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저도 하고 싶었어요2022.02.01.
예지는 인터넷에 떠도는 자신의 사진을 보며 분해서 손을 바들바들 떨었다. 그 망할 스토커가 하필 기자들이 있는 곳에서 난동을 부리는 탓에 이렇게 사진이 찍혀버렸다. 곧바로 경찰이 와서 현장을 정리했다. 선주는 폭행 현행범으로 잡혀갔다. 폭행죄가 추가되어 선주는 가중처벌이 될 것이다.
“스토커 년은 감옥에서 할머니가 될 때까지 썩어야 해.”
예지가 울분을 토해내며 소리쳤다. 하지만 선주가 아무리 무거운 처벌을 받는다고 해도 예지는 분이 풀리지 않았다. 만천하에 굴욕적인 사진이 공개되어 분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곱게 자라서 이런 험한 꼴을 당한 것이 처음이라 멘탈이 와르르 무너졌다. 이 굴욕적이고 더러운 기분을 깨끗이 씻어줄 만한 흥미로운 것이 필요했다.
“나만 이렇게 망신을 당할 수는 없지.”
예지는 입꼬리를 당겨 비릿하게 웃었다. 얼마 전 은조의 산부인과 진료기록을 찾을 수 없다는 말에 가짜 임신임을 확신했다.
“아버님을 속이고 네가 무사할 것 같아?”
예지의 눈빛이 악독하게 빛났다. 아버님을 비롯해 모든 사람을 속이고 있는 은조를 망신을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너도 아버님이나 사람들 앞에서 거짓임신인 거 까발려 개망신을 당해야 해.”
치욕스러웠던 망신의 분노가 은조에 대한 복수심으로 변해갔다.
“다 모였을 때 터트려 주겠어!”
며칠 후면 가족 식사하는 날이다. 지지난 주에는 민후의 출장과 강 회장의 몸살 기운으로 하지 못했고 지난주에는 예지의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검찰청을 드나드느라 건너뛰었다. 2주 만에 갖는 가족 식사시간에 예지는 폭탄을 터트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임신이 아닌 걸 증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바로 임신테스트기로 증명해 보이라고 하면 그년이 당황하겠지?”
예지가 악랄하게 웃어 보였다.
“거짓말이 들통날까 벌벌 떠는 네 면상을 빨리 보고 싶어. 아하하.”
예지의 웃음소리가 집안에 퍼졌다. * 윤 회장은 한식당에서 당했던 수모를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었다. 민후는 그렇다 치더라도 은조가 자신을 보고도 인사조차 하지 않은 것이 충격이었다. 벌벌 떨면서도 민후의 뒤에 숨어 꼼짝하지 않았다. 민후가 저지하며 인사를 못 하게 하니 민후의 말을 고분고분 듣고는 자신을 무시했다.
“허, 고것이 요즘 간땡이가 부었어. 강 전무가 뒤에서 버티고 있다고 기어오르려고 그러네.”
윤 회장이 입술 근육을 씰룩거리며 중얼거렸다.
“언제까지 강 전무가 네 뒤에서 너를 보호해줄 것 같니? 어차피 넌 계약 끝나거든 다시 내 발밑으로 기어들어 와야 해.”
똑똑. 사무실을 노크하고 한 남자가 들어왔다. 남자가 들어와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말했다.
“회장님. 얼마 전에 최송화 씨가 한주 그룹 본사에 간 것을 확인했습니다.”
윤 회장이 매서운 눈빛으로 남자를 보았다.
“뭐? 거기에 왜 가?”
“최근에 한주 그룹에 정기적인 꽃 배달 서비스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 계약과정이 조금 석연치 않은 게 강민후 전무가 개인적으로 지시했다고 합니다.”
말을 끝낸 남자가 사진 하나를 책상에 올렸다. 사진을 들어서 보는 윤 회장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송화와 민후가 대화하는 모습이 찍힌 사진이었다. 윤 회장이 고개를 기울이며 인상을 썼다.
‘그럼 강 전무가 우연히 그 빌딩을 산 게 아니라는 건데?’
