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든든한 방패 같은 남편2022.01.29.
‘할머니가 지금 여기에 계시다고?’
은조의 두 볼이 순식간에 굳고 몸도 경직되었다. 할머니만 보면 반사적으로 나오는 반응이었다. 심지어 방금 할머니 앞에서는 금기시했던 엄마 얘기를 하고 있어서 더 겁이 났다.
“어떻게 전해드릴까요?”
민후는 인사를 하러 오라는 말에 심기가 불편했다. 얼마 전 아내를 강제로 끌고 병원에 갔던 일만 아니었으면 인사하러 갔을 것이다. 처가의 어른이시니 당연히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날 이후 윤 회장 하고는 마주치기도 싫었다. 윤 회장으로부터 아내를 보호하겠다고도 결심했기에 민후는 결단했다.
“미안하지만 우리 부부, 오붓하게 식사하러 온 자리라 조용히 식사하고 가겠다고 전해주십시오.”
“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직원이 문을 닫으려는데 은조가 다급하게 손을 뻗었다.
“저기…….”
은조가 조금은 불안한 얼굴로 민후에게 말했다.
“그래도 같은 장소에 있는데 인사드려야 하지 않을까요?”
은조는 조금 두려웠다. 아직은 할머니의 말을 거역하는 것이 무섭기 때문이었다. 인사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기에 이런 사소한 것으로 할머니를 화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민후가 은조를 가만히 보다가 말했다.
“안 해도 돼. 우리 식사하러 온 거잖아. 식사하는데 방해받고 싶지 않아.”
“그냥 인사만 하는 거잖아요.”
재차 말하는 은조를 보며 민후가 물었다.
“인사하고 싶어? 솔직히 말해. 만나고 싶어?”
“그, 그런 건 아니지만.”
은조가 자신 없는 말투로 말끝을 흐렸다. 아직 윤 회장에 대한 두려움을 가진 아내를 보며 민후는 어떻게든 극복하게 해주고 싶었다.
“그럼 됐어. 하지 마. 할 필요 없어.”
민후가 단호하게 말해 은조도 더는 얘기하지 않았다. 식사를 이어가는데 아까보다 은조의 표정이 무거웠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차려진 음식을 보고 못 먹어본 음식들이라며 행복해하던 그녀였는데. 윤 회장의 존재만으로도 그녀에게는 스트레스가 된 것 같았다. 오붓하고 즐거운 데이트를 방해받아 민후는 기분이 언짢았다.
“손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비켜요. 내가 할 말 있으니까.”
“안 됩니다. 고객님께서 불편해하십니다.”
“불편? 누가 누구한테 감히 불편하다는 소리를 해?”
문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목소리 중 하나는 윤 회장의 목소리였다. 대화 내용으로 보아 민후 부부가 인사를 하지 않아 막무가내로 찾아온 모양이었다. 문밖에서 들리는 윤 회장의 목소리에 은조가 젓가락을 놓고 몸을 반쯤 일으켰다. 윤 회장이 찾아왔다는 사실만으로 그녀는 편하게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불안해하는 아내를 보며 민후가 말했다.
“은조야.”
그가 나지막하게 불렀다.
“그냥 앉아 있어.”
낮은 목소리였지만 그의 표정이나 말투가 엄중해 은조는 다시 엉덩이를 방석에 붙이고 앉았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가만히 앉아 있어.”
“손님, 잠깐만요! 이러시면 안 됩니다.”
직원의 만류에도 문이 드르륵, 쾅 열렸다. 얼마나 세게 열었는지 벽에 걸린 액자가 흔들릴 정도였다. 문이 활짝 열리고 윤 회장이 두 사람을 매섭게 쳐다보았다. 은조는 불안한 눈으로 할머니를 보았다. 민후는 그 상황에서도 여유롭게 물컵을 들어서 물을 마셨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윤 회장을 보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허, 무슨 일? 자네는 어른을 보면 인사할 줄 모르나? 어른인 내가 와서 인사를 해야 해?”
민후는 몸을 돌리지 않고 고개만 살짝 튼 채로 말했다.
“우린 회장님을 만나 뵈러 여기 온 게 아닙니다. 회장님이 계신 것도 몰랐고요. 우연히 같은 장소에 있다 해서 반드시 아는 체하며 인사할 필요 있습니까? 아는 체하는 것이 불편할 때도 있죠. 그리고 직원을 통해 식사를 방해받고 싶지 않다고 분명히 전달 드렸습니다.”
