 생각했다.
‘아버님도 분명 더 배신감을 느낄 거야. 은조를 더 미워할 거야.’
상황이 역전될 기회였다.
“아버님!”
예지가 단호한 어조로 강 회장을 불렀다. 너무 강한 어조여서 식탁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예지를 쳐다보았다.
“드릴 말씀이 있어요.”
예지가 뭔가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강 회장이 밥을 먹다가 허리를 펴고 예지를 보았다. 예지가 시선을 돌려 은조와 민후를 보고 말했다.
“아마 깜짝 놀라실 거예요.”
“뭔데? 뭐가 깜짝 놀랄 일이야?”
기현이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아버님. 동서가 아버님께 거짓말을 하고 있어요.”
예지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은조와 민후에게로 쏠렸다. 은조가 당황한 듯 표정이 굳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강 회장이 묻자 예지가 은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큰 소리로 말했다.
“동서, 임신 안 했어요. 다 거짓말이에요!”
은조가 어깨를 움츠리며 상체를 뒤로 뺐다. 눈동자는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어, 어떡하지? 들키는 건가?’
예지가 의심하고 있는 것 같아 불안하긴 했는데 무슨 증거라도 있는 걸까? 시선을 돌려 민후를 보았다. 민후는 굳은 얼굴로 예지를 보고 있었다.
“뭐? 여보, 그게 진짜야?”
기현의 놀란 얼굴 위로 흥미로움이 스쳤다.
“동서, 가짜 임신이에요. 아버님께 지분을 받기 위해 거짓 연기를 하는 거라고요.”
예지가 비장한 표정으로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강 회장은 대체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은조와 민후를 보았다. 민후가 젓가락을 소리 내 탁 놓고는 말했다.
“형수님. 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겁니까?”
“근거요? 근거 당연히 있죠. 제가 좀 알아봤는데 동서, 산부인과에 다닌 기록이 없던데요?”
은조가 불안한 눈동자로 민후를 보았다.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아 심장이 불안하게 쿵쿵 뛰었다. 민후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짓고는 말했다.
“병원 기록을 뒤졌어요? 아주 불법을 밥 먹듯이 하는군요. 병원 진료기록은 개인정보로 동의서나 위임장 없이는 조회할 수 없다는 거 모릅니까? 개인정보 보호법 위반으로 또 검찰청에 가고 싶은가 보네.”
법의 심판을 받을뻔했기에 예지가 움찔했다. 여기서 밀리면 안 된다. 초점이 빗나가면 안 된다.
“말 돌리지 말아요! 지금 논점은 그게 아니잖아요! 동서랑 서방님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거예요!”
민후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성큼성큼 거실 쪽으로 걸어갔다. 은조는 물론 모두 그의 움직임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민후는 거실에 둔 자신의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 들고 왔다. 서류처럼 보이는 종이를 들고 와 예지에게 내밀었다.
“불법까지 저지르면서 병원 기록 조회했으면 제대로 했어야지.”
민후가 내민 것은 병원 진료비 계산서 및 영수증이었다. 예지가 진료비 계산서를 낚아채듯 받아들었다.
“거기 진료 과목, 산부인과 찍힌 거 보입니까? 날짜도 보시죠. 지난달에 같이 병원 갔을 때 받은 영수증입니다.”
예지는 진료비 계산서를 들고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결제하고 가방에 그냥 넣어두었는데 이게 있어서 다행이네요.”
놀란 것은 은조도 마찬가지라 민후를 보았다.
‘병원 진료비 계산서라니? 이건 뭐예요?’
사실 민후는 임신이 조금씩 늦어지면서 이렇게 의심받을 일이 생길 것을 대비해 가짜 진료비 계산서를 만들어 놓았다. 보고 있던 강 회장이 크흠, 크게 헛기침을 하고 예지를 나무랐다.
“큰애야. 넌 대체 왜 그런 말을 하는 거냐?”
예지가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저었다.
“아버님. 아니에요! 속지 마세요! 이거 분명 조작된 서류일 거예요!”
강 회장이 못 미더운 듯 인상을 쓰자 예지는 궁지에 몰린 듯 속사포로 말했다.
“분명히 가짜 임신이에요. 안 그러면 제가 계단에서 밀었을 때도 어떻게 다리만 다치고 멀쩡해요? 그 정도로 계단에서 굴렀으면 유산이 되어야 마땅하죠. 애초에 임신이 안 되었던 거라고요!”
강 회장이 놀란 듯 눈이 커다래졌다.
“뭐? 계단에서 밀어?”
그때 계단에서 넘어졌다고만 알고 있던 강 회장에게 예지는 얼떨결에 자신이 밀었다고 다 말해버렸다. 흥분한 나머지 눈이 돌아서 자기가 뭐라고 말했는지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분명히 가짜예요. 아버님. 제가 증명해 보일게요. 확실한 방법이 있어요.”
예지가 준비해둔 임신테스트기를 꺼냈다. 그러고는 은조를 쏘아보며 말했다.
“임신이 맞는다면 이거로 증명해봐, 당장.”
임신테스트기를 보는 은조의 눈이 크게 동요했다. 가짜임을 확신하는 예지가 입꼬리를 당기며 웃었다. 곧 거짓이 들통나 상황이 역전될 생각을 하니 흥분되었다. 은조는 눈에 힘을 주고 웃는 예지를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