윤 회장이 독기를 품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 은조는 잠을 자기 위해 침대에 누웠다. 고개를 돌려 빈 옆자리를 보았다. 남편은 밀린 일이 있는지 서재에 들어간 지 두 시간이 넘도록 나오지 않았다. 다시 고개를 돌린 은조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며칠간 연속으로 민후와 잠자리를 하고 일주일이 지나도록 아무 일이 없었다. 그 후로 한 번도 민후가 그런 시도를 한 적이 없었다. 잠들 때면 그냥 잘 자라고 인사하고는 잠을 청했다. 솔직히 아쉽고 서운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남편의 허리를 안은 채로 잠에서 깨어나는 일이 많았다. 스킨십을 하는데도 남편은 아무런 감흥이 없는지 전처럼 입을 맞추거나 몸을 만지지는 않았다. 그런 민후를 보면서 은조는 생각했다.
‘역시 남편은 잠자리도 비즈니스로 생각했던 거였구나. 목적이 없으면 안 하는구나. 내가 여자로서 매력이 없어서 그렇겠지?’
은조는 할머니로부터 자존감을 낮추는 말을 수없이 들었던 터라 쉽게 자신의 문제로 단정했다. 서재에서 남은 일을 하던 민후가 침실로 갔다. 은조는 잠이 든 건지 작은 조명만 켜둔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잠에 방해되지 않도록 조용히 다가가 민후도 침대에 누웠다. 그러자 은조가 눈을 떴고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나 때문에 깬 거야?”
“아뇨. 아직 잠 안 들었어요.”
민후가 은조 옆에 누워 물었다.
“몸은 좀 어떤 것 같아?”
“네? 뭐가요?”
“임신하게 되면 피곤해지거나 식욕이 늘어난다고 하던데 평소와 달라진 느낌 같은 거 없어?”
“아직 잘 모르겠어요.”
은조는 식욕이 늘어난 느낌은 들었지만 아직 확신이 들지는 않았다. 임신테스트기도 너무 일찍 하면 정확한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기다리는 중이었다.
“알려면 어느 정도 걸려?”
“열흘 이상 지나야 한다는데 지금 8일째라 며칠 후에 한번 테스트해보려고요.”
“그래.”
민후는 천정을 바라보고 가만히 누워 있었다. 아직 잠이 오지는 않아 들숨과 날숨을 반복하며 누워만 있었다. 아내와 나란히 누워만 있는 것이 조금 어색하고 편치 않았다. 출장 갔을 때 빼고는 임신 준비 기간에 열심히 잠자리를 가졌다. 그러고는 그날이 지난 후에 한 번도 잠자리를 한 적이 없었다. 아기를 가지기 위한 목적이 분명한 잠자리였기에 그 기간이 지나니 시도하기가 망설여졌다. 하지만 민후는 그 후로도 함께 침대에 누우면 아내를 안고 싶은 욕구가 넘쳐났다. 매일 하다 보니 몸이 익숙해져서 그런지 아내가 욕실에서 샤워만 하고 있으면 몸이 반응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물소리를 들으며 아내의 몸을 생각했다. 자다가 부드러운 살이 닿기라도 하면 기억 속의 감각들이 깨어나 몸이 빠르게 반응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발정 난 짐승 같았다. 새벽마다 자신을 안고 자는 잠버릇은 여전해서 새벽마다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렇다고 아내에게 잠자리를 요구할 수 없었다. 임신을 목적으로 한 시기는 지났는데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함으로 비칠 것이 뻔했다. 자신을 욕구 조절도 못 하는 파렴치한으로 생각할 것 같았다. 게다가 만약 임신이 되었다면 지금은 배 속에 아주 조그마한 생명체가 있을 텐데 그런 배려 없이 발정 난 짐승처럼 그것만 밝힌다고 여길 것 같았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실제 임신이 되면 그것도 못 하는 건지 해도 되는지 그런 기본 지식도 부족했다.
“저기, 만약…….”
민후가 적막을 깨고 입을 열었다.
“만약에 임신이 되면 말이야.”
궁금한 참에 민후가 물었다.
“초기에는 무척 조심해야 하지? 부부생활도 자제하고.”
은조가 조금 민망해하며 대답했다.
“임신·출산 책에 보니 격렬하게만 아니면 괜찮다고 하더라고요. 출산 임박했을 때는 위험하지만.”
은조가 시선을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근데 그걸 왜 물어요? 하고 묻고 싶었다. 설마 하고 싶어서 저렇게 묻는 건 아니겠지? 그는 자신처럼 사심이 있는 것도 아닐 텐데. 민후는 그래? 하고는 아무 말이 없었다. 천장을 바라보며 말이 없던 민후가 마른침을 느릿하게 삼키더니 말했다.
