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복수하는 남자는 섹시하다2022.01.08.
[언론에 보낼 영상은 형수님 얼굴이 확실히 찍힌 풀 영상입니다.]
“자, 잠깐…… 서, 서방님.”
[지금 언론 홈페이지에 접속했어요. 익명으로 제보 영상 보낼 준비 중입니다.]
예지는 큰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생각했다. 지금 엄마의 갑질 영상이 세간에 화제가 되어 있다. 거기에 자신의 영상까지 풀린다면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될 것이다.
‘어, 어떡하지?’
[제목은…… 그 엄마에 그 딸. 이엑스 푸드 딸의 갑질 영상 공개.]
전화기 너머에서는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계속 들렸다. 공갈·협박이 아닌 진짜 영상을 언론에 보내려는 것 같았다. 예지는 두려움과 공포로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세차게 뛰었다. 전화기를 든 채로 걸음을 이리저리 옮기며 손톱을 물어뜯었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이엑스 푸드 주가도 많이 내려갔던데, 더 급락하겠네.]
저 영상이 나갔다가는 아버지 기업이 폭삭 망할 수도 있다.
“잠깐만!”
예지가 소리쳤다. * 전화기 너머에서 예지의 긴박한 목소리가 들렸다.
[서방님, 제가 잘못했어요! 네, 제가 한 거 맞아요. 제가 그랬어요! 이선주 씨 중국 보낸 것도, 사진 찍게 한 것도 다 제가 그랬어요.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
민후는 미간을 잔뜩 좁힌 채 예지의 절박한 목소리를 들었다.
[동서 계단에서 민 것도 잘못했어요. 저보다 먼저 임신한 것이 죽도록 얄미웠어요. 죽을 만큼 질투가 났어요. 아기가 잘못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으흐흑.]
흐느끼는 목소리도 섬뜩해 민후는 인상을 구겼다.
[제가 교활하고 나쁜 년이에요. 제가 다 잘못했어요. 용서해주세요. 서방님. 흑흑.]
민후는 손으로 이마를 문지르며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평정심을 되찾고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런. 형수님. 좀 빨리 말씀하시지.”
[……?]
“벌써 보내버렸는데.”
민후는 이미 언론에 영상을 보낸 지 오래다. 예지의 입으로 실토하는 것을 듣기 위해 떠보았는데 우습게도 쉽게 걸려들었다.
[뭐, 뭐라고요?]
“중국 인터넷이 엄청 빠르네요. 대용량 동영상이 1초 만에 언론사에 들어갔습니다.”
[…….]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지만, 예지의 표정이 어떨지는 안 봐도 뻔했다.
“어쩌죠? 방금 말씀하신 거는 못 들은 거로 할까요?”
[…….]
민후는 한쪽 입꼬리를 늘어트려 쓰게 웃었다.
“그런데 제 핸드폰에 통화 자동녹음기능이 있어서 녹음까지 되어버렸는데. 어쩌나.”
[이……이…….]
분을 못 이기고 부들부들 떨리는 예지의 숨소리가 전화기로 흘러들어왔다. 민후는 작게 훗, 웃어 주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미친 듯이 날뛰는 예지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악에 받친 예지의 비명도 환청처럼 들리는 듯했다. 곧이어 비서실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전무님, 기사 준비되었습니다. 최종적으로 확인하기 위해 전화했습니다. 기사, 내보낼까요?]
민후는 신중히 처리하려고 잠시 침묵했다.
[이엑스 푸드 부회장님 영상 논란도 아직 사그라지지 않은 상태라 엄청난 파문이 일 것 같습니다. 영상 속 운전기사가 이예지 사모님을 폭행으로 고소 진행도 하기로 했습니다. 고소까지 진행하니 검찰 출두하는 모습 TV 화면으로 나갈 것 같고요.]
‘동서가 저보다 먼저 임신한 것이 죽도록 얄미웠어요. 죽을 만큼 질투가 났어요. 아기가 잘못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민후는 예지의 만행들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담담하게 말했다.
“네. 진행하세요.”
민후의 눈동자가 단호하게 빛났다. 가족으로 엮이긴 했어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 은조가 오후 식곤증을 해소하기 위해 1층 커피숍으로 내려갔다.
“야야, 너 이거 봤어?”
시은이 핸드폰을 보며 호들갑스럽게 말했다.
“이예지, 네 큰동서잖아. 기사 떴어.”
“응?”
