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누가 시켰어?2022.01.01.
“전무님! 저 좀 도와달라고요!”
선주가 민후의 방에 따라 들어오려고 다가선 순간. 찰칵찰칵. 어디선가 카메라 셔터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
민후가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카메라로 찍고 있던 검은 모습의 사람 하나가 쑥 몸을 숨겼다. 민후가 섬뜩한 기운을 느끼고 곧장 남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타다다닥! 그러자 남자가 복도를 뛰어 도망가기 시작했다. 민후도 곧장 쫓아 뛰어갔다. 남자는 비상구 계단 문을 열고 도망가려고 했지만, 민후가 더 빨랐다. 긴 다리로 뛰어가 남자의 뒷덜미를 잡았다. 퍽! 그대로 벽에 남자를 밀치고 얼굴을 벽에 짓이겼다.
“놔! 이거 윽!”
남자의 입에서 한국말이 튀어나왔다. 민후가 손으로는 남자의 목을 잡고 몸으로 눌러 움직이지 못하도록 했다.
“이거 놔, 씨X.”
남자는 얼굴이 벽에 짓눌린 채 욕지거리를 뱉었다. 목덜미를 누르는 민후의 손에 더욱 힘이 가해졌다. 남자는 압도적인 민후의 힘에 당황했다.
“뭐야, 당신! 왜 사진을 찍는 거지?”
“죄, 죄송합니다. 사진은 지우겠습니다. 그, 그냥 신문사에 팔려고 그랬습니다.”
엄청난 힘으로 자신을 순식간에 제압하자 남자는 반항하는 것을 포기했다. 선주의 접근도 이상했고 선주가 호텔 방에 들어오려는 찰나에 사진을 찍은 것도 수상했다. 민후는 남자를 데리고 자신의 객실로 갔다. 선주는 그사이 도망갔는지 사라지고 없었다. 남자를 잡아놓고 민후가 추궁했다.
“누가 시켰어? 대체 왜 내 사진을 찍는 거야?”
“진짜 프리랜서 사진기자예요. 가십거리 사진 찍어 여기저기 팔려고 그랬어요. 제발 카메라는 그냥 돌려주세요.”
남자는 찌라시 등에 사진을 팔아넘기는 프리랜서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제발 카메라만 돌려주세요.”
비싼 카메라라며 카메라만 무사히 돌려달라 말했다. 민후는 카메라에 있던 칩을 빼냈다.
“초상권 침해해 놓고 이깟 카메라 걱정합니까?”
칩을 노트북에 연결해 수십 장의 사진들을 보았다. 사진을 확인한 민후가 어이가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공항에서부터 선주가 자신을 뒤쫓아오는 사진이 그대로 찍혀 있었다. 비행기에서 마주쳐 대화하는 모습, 술집에서 합석해 마주 앉아 있는 모습 등 선주와 자신이 함께 있는 모습 위주로 찍혔다. 의도적으로 이런 모습들만 찍은 것이 분명했다.
“이거 누가 시킨 겁니까?”
민후가 매서운 눈을 남자에게 돌렸다.
“아, 아니라니까요. 시킨 게 아닙니다.”
민후가 남자의 옷을 더듬어 핸드폰을 찾아냈다.
“아, 잠깐만요.”
남자가 제지했지만 민후는 통화목록에서 같은 번호와 여러 번 통화한 것을 발견했다. 민후가 그 번호의 숫자를 자신의 핸드폰에 하나하나 찍어보았다. 다 찍지도 않았는데 연락처 목록에 있는 이름 하나가 떴다. <이예지 형수님.> 민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형수가?”
남자가 여러 번 통화한 사람의 번호가 예지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 이름을 보자 민후는 소름이 돋았다. 대체 왜 사진을 찍으려는 걸까? 민후가 매서운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럼 이선주가 여기에 온 것도 형수와 연관이 있다는 말? 이선주가 형수랑 아는 사이라는 얘기야? 민후는 의문점만 계속 늘어나는 가운데 애초에 이선주가 스토킹한 것부터 모두 다 형수가 관련 있는지 생각하니 혼란스러웠다. 민후가 남자를 향해 물었다.
“이예지, 그 여자가 뭐라고 하면서 사진을 찍으라고 했습니까?”
