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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아내를 위한 선물 (36/100)

38. 아내를 위한 선물2022.01.11.

예지 옆에 앉은 기현도 얼굴이 굳어 있었다. 예지의 인성을 어느 정도 눈치는 채고 있었지만, 사람들 앞에서는 늘 고상한 여자였다. 우아하고 고상한 청담동 며느리 같은 이미지였다. 본래 인성이야 어떻든 겉으로 괜찮은 이미지를 고수하고 있으니 문제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아내의 치부가 세상에 드러나 창피해서 오늘은 출근도 못 했다. 집에서 얼굴을 마주하고 있으니 할 게 부부싸움밖에 없었다. 기현은 아내를 위로하고 보듬어주기는커녕 원망하고 탓을 했다. 죽일 듯이 싸우고 있다가 강 회장의 호출을 받고는 일시 휴전상태로 삼성동으로 향하는 중이다. 삼성동에 도착한 기현과 예지는 강 회장 앞에서 죄인처럼 머리를 조아렸다. 강 회장은 굳게 입매를 닫고 예지를 응시했다. 예지는 눈을 들어 강 회장 눈치를 슬쩍 보다가 눈이 마주치자 얼른 시선을 내렸다.

16551888867479.png“아버님…… 정말 죄송합니다.”

16551888867484.jpg“나한테 죄송할 것이 뭐가 있어. 네가 사과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너한테 인권을 무시당한 사람들 아니냐?”

예지는 숙인 고개를 더 숙였다.

16551888867484.jpg“그 운전기사가 고소했다면서?”

16551888867479.png“……네.”

16551888867484.jpg“어떡할 거냐? 계획은 있어?”

예지가 눈을 들어 강 회장을 보며 말했다.

16551888867479.png“찾아가서 돈 봉투 좀 쥐여주면 고소 취하할 거예요. 그런 사람들 돈에 눈이 먼 사람들이잖아요.”

예지의 말에 강 회장의 하얀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16551888867484.jpg“뭐? 네가 지금 제정신이야?”

강 회장이 탁자를 쾅 내리치며 호통치는 바람에 예지가 깜짝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16551888867484.jpg“지금 온 나라가 너 때문에 난리가 났는데도 지금 그게 할 소리냐? 돈 봉투 주면서 회유했다는 기사까지 나고 싶어?”

예지는 꼬리를 만 강아지처럼 주눅이 들었다.

16551888867484.jpg“너 그 기사한테 사과는 한 거냐?”

예지가 눈을 들어 강 회장 눈치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16551888867479.png“아, 아뇨.”

강 회장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16551888867484.jpg“그게 순서지. 고소 취하해 달라는 말 이전에 사과가 먼저라고.”

예지는 고개를 숙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16551888867479.png‘무슨 사과를 하라고 저러시는 거야, 아버님은.’

강 회장이 이번에는 기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16551888867484.jpg“너는 일이 이렇게 되도록 뭘 한 거야? 이런 기사가 나올 때까지 몰랐던 거야?”

16551888896271.png“제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기현은 자신도 불명예스럽기는 마찬가지라 툴툴댔다. 강 회장이 예지를 쳐다보았다.

16551888867484.jpg“너는 기사 나오는 거 알고 있었어?”

예지는 뜨끔해서 눈치를 보았다. 이 기사가 나온 배경을 설명하면 은조나 민후에게 저지른 일들이 노출될 것이다. 그러면 실망한 회장님에게 더 큰 실망을 안겨 줄 것이다.

16551888867479.png“아, 아뇨. 얼마 전에 그 운전기사를 해고했거든요. 앙심을 품고 벌인 일 같아요.”

강 회장이 긴 한숨 끝에 말했다.

16551888867484.jpg“기소되면 벌금으로 무마할 테니까 그때까지 둘 다 조용히 지내라. 큰 며느리는 SNS도 다 끊고 칩거해. 바자회니 뭐니 그런 거 하지 말고.”

예지는 인맥 관리 차원에서 활발하게 사회활동을 하며 SNS에서 주목받는 삶을 은근 즐기고 있었다. 재벌가 사모님들 모임에도 이제 창피해서 나갈 수가 없게 되었다. 기사가 나가고 이미 몇몇 기업 사모님들은 예지를 언팔했다.

16551888867484.jpg“기현이도 다른 외부활동 하지 말고 조용히 지내. 이번 창립기념일 행사에도 참석하지 마라.”

기현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16551888896271.png“예? 저까지 왜 그래야 하는데요?”

16551888867484.jpg“언론에서 주목할 시기이니 근신하라는 거다. 지금 주주들이 동요하고 있을 거다. 이엑스푸드와 혼맥인 걸 다 알고 있고 이엑스푸드 주가가 폭락하지 않았더냐?”

16551888896271.png“창립기념일 행사에도 오지 말라뇨. 그건 너무하잖아요!”

