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되는 사람2022.01.15.
민후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며 계속 전화기에 대고 말했다.
“왜 말을 하다 말아?”
은조의 얼굴이 기쁨으로 점점 물들었다.
“……미, 민후 씨?”
은조가 통화하던 핸드폰을 끄고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어, 어떻게 된 거예요?”
“뭐가 어떻게 돼. 비행기가 안 막혀서 일찍 도착했어.”
민후가 유치한 농담까지 했다.
“언제 왔어요?”
“스케줄이 변동되어서 낮 비행기로 왔어.”
“그러면서 어쩜 말도 한마디 안 하고.”
은조가 서운하다는 듯 말했다. 지금까지 자기를 감쪽같이 속였다는 생각에 민후가 얄미웠다. 하지만 반가움이 더 컸다. 얄미운 생각에 그에게 눈을 흘겼지만 입가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은조는 그를 보자마자 달려가 확 안기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실제로 발이 조금 움찔하기도 했다. 겨우 2박 3일의 짧은 출장이었지만 한 달 만에 만난 느낌이었다. 민후는 비행기 스케줄을 당겨서 오면서 아내를 깜짝 놀래줄 순간을 계속 상상했다. 영화 속 장면처럼 아내가 뛰어와 제게 안기고 민후가 번쩍 안아 드는 모습을 상상하고 혼자 가슴이 설레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내는 귀엽게 놀란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기대처럼 달려와 안기지는 않았다. 자신이 생각해도 그건 너무 꿈같은 일이었다. 상상과는 달리 현실은 두어 발짝 떨어져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웃기만 했다. 그래도 아내가 무척 반가워하는 표정이라 그것만으로 만족이었다.
“키 줘. 내가 운전할게.”
집으로 가는 길은 민후가 운전하겠다고 했다. 함께 차를 타고 가는 길은 무척 설레고 마음이 들떴다. 데이트하는 기분이었다.
“아 참! 도우미 여사님께 김치찜 빨리 준비하라고 해야겠어요.”
조금 전 민후와의 통화에서 김치찜을 먹고 싶다고 했던 말이 기억났다. 은조가 핸드폰을 꺼내 들자 민후가 말했다.
“그러지 말고 외식하고 들어갈까?”
고개를 들고 쳐다보는 은조가 눈이 마주치자 웃었다.
“그럴까요?”
차 안의 공기는 어느 때보다 말랑말랑했다. 꼭 썸 타는 남녀 같았다. 서로를 의식하고 있었고 설레고 기분 좋은 마음을 티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고작 이틀 떨어졌다 다시 만난 건데 이렇게나 반갑고 애가 끓을까. 민후는 운전하면서 그녀를 안고 싶고 만지고 싶은 욕망을 잠재우느라 혼났다. 민후가 먹고 싶어 했던 김치찜 전문식당으로 갔다.
“30분 정도 걸리는데 괜찮으세요?”
“네. 괜찮아요.”
조리시간이 꽤 걸린다고 했지만 두 사람 다 개의치 않았다. 식사가 나오기 전에 마주 보고 있을 수 있는 시간이 길어지니까 오히려 더 좋았다. 주문을 받던 직원이 사라지고 조금 어색해진 은조가 숟가락과 젓가락을 꺼내 민후 앞에 놓았다. 민후는 컵에 물을 따라 은조 앞에 두고 자신도 한 컵 따라서 마셨다.
“어떻게 지냈어?”
민후는 고작 이틀 떨어져 지냈으면서 오래 떠나 있던 사람처럼 물었다.
“그냥 뭐. 별일 없이 잘 지냈어요.”
그때 식당에서 켜둔 TV에서 예지에 관한 뉴스가 나왔다. 예지가 기사에게 물건을 집어 던지고 핸드폰으로 머리를 때리는 장면이 나오자 식당에 있던 사람들이 혀를 차며 욕을 해댔다. 민후는 영상공개의 효과를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 꽤 통쾌했다.
“참, 저거 봤어요? 어제부터 저 기사로 난리도 아니에요.”
민후는 익히 잘 아는 영상이지만 벽에 걸린 TV에 시선을 고정하고 보았다.
“민후 씨 없는 동안 형님 어머님이랑 형님 갑질 기사로 난리인데 너무 떠들썩하니까 좀 불안하더라고요.”
“뭐가.”
“민후 씨 회사 이름도 나올까 봐서요. 아직은 형님 친정 쪽 기업 얘기만 나오는데 길어지면 불똥이 튈까 걱정돼요.”
민후도 그 걱정을 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곧 조용해질 거야.”
민후가 화면 속의 예지 모습을 보며 말했다.
“이참에 반성 좀 하면 좋겠는데.”