은조도 핸드폰을 꺼내서 기사를 보았다. -그 엄마에 그 딸? 닮은꼴 갑질 모녀. 이엑스 푸드 부회장에 이어 딸도 재벌 갑질.- 제목이 클릭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었다. 요즘은 재벌 갑질이나 이엑스 푸드 해시태그만 붙으면 사람들이 미친 듯이 클릭하기 때문이다. 동영상에는 목소리 변조와 모자이크가 되었지만, 은조는 보자마자 예지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은조가 평소 느낀 대로 고용인에게 함부로 대하는 예지의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한편으로는 걱정도 되었다. 요즘 재벌 갑질에 대해 대중들이 강하게 분노하기 때문에 행여 한주 그룹도 같이 욕을 먹지는 않을까 해서다. 기사에는 이엑스 푸드 부회장의 딸이라는 내용만 있고 한주 그룹은 아예 언급이 없었다. 그나마 천만다행이었다. 기사에는 예지에게 퍼붓는 온갖 비난과 조롱의 댓글들이 달리고 있었다. 관련 기사들이 속속 등장하고 실시간 검색어에도 등장했다. 은조는 그날 저녁 민후에게서 전화가 왔을 때 그 얘기를 했다.
“민후 씨 요즘 한국이 난리예요.”
[왜?]
“재벌 갑질이라는 제목의 영상물이 인터넷에 떠돌아다니거든요. 그게 형님 친정 기업인 이엑스 푸드에 관한 영상이에요. 형님 어머니인 부회장님이 백화점에서 갑질하는 영상이 나와서 쟁점이 되었거든요. 그런데 오늘 형님에 관한 영상도 뜬 거예요.”
은조는 민후가 그 기사를 낸 장본인이라는 사실은 꿈에도 모르고 미주알고주알 얘기했다.
[저런, 형수 영상도 있어?]
민후는 알면서도 모른 척 대꾸했다.
“네. 사실 형님이 고용인들에게 함부로 말을 하거든요. 뒷말하는 것 같아서 여태 아무 말 안 하고 있었는데 사실 영상 속 모습을 저도 몇 번 봤어요.”
[그래? 평소 모습이 그러니까 이렇게 드러나는 거지. 어쩐지 이엑스 푸드 주가가 급락했던 이유가 있었네.]
민후가 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형수한테 곧 사과받을 수 있게 해줄게.]
“네?”
갑작스러운 말에 은조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형수가 당신 계단에서 밀었던 거 말이야.]
“형님이 절대 자기는 안 그랬다고 그러는데요? 증거라도 찾았어요?”
[비슷한 거. 일단 기다려봐.]
민후는 더 길게 얘기하지는 않았다. 은조는 예지가 지금 정신없는 와중에 자신에게 사과할까 싶었다.
“일은 잘 진행되고 있어요?”
[응. 모레는 한국 갈 수 있을 것 같아.]
듣던 중 반가운 소리라 은조가 반색했다.
“아, 정말이요?”
[응. 최대한 빠르게 진행하는 중이야.]
모레 그가 돌아온다는 말에 은조의 얼굴이 기쁨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너무 좋아하는 티를 낼 수가 없었다.
“네. 업무 잘 보고 와요.”
올라간 입꼬리를 그가 볼 수 없어 다행이라 여겼다.
* 민후는 은조의 목소리에서 그녀도 속시원함을 느낀 것을 알 수 있었다. 곧 형수로부터 지난 일도 사과받을 수 있도록 해줘야겠다. 사진기자의 카메라 메모리카드에는 예지의 또 다른 사진도 있었다. 예지의 사생활이 담긴 사진들이었다. 남자접대부가 있는 술집에 드나드는 사진, 남자와 2차를 나가는 사진 등이었다. 사진기자는 이거로 한몫 단단히 챙길 목적이었던 것 같았다. 이건 아내에게 사과하게 하는 용도로 써야겠다. 이제 형수도 은조에게 함부로 하지는 못할 것이다. 민후는 전화를 끊고 선주와 자신이 찍힌 사진들을 다시 보았다. 이제 남은 건 이선주였다. 이선주가 중국에 온 것도, 자신에게 접근한 것도 모두 형수의 계획이었다는 사실이 소름 끼쳤다. 찍힌 사진들을 보면 한국에 돌아가는 대로 증거자료로 쓸 수 있을 만한 것들이었다. . . . 민후는 다음날 미팅을 하기 위해 호텔을 나서다가 로비에서 선주를 마주쳤다. 선주는 민후를 보자마자 움찔하며 뒷걸음질 쳤다. 사진 찍던 사람이 민후에게 들키고 나서야 선주는 자신이 예지의 계략에 이용당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예지가 애초 설명하기를, 사진은 꼴 보기 싫다던 동서에게 보내주려고 찍는다고 설명했었다. 민후에게 잡혔던 사진기자에게 들으니 그게 아니라 예지가 민후의 스캔들을 계획했고 자신을 이용한 거라고 했다. 찍은 사진들은 민후에게 다 뺏겼다는 얘기도 들었다. 자신이 접근한 것이 고스란히 담겨 있을 것이다. 집행유예 기간 동안 몸을 사리고 싶었던 선주는 자신이 위험한 상황에 처했다는 것을 감지했다. 몰래 한국으로 돌아가려고 체크아웃을 하다가 민후에게 딱 걸린 것이다. 선주를 본 민후가 표정을 굳혔다. 그리고 긴 다리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민후가 먼저 선주에게 다가오는 것은 처음이었다. 다가가면 항상 보안요원에게 저지만 당했던 선주는 이 상황에 우습게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의 시선은 똑바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언제나 고개를 돌리기 일쑤였는데. 민후가 선주 가까이 다가가 가만히 쳐다보았다.