얼마 후 한주 그룹 창립기념일을 맞아 행사가 열린다. 거기서 기조연설을 누가 하느냐가 중요한 사안이다. 그룹의 중요인물이 맡는 것이 관례라 올해 창립기념일 기조연설자가 차기 후계자로 예상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기현이 할지, 민후가 할지, 제3의 인물이 할지에 모두 관심을 가진 사안이었다. 그런데 아예 참석조차 하지 말라니, 후보로서의 기회마저 박탈당하는 것이다. 강 회장이 눈을 찡그리며 말했다.

16551888867484.jpg“기현이 네놈도 갑질 논란에서 자유로우냐? 너도 만만치 않은 놈 아니더냐? 네 영상도 누군가가 가지고 있을 수도 있어!”

강 회장은 기현도 권력에 취해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불안했다.

16551888867484.jpg“지금은 조용히 몸 사리고 있어야 할 때야. 사진 하나만 이상하게 찍혀도 없는 얘기를 만들어내는 언론 아니더냐?”

기현은 인상을 쓰고 예지를 쏘아보았다. 괜히 예지 때문에 자신까지 피해를 본다는 생각에 짜증이 치솟았다. 예지는 왜 쏘아보느냐는 듯 매서운 눈으로 같이 노려보았다. 시선을 돌린 기현이 강 회장에게 말했다.

16551888896271.png“그럼 창립기념일 행사 때 기조연설 누가 하는데요?”

16551888867484.jpg“뭐?”

강 회장은 기현의 속셈을 간파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기현이 기조연설을 하고 싶어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16551888896271.png“민후가 못하게 하세요.”

아무리 그래도 지금 같은 상황에서 제 욕심이나 차리고 있는 장남이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강 회장이 혀를 찼다.

16551888867484.jpg‘저 저 가볍기 짝이 없는 놈.’

자신이 못 한다면 민후도 못 하게 하려는 저 심보가 고약했다.

16551888896271.png“저는 참석도 못 하는데 설마 민후 자식한테 기조연설 시키실 건 아니시죠?”

16551888867484.jpg“그걸 내가 결정해? 이사회에서 결정하는 거 모르냐? 얘기 끝났으니 그만 가라.”

강 회장이 끙,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16551888896271.png“결정은 이사회에서 하지만 아버지 한마디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거 아시잖아요.”

기현은 일어나 움직이는 강 회장 뒤를 따르며 애처럼 졸랐다.

16551888896271.png“이사회에 아버지가 한마디만 슬쩍 흘려주시면 되잖아요.”

강 회장이 뒤를 돌아보며 호통쳤다.

16551888867484.jpg“시끄럽다 이놈아! 넌 큰며느리 기소 문제나 신경 써! 실력 있는 변호사 몇 명 붙여줘야 할 것 아냐!”

크게 꾸짖고 돌아서자 기현은 고개를 홱 돌려 예지를 쏘아보았다.

16551888867479.png“왜 째려봐요?”

16551888896271.png“뭘 잘했다고 큰소리야! 당신 때문에 나까지 이게 무슨 꼴이야!”

기현과 예지는 서로를 탓하며 한참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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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은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이다. 짐을 싸는 민후는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원래 일정이라면 오후 미팅까지 하고 저녁 비행기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아내에게도 밤이 되어야 집에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문제가 잘 수습되어 마지막 미팅은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되었다. 민후는 예상보다 더 일찍 집으로 돌아갈 수 있어서 조금은 들떴다. 아내에게 돌아가는 일정이 당겨졌다고 전화하려고 했다. 그런데 시각을 확인하니 한창 일할 시간이라 민후는 핸드폰을 다시 넣었다.

16551888953147.png‘말하지 말고 가서 깜짝 놀라게 해줄까?’

깜짝 놀라 눈이 동그래진 아내의 귀여운 표정을 떠올리니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민후는 변동된 일정을 얘기하지 않고 가기로 했다. 돌아가는 공항에서 민후는 면세점에 들렀다. 아내에게 줄 선물을 오늘은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1년간 결혼 생활 중에 몇 번의 출장이 있었다. 그때마다 민후는 면세점에서 아내에게 줄 선물을 살까 말까, 많이도 고민했었다. 함께 간 직원들은 아내와 부모님, 자녀들에게 줄 선물을 살 때 민후는 물건을 들었다 놓았다만 반복했다. 남처럼 지내던 때라 아내가 부담을 느낄까 봐 아내에게 선물하기가 쉽지 않았다. 언젠가 여성용 향수를 살까 말까 고민했던 때를 떠올리며 그 브랜드 매장으로 갔다. 아내에게 딱 어울릴 만한 향이어서 그 향수를 사주고 싶었지만 그때는 차마 사지 못했다. 오늘은 고민 없이 그 향수를 샀다.

16551888953147.png‘아내의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는데.’

  . . . 인천에 도착하니 오후였다.