Rrrrrr. 그때 민후의 핸드폰이 울렸다. 마침 예지에게서 온 전화였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민후가 화면에 뜬 이름을 보다가 덤덤한 표정으로 전화를 받았다.
“네. 강민후입니다.”
[서방님. 한국 들어왔다면서요?]
“네.”
[저 좀 만나야 하지 않을까요?]
“왜죠?”
[허.]
전화기 너머에서 예지의 탄식 같은 소리가 들렸다.
[나한테 사기 쳤잖아요!]
“제가 무슨 사기를 쳤다고 그럽니까?”
[분명 이실직고하고 사과하면 영상 파기한다고 했잖아요. 내가 사과하고 용서 구했잖아! 내가 다 잘못했다고 빌었는데 동영상 마음대로 넘겼잖아요!]
예지가 바락바락 소리쳤다. 그에 반해 민후는 느긋하게 대꾸했다.
“그때 얘기하지 않았습니까? 조금 빨리 얘기했더라면 데이터가 안 넘어갔을 텐데.”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때 제대로 사과한 거 맞습니까?”
[뭐라고요?]
“아내를 민 거는 당사자한테 사과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무슨 사과! 벌써 동영상 다 넘겨서 사람을 개망신을 시켜놓고!]
예지가 악에 받쳐 소리쳤다.
“사과하셔야 할 텐데.”
민후는 의자에 등을 기대며 여유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허, 미쳤어요? 오히려 사과해야 할 사람은 서방님이에요! 나한테 사기쳐놓고!]
“그 카메라 메모리카드에 다른 사진도 있더군요.”
악에 받쳐 소리치던 예지가 순간 조용해졌다.
[……무슨 사진이요?]
“형수, 이번에 나한테 고마워해야 할 겁니다. 하마터면 그 기자한테 돈 왕창 뜯길뻔했어요.”
[무슨 말이에요, 대체!]
“하이클래스, 여기 형수님 단골집인가 보죠?”
[…….]
예지가 찍혔던 술집 이름을 말하니 갑자기 예지가 말이 없어졌다.
“사진 많이 찍혔던데. 이거 형님한테 보내면 이혼 사유가 충분하겠던데요.”
[…….]
머리를 굴리고 있는지 예지는 아무 말이 없었다. 찍힌 사진이 어느 정도 수위까지 있는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거친 숨소리만 들렸다.
[원하는 게 뭐예요?]
예지의 목소리에 떨림이 다분했다.
[동영상 유포하고 날 이렇게까지 바닥으로 끌어내렸으면 된 거지 또 무슨 짓을 하려는 거예요!]
“난 그 기자처럼 형수한테 돈 뜯어낼 생각은 없어요. 사생활 가지고 그렇게 치사하게 구는 거 취미도 없고.”
[원하는 게 므냐그.]
이를 악물고 말하는지 발음이 뭉개졌다.
“기자한테 뜯길 돈 굳었으니 나한테 일단 고마워하시고. 또 하나는.”
민후가 앞에 앉은 은조에게 시선을 주며 말했다.
“아내한테 제대로, 분명하게, 사과해요.”
[…….]
“임신한 아내를 위험하게 한 짓들.”
예지는 말없이 거친 숨소리만 내고 있었다.
[이거 협박이에요.]
예지가 바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 협박이라 생각하시면 협박죄로 저 고소하시든가요. 그러면 그 사진들도 법정에서 증거로 다 공개되겠네요. 형님도 자연히 알게 될 거고, 아버지도 아시게 될 거고, 기자들도 좋은 떡밥 물게 되겠죠.”
[으으…….]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부들부들 떠는 목소리가 핸드폰으로 들렸다.
“그럼 고소장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래도 형님한테는 먼저 보여주는 게 낫겠죠? 기사로 알게 되면 배신감이 더 클 테니까.”
[서방님!]
예지가 다급하게 불렀다.
[제발…… 안 돼요.]
예지의 목소리가 떨렸다.
[몇 번 안 갔어요. DY 그룹 둘째 사모님이 가자고 해서 몇 번 따라간 것뿐이에요. 기현 씨한테 제발 얘기하지 말아 주세요.]
예지는 비굴하게 빌기 시작했다.
[제발 부탁해요. 서방님이 원하는 것 뭐든 할게요.]
“사과하시죠. 아내한테.”
[할게요. 제가 사과할게요.]
“찾아와서 제대로 사과하세요. 사과 내용 들어보고 진정성이 느껴지면 이 건은 묻어두겠습니다. 하지만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거짓 사과면 형한테 바로 넘기겠습니다.”
말하고 냉정하게 전화를 끊은 민후가 은조를 보았다. 통화내용을 듣고 그녀가 많이 놀란 모양이었다. 무슨 영문일까 궁금해 쳐다보고 있던 은조가 물었다.