“허, 뭐?”
윤 회장은 기가 막힌다는 듯 실소를 터트렸다. 인사하러 오지 않는 것도 괘씸한데 자신이 몸소 왔는데도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는 모습이 믿을 수 없었다.
“저희 조용히 식사하고 갈 예정입니다. 회장님도 즐겁게 식사하고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고는 직원에게 문을 닫으라며 눈짓했다. 윤 회장은 민후가 오만한 태도로 나오자 오히려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래서 만만한 은조에게로 매서운 시선을 꽂았다. 두려움에 떠는 모습이 역력한 은조를 보며 말했다.
“넌 이 할미가 눈에 안 보여? 내가 그렇게 예절교육을 하든?”
은조가 움찔하며 몸이 더욱 굳었다.
“어디서 어른이 왔는데 궁둥이 딱 붙이고 앉아서 꼼짝을 안 해!”
윤 회장의 목소리가 식당 내에 크게 울렸다. 할머니의 고함에 은조가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가만.”
그 순간, 민후가 손바닥을 펼쳐 은조를 저지했다. 은조는 엉거주춤한 채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눈치를 보았다.
“괜찮아. 그냥 있어.”
민후가 몸을 돌려 윤 회장을 매섭게 쳐다보았다.
“아내에게 위협적인 태도와 강압적인 명령, 그만 하시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민후가 다소 사나운 투로 말했다. 민후와 윤 회장의 시선이 대치하듯 팽팽하게 맞섰다.
그때, 식당 매니저가 달려왔다.
“무슨 일입니까.”
절간처럼 조용하고 고즈넉하게 운영하던 식당에서 난동을 부리는 고객은 정리해야만 했다.
“손님. 죄송하지만 나가주십시오.”
“뭐라고?”
“매니저님. 이곳을 몇 년간 다녔지만 이렇게 행패를 부리도록 관리를 소홀히 하는 건 처음입니다.”
민후가 매니저에게 말하자 매니저가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식사 중에 불편하게 한 점 용서하십시오.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매니저는 조용히 미닫이문을 닫아주었다. 밖에서 분을 참지 못한 윤 회장의 목소리가 이어서 들렸다.
“이봐. 내가 누군지 알고 나가란 소리가 나와! 나 여기 VIP야!”
“죄송하지만 오늘부로 VIP 명단에서 빼겠습니다. 그만 나가주십시오. 나가지 않으면 경찰을 부르겠습니다. 여러 고객님께 방해가 되고 있습니다.”
“뭐? 여기 사장 나오라고 해! 이거 놔!”
누군가에 끌려가는지 윤 회장의 목소리는 점점 멀어졌다. 민후는 불안한 얼굴로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은조를 바라보았다. 윤 회장의 목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자 은조는 그제야 민후에게 시선을 주었다. 윤 회장 앞에서 두려움에 파르르 떠는 아내를 보니 민후는 마음이 무거웠다. 저 두려움을 어떻게 하면 없앨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그녀가 할머니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을까? 물리적으로 윤 회장과 떨어트려 놓는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그녀 안에 있는 트라우마와 상처들을 치료해주고 싶었다. 은조는 경이로운 시선으로 민후를 보았다. 은조는 민후가 할머니와의 대립에서 기죽지 않고 세게 나가는 모습에 놀랐다. 은조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을 그는 하고 있었다. 평소에도 카리스마 있고 자신만만한 그의 모습을 알고는 있었지만 실제로 목격하니 생각보다 남편은 강한 사람이었다. 할머니로부터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에 은조는 마음이 훨씬 안정되었다.
‘아내에게 위협적인 태도와 강압적인 명령, 그만 하시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가 할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신을 위해 할머니에게 도전적인 말을 해주는 남편이 고맙고 든든했다. 어떤 위험도 그가 다 막아줄 것만 같고 든든한 방패가 된 것 같았다. 그가 자신의 사방을 겹겹이 둘러막고 보호해주는 것 같았다.
“고마워요.”
“고맙긴.”
민후가 다시 젓가락을 들어 식사를 이어갔다.
“식사 마저 해.”
은조도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
“윤 회장님이 앞으로 개인적으로 너한테 접촉하는 일 없도록 해줄게.”