“이선주 씨, 하나만 물읍시다.”
이렇게 먼저 말을 걸어준 것도 처음.
“이예지 씨와 언제부터 아는 사이입니까?”
“……네?”
민후는 예지와 선주의 접점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 궁금했다. 설마 1년 전 스토킹할 때부터 형수가 연관되어 있는 건 아닌지 그것도 의심스러웠다.
“얼마 전에 집에 찾아왔었어요. 그래서 알게 되었어요.”
“이예지 씨가 집까지 찾아갔다는 거군요. 날 스토킹했다는 사실을 알고 간 거네요.”
“네.”
선주를 포섭한 것부터 다분히 계획적이었다. 민후가 짜증스럽다는 듯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집행유예 기간인데 반성은커녕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군요.”
“…….”
“사진기자가 사진을 초 단위로 많이도 찍었더군요. 덕분에 이선주 씨가 계획적으로 접근했던 거. 식당에서 일부러 신체 접촉했던 거, 호텔 방에 강제로 들어가려고 했던 것 다 찍혔습니다.”
선주의 예상대로 찍힌 사진이 자신을 위험에 빠트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선주가 불안한 얼굴로 민후를 보았다.
“한국 가서 법정에서 보죠.”
민후가 딱딱하게 말하고는 홱 뒤돌아 가버렸다. 그가 떠난 자리에 찬바람이 휭 도는 것 같았다. 선주의 안색이 서서히 변했다. 눈빛이 독하게 변하더니 혼잣말했다.
“이예지? 날 속였지! 당신 가만 안 둬.”
*
“기현이하고 큰며느리 삼성동으로 건너오라고 해.”
예지의 동영상이 논란거리가 되자 한주 그룹 강 회장도 몹시 노했다. 그동안 강 회장 앞에서는 내숭이란 내숭은 다 떨면서 얌전한 모습만 보였기 때문이다. 예지에 대한 실망감도 실망감이지만 강 회장은 행여 그룹에 불똥이 튈까 노심초사했다. 기사에는 이엑스 푸드와 한주 그룹이 혼맥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지만, 예지가 한주 그룹의 며느리라는 사실은 재계에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기사가 떠들썩하게 났을 때도 재계 대표들과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강 회장이 옆에 있으니 겉으로는 말들 안 했지만, 속으로는 얼마나 비웃었겠나, 생각하니 화가 치솟았다. 주변 사람에게 창피해서 고개를 들기가 힘들었다. 제 앞에서는 생글거리며 아버님 아버님 하며 아부를 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허영심과 탐욕이 좀 있기는 해도 인성이 이렇게 바닥일 줄 몰랐다. . . . 강 회장의 호출을 받고 기현과 예지는 차를 타고 삼성동으로 향했다. 예지는 기사가 나온 후 활발히 활동하던 SNS도 비공개로 전환했다. 누리꾼들이 몰려와 욕으로 도배되고 있어서다. -인성 무엇? 에잇, 퉤!- -이런 사람들이 만든 음식을 먹고 살았다니. 먹었던 이엑스 푸드 다 게워내고 싶다.-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라더니. 엄마랑 똑같네.- 태어나 그렇게 많은 욕을 먹은 것이 처음이었다. 모든 걸 손에 쥐고 태어났고, 원하는 건 모두 가지며 살아온 예지였다. 세상 사람들이 자신에게 손가락질을 하는 상황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멍하게 앞만 보고 가는 예지의 얼굴이 눈에 띄게 수척했다. 항상 생기 있던 얼굴이 오늘은 화장기 없이 초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