“형님이죠? 무슨 일이에요?”
“응. 형수야.”
민후는 언젠가부터 예지의 호칭에서도 ‘님’ 자를 빼버렸다.
“근데 무슨 말이에요? 사진이라뇨. 다 무슨 얘기예요?”
“중국에서 일이 좀 있었어.”
민후가 주변에 사람들이 있는 것을 의식한 듯 둘러보다가 말했다.
“밥 먹고 조용한 곳에서 얘기해줄게.”
은조는 공개적인 자리에서 하기는 어려운 얘기인가 보다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식사 후 근처 커피숍으로 갔다.
“음료 제가 주문할게요.”
뭐든 비서진들이 다 알아서 해주는 민후가 커피숍에서 주문할 줄이나 알까 싶었다.
“아니야. 앉아 있어. 내가 할게.”
민후가 은조의 어깨를 잡아 자리에 도로 앉혔다. 은조는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민후에게 내밀었다.
“이거…….”
“됐어. 계산은 내가 해.”
무슨 내외하는 것도 아니고 남편에게 카드를 내미냐는 얼굴로 민후가 말했다.
“아뇨. 별 모으고 있거든요.”
“응?”
민후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별 모으면 무료 음료권이 나와서요. 적립해달라고 하시면 돼요.”
민후가 적립카드를 받아들고 은조와 카드를 번갈아 보았다.
“무료 음료 한 잔 때문에 모은다고?”
은조가 다들 그렇게 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민후는 피식 웃더니 카드를 들고 주문대로 갔다. 은조는 소파에 기대 민후가 주문하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뒤에 서서 기다리던 여자 두 명이 민후를 보고는 수군댔다. 눈빛이나 표정을 보아하니 아마도 키도 크고 멋져서 자기들끼리 얘기 중인 것 같았다. 민후가 주문한 음료를 들고 걸어왔다.
“자, 여기. 자몽에이드.”
뒤에 있던 여자 두 명이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일행이 여자인 것을 확인하고는 실망하는 표정이었다.
“여자랑 왔어. 애인인가 봐.”
은조는 여자들이 자신을 부러워하는 것 같아 새삼 기분이 좋았다. 남편이 이렇게 멋진 남자인 것이 얼마나 행운인지 모르겠다. 은조가 배시시 웃으며 얼음이 가득 들어간 차가운 음료를 빨대로 휘저었다. 달그락거리는 청량한 얼음 소리를 들으며 민후에게 물었다.
“아까 얘기 해봐요. 중국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민후가 잔을 내려놓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중국 가는 비행기에서 이선주 씨를 만났어.”
얼음을 젓던 은조가 멈칫하고 놀란 얼굴로 민후를 쳐다보았다.
“지난번에 집행유예 받았거든.”
민후는 선주를 만났던 얘기부터 사진을 몰래 찍던 남자를 잡아 예지의 음모를 알게 된 경위를 낱낱이 얘기했다. 은조는 한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그 기사들이 나온 배경이 민후였다는 사실에 놀랐다.
“형님 그 기사가…… 민후 씨가 냈던 거였어요?”
“당신이나 나한테 못된 짓을 꾸민 걸 알게 된 이상 그냥 넘어갈 수는 없지.”
음모를 꾸민 예지의 이야기를 들은 은조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민후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지난번 일도 증거도 없어 난감했는데 본인 입으로 실토까지 했으니 당신한테 사과할 거야.”
민후가 차가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얼음을 와그작 깨물었다.
“사과 안 하고는 못 배길 거야. 이혼당하고 싶지 않으면 하겠지.”
은조는 예지가 그렇게 악질적인 음모를 꾸몄다는 게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자신을 계단에서 일부러 민 것도 자백했다니 이해가 가지 않았다.
“형님은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걸까요?”
“형수가 견제하는 이유는 단 하나야. 형이 차기 후계자가 되는 데 걸림돌이 되는 건 다 제거하려는 거야.”
“형님은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데요?”
“형이나 친정 쪽에서 검찰송치까지 가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겠지. 기소 건은 금방 무마될 거야.”
은조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예전처럼 당신한테 함부로 하지는 못하겠지. 약점을 들켰으니. 일하는 사람한테도 전보다는 태도가 나아질 거고.”
“그렇겠죠.”
“그거면 난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어. 당신을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되는 사람이라고 인식시켜주는 거. 그게 내 목적이었어.”
민후의 올곧은 눈을 바라보는 은조의 눈동자가 떨렸다. 자신을 보호하고 지켜주기 위한 것이 목적이라니. 가슴이 벅찬 감동으로 부풀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