민후는 은조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자신과 함께 있을 때는 자신이 보호해줄 수 있지만, 지난번처럼 아내에게 직접 찾아간다면 아내는 두려움에 더 벌벌 떨 것이다. 오늘 일로 할머니의 보복이 두려울 것이기 때문에. 그런 아내를 안심시켜줘야 했다.
“나랑 따로 한 계약도 있어서 마음대로 당신을 만나러 가는 일은 없을 거야.”
투자금을 빼겠다고 하면 윤 회장도 쉽게 민후의 말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
“네.”
은조는 할머니가 개인적으로 찾아오지도 못하게 할 거라고 못 박는 민후의 말에 안심이 되는 듯 미소를 보였다.
“찌개가 식었네. 다시 데워달라고 해야겠다.”
은조는 식사하는 중간중간 시선을 들어 민후를 보았다. 방금 남편의 모습은 마치 자신을 지키는 기사 같았다. 자신을 감싸 보호하며 적과 맞서준 멋진 기사. 남편에게 더 빠져들 것만 같았다. 더는 그를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다. 사랑하는 마음이 커질수록 그 몇 배로 아픔을 겪게 된다는 걸 알기에 두려웠다. * 예지는 검찰청에 들어가 6시간 동안 조사를 받고 나왔다. 날달걀을 맞았던 머리카락은 떡이 졌다. 화장실에서 물로 닦아냈지만 단정했던 헤어스타일이 다 망가졌다. 검찰청에서 나오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기자들이 또 따라붙기 시작했다.
“운전기사 폭행한 거 인정합니까?”
“하이힐 굽으로 정강이도 여러 번 걷어찼다고 하던데 맞습니까?”
예지는 고개를 숙이고 빠르게 차가 있는 곳으로 걸었다. 기사에게 전화해 차를 바로 앞에 대라고 했지만 기자들 때문에 차를 댈 수가 없다고 했다. 기자들은 예지가 차로 빠르게 걸어가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따라가며 집요하게 사진을 찍었다. 예지가 기자들의 관심을 받는 사이 검찰청 건물에서는 누군가 조용히 나오고 있었다. 조사를 받고 나오는 선주였다. 아무도 선주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 사이 주차장으로 걷던 선주가 걸음을 멈추었다. 기자들에 둘러싸인 사람이 누구인가 호기심에 쳐다보다가 예지를 발견한 것이다. 선주는 예지를 보자 분노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선주한테는 얄미운 동서를 열 받게 하고 싶다며 민후에게 접근하라고 시켰었다. 민후가 선주의 유혹에 넘어갈 것이라며 거짓말로 현혹하기까지 했다. 알고 보니 본인의 이익을 위해 스캔들을 꾸며 언론에 제보하려고 사진을 찍었고 그것 때문에 선주가 또 스토킹 신고를 당했다. 이번에는 실형을 면치 못할 것을 알기에 자신을 속였던 예지를 보자 분노가 차올랐다. 선주는 기자들에 둘러싸인 예지에게 다가갔다.
“야!”
선주가 소리치자 예지가 돌아보았다. 성큼성큼 다가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예지의 머리채를 잡았다.
“야, 이 XXX야.”
욕지거리를 뱉으며 머리채를 휘어잡자 예지의 목이 옆으로 훅 꺾였다. 동시에 카메라 플래시가 쉴 새 없이 터졌다. 카메라 기자들은 좋은 그림을 담겠다며 분주하게 두 여자를 찍기 시작했다.
“너 나한테 사기 쳤지! 이 사기꾼 X 아.”
“아악! 뭐야, 너. 이거 놔! 이거 안 놔?”
예지는 머리채를 잡힌 채로 눈을 치켜뜨고 발악했다.
“못 놔. 이년아. 내가 집유 기간이라 불안하다고 했어, 안 했어? 네년이 날 부추겨서 이 사달이 났잖아! 너, 책임져! 나 실형 받으면 네년이 책임져!”
말하면서 더 열불이 난 선주가 예지의 머리채를 잡고 흔들었다.
“아악! 사람 살려!”
분위기가 더 험악해지자 곁에 있던 기자들이 달려들어 선주의 손을 떼어냈다. 예지는 머리가 헝클어져 엉망이 된 채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야, 이 미친X아! 으허엉.”
예지는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욕을 하며 울기 시작했다. 머리가 산발이 된 채로 울고 있는 예지의 사진은 다음날 인터넷 톱 기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