“전에 우리 얘기했던 거 기억나?”
은조는 어떤 거요? 하고 눈으로 물었다.
“이제부터 진짜 부부처럼 지내보자고 했잖아. 그래서 방도 합쳤던 거고.”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고 쳐다보았다. 은조도 조금 긴장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진짜 부부처럼 지내고 있는 건가, 우리?”
“…….”
쳐다보는 은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새벽마다 좀 힘들 때가 있거든. 지금도 사실 좀 힘든데.”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해 은조가 눈만 끔뻑이고 있자 민후가 이불을 조금 들어서 자신의 몸 상태를 보여주었다. 금단현상인 건지 좀처럼 몸을 진정시키기가 힘들었다. 존재감을 드러낸 모습에 은조가 얼른 시선을 돌리며 얼굴을 붉혔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오히려 기뻤다. 그도 같은 생각이었다는 것이.
“네. 전 상관없어요.”
그가 자신처럼 진심이 없어도 상관없었다. 단지 육체적인 욕망을 해결하기 위함일지라도 은조는 그와 부부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 행복했다. 오히려 자신을 안지 않았던 며칠이 더 조바심이 나고 서운했었다. 은조가 대답하자 민후가 몸을 움직여 은조를 보고 누웠다. 손으로 은조의 얼굴을 감싸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싫으면 거절해도 돼. 진짜 괜찮은 거 맞아?”
은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실은.”
떨리는 눈으로 그를 보며 말했다.
“저도 하고 싶었어요.”
은조는 용기를 내어 진심을 말했다. 그러자 민후의 눈동자가 크게 동요했다.
“진짜야?”
“네. ……좋았거든요. 민후 씨랑…….”
은조는 부끄러워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키스하고…… 안고 그러는 거.”
민후의 입가에 미소가 서서히 퍼졌다.
“사실 나도 그래.”
민후는 은조가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게 너무 반갑고 기뻤다. 자신처럼 짝사랑하는 건 아닐 테지만 자신과 스킨십하는 건 좋다고 하니 한결 부담이 사라졌다. 이제 키스하고 싶을 때 키스할 수 있겠다. 미치도록 사랑스러워 안아주고 싶을 때 안아줘도 되겠다. 이렇게 생각하니 행복감이 밀려왔다.
“중국에 갔을 때도 사실 많이 생각났어.”
물론 스킨십이 생각난 게 아니라 아내가 그립고 보고 싶은 거였지만 그 진심은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은조도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나도 그랬는데.”
두 사람은 시선을 마주하고 행복하게 웃었다. 스킨십하고 잠자리를 가지는 것에는 서로가 부담이 없고 좋은 감정이라는 걸 확인해서 기쁘기 그지없었다. 사랑스러운 듯 은조를 바라보던 민후의 얼굴이 천천히 다가왔다. 조심스레 입술이 닿고 은조는 눈을 감았다. 절로 입술이 벌어지고 그의 숨결이 밀려 들어왔다. 익숙했던 그의 숨결이 입안을 유영했다. 뜨거운 감각이 온몸에 퍼지기 시작했다. 발끝까지 열기가 퍼지고 정신은 아득해졌다. 민후는 은조의 뒷머리를 큰손으로 감싸고 더욱 깊게 입술을 탐했다. 그가 입을 맞추며 천천히 몸 위로 올라탔다. 은조도 훨씬 능숙하게 그와 키스하며 민후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그 어느 때보다 느릿하고도 정성 어린 키스였다. 온전히 서로가 원해서 하는 키스이기에 마음을 다했다. 목적이 있는 스킨십이 아니라 서로의 스킨십에 만족감이 있다는 걸 알고 나누는 키스라 더욱 충만한 기쁨을 느꼈다.
“조심히, 천천히 할게.”
민후는 혹시 배 속에 생명이 있을지도 모르기에 조심하겠다고 했다. 며칠 전부터 터질듯한 욕망에 날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아내를 배려해야만 했다. 유리 인형을 다루듯 조심스레 아내를 품에 안았다. 은조는 민후의 가슴에 얼굴을 비볐다. 땀으로 젖은 그의 등을 안고 밭은 숨을 뱉었다. 그의 너른 품이 너무 좋다. 이 품에 안겨 있으면 어떤 슬픔, 괴로움도 사라질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