16551888953147.png“수고 많으셨습니다. 주말까지 푹 쉬시고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함께 갔던 해외사업부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민후는 슈트 소매를 살짝 걷어 손목시계를 보았다. 아내의 퇴근 시간까지 두어 시간 남았는데 집으로 갈까, 아내를 데리러 갈까, 고민했다.

16551888953147.png‘박물관 앞에 가서 기다릴까? 가면 퇴근 시간이랑 얼추 맞겠네.’

저녁 비행기로 오는 줄 아는데 보면 깜짝 놀랄 아내의 모습을 빨리 보고 싶었다. 민후는 택시를 타고 곧장 아내의 직장으로 향했다. 박물관 근처 커피숍에서 차 한잔 마시며 기다리다가 퇴근 시간이 되어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얼마 가지 않아 아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16551888953163.png[네, 민후 씨.]

목소리가 밝았다.

16551888953163.png[지금 공항이에요? 7시 비행기니까 지금쯤 공항에 도착했겠네요.]

16551888953147.png“음. 공항이야.”

민후는 장난기가 발동해 태연하게 거짓말했다.

16551888953163.png[저도 이제 퇴근하려고요. 민후 씨는 집에 도착하려면 많이 늦겠죠? 한 10시, 11시쯤?]

16551888953147.png“아마 그 정도 되겠지?”

16551888953163.png[이따가 집에서 봐요.]

16551888953147.png“나 비행기 시간 많이 남아서 시간을 좀 보내야 하는데 좀 더 얘기해.”

민후는 통화하다가 딱 마주치는 상황을 만들고 싶어서 계속 통화하자고 말했다.

16551888953163.png[그래요? 네, 더 얘기해요.]

아내의 맑은 웃음소리가 났다.

16551888953163.png[저녁은 기내에서 먹겠네요?]

그녀도 퇴근 준비를 하는지 뭔가 분주하게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16551888953147.png“저녁 시간이라 기내식이 나오겠지.”

16551888953163.png[집에 오면 뭐 먹고 싶은 음식 있어요? 도우미 여사님께 부탁해놓을게요.]

16551888953147.png“음…….”

민후는 먹고 싶은 음식을 생각하느라 길게 고민하는 소리를 냈다. 머릿속에 생각나는 건 아내밖에 없었다. 자신의 음흉한 생각을 아내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16551888953147.png“김치찜이 먹고 싶네. 중국 음식 너무 기름져서 속이 안 좋아.”

16551888953163.png[알았어요. 여사님께 부탁해놓을게요. 늦게 들어와도 먹을 수 있게 해달라고 할게요.]

아내의 목소리는 왠지 신나 보였다. 자신처럼 며칠 만에 만나게 되는 것이 기뻐서 그런 걸까? 아니면 퇴근 시간이면 생기가 도는 여느 직장인의 모습인 걸까?

16551888953163.png[먼저 퇴근하겠습니다.]

아내가 주변 사람에게 퇴근하겠다고 인사하는 소리도 들렸다.

16551888953163.png[이제 사무실에서 나왔어요. 일이 잘 해결되었나 봐요. 생각보다 출장이 빨리 끝났네요.]

아내는 걸어오면서 통화하느라 목소리가 고르지 않았다. 민후도 박물관 출입구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16551888953147.png“응. 생각보다 잘 해결됐어.”

곧 만나게 될 상황을 생각하니 마음이 괜히 들뜨고 두근거렸다.

16551888953163.png[다행이에요.]

유리문 너머로 아내의 모습이 보였다. 민후는 기둥 뒤에 숨어서 아내가 걸어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16551888953163.png[거긴 날씨 어때요? 서울보다 더 덥죠?]

아내는 아직도 중국에 있는 자신과 통화하는 줄 알고 현지 사정에 관해 물었다.

16551888953147.png“비슷해.”

민후는 점점 다가오는 아내를 보며 짜잔! 하고 갑자기 모습을 보이며 장난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하지만 그 정도로 가까워진 것 같지는 않다. 아내가 유리문을 열고 나오면서 계속 얘기했다.

16551888953163.png[요즘 뉴스 보면 형님에 관한 기사가 아직도 많아요. 형님 고소되었다고 하던데 혹시 민후 씨 회사에 피해 가는 것 아니에요?]

16551888953147.png“그럴 것 같지는 않아.”

16551888953163.png[형님 이제 어떻게 될까요? 기소까지는 안 되겠죠?]

민후는 은조 가까이 다가가며 대답했다.

16551888953147.png“처벌받을 짓을 했으면 처벌받아야지.”

16551888953163.png[아주버님이나 친정 쪽에서 손써주지 않을까요? 고소 취하 쪽으로 손써줄…….]

핸드폰을 귀에 대고 걷던 은조가 걸음을 멈추었다. 습관적으로 땅을 보고 걷던 은조의 시선에 낯익은 구두코가 보였기 때문이다. 제 앞에 선 낯익은 갈색 구두에서 칼 주름이 잡힌 바지로 점점 시선을 올렸다. 시선을 들어 제 앞에 서 있는 민후를 보고 은조의 입이 점점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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