남자는 두려운 얼굴로 대답을 머뭇거렸다. 민후가 무서운 얼굴로 남자의 카메라를 번쩍 들어 올렸다. 비싼 카메라라며 제발 돌려달라고 애원했던 남자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아! 안 돼!”
“이거 박살 내기 전에 빨리 말해요!”
남자는 민후 손에 든 카메라만 쳐다보며 빠르게 말했다.
“다정해 보이게만 찍으라고 했어요. 호텔 방에 들어가는 걸 찍으면 언론에 사진을 팔 수 있게 해주겠다고. 돈을 벌 거라고 했습니다.”
민후가 크게 숨을 내쉬었다. 이로 아랫입술을 물며 헛웃음을 흘렸다.
“하, 내가 외도하는 것처럼 기사를 꾸며내 타격을 주려고 했다?”
그렇게라도 이미지에 타격을 줘서 민후에게 호의적이던 이사회 사람들을 자신들 쪽으로 포섭하려는 의도인 것 같았다. 아내의 임신을 방해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형수는 생각보다 치밀하고 집요했다. 민후가 차기 경영자가 되지 못하도록 어떤 수단이라도 다 동원할 사람이었다. 생각할수록 형수는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었다.
“사진을 많이도 찍었네.”
민후가 찍힌 사진들을 차례로 넘겨 보며 말했다.
“이선주가 나한테 접근하는 사진도 찍혔고. 사진들 보면 우연히 마주친 게 아니라 의도적으로 접근했다는 증거가 되겠네. 한국 가서 좋은 증거물로 쓸 수 있겠어.”
민후가 사진 파일을 보다가 동영상 하나를 발견했다.
‘동영상까지 찍었어?’
자신을 몰래 찍은 건가 싶어서 재생해보았다. 그런데 동영상은 자신이 아닌 예지가 찍힌 영상이었다. 영상 속 예지는 운전 기사에게 막말하고 있었다.
<이 무식한 XX가! 네가 이러니까 운전기사나 하고 있지!>
그냥 듣고 있기도 불편한 기사의 인권을 무시하는 막말이었다. 막말뿐 아니라 핸드폰 모서리로 기사의 머리를 툭툭 찌르기도 했다. 고용자의 갑질이 고스란히 담긴 영상이었다.
“이건 왜 찍은 겁니까?”
민후가 남자에게 묻자 남자가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혹시 나중에 써먹을 데가 있을 것 같아서…….”
민후가 실소하며 말했다.
“돈을 받고 일을 하면서도 뒤로는 이런 꿍꿍이를 숨기고 있었네. 언제든 뒤통수를 칠 생각으로.”
“뒤통수칠 계획은 아니었습니다. 혹시 모르니까 보험으로 가지고 있으려고…….”
“어쨌든 좋습니다. 이 영상은 나한테 넘겨요.”
민후가 예지의 얼굴이 선명하게 찍힌 영상을 보며 조소했다.
“써먹을 타이밍이 온 거 같네.”
민후는 남자에게서 예지의 동영상을 받는 조건으로 돌려보냈다.
“이예지 씨한테는 나한테 들켰다 얘기하지 마시고 적당히 둘러대요.”
배후에 예지가 있다는 걸 들키지 않았다고 꾸미라 했다. 지금은 예지를 안심시켰다가 결정적일 때 쳐야 한다. 민후는 예지의 갑질 동영상을 계속 재생해보았다. 민후가 회전의자에 앉은 채 의자를 천천히 돌리며 혼잣말했다.
“형수, 이 동영상을 어떻게 활용해서 당신한테 복수해줄까?”
* 자정이 넘어가는 시각, 은조는 민후에게 전화를 걸까 말까 한참 고민했다. 중국에 도착하고 한 번, 중국 쪽 사람들과 저녁 먹으러 간다고 잠깐 통화하고는 바쁜지 그에게서 전화가 없었다. 핸드폰을 들었다가도 괜히 바쁜 사람에게 전화 건다 싶어 내려놓기가 여러 번이었다. 여유가 생기면 전화가 오겠지, 생각하며 은조는 침대에 누웠다. 몸을 이리저리 뒤척여도 잠이 쉬이 올 것 같지 않았다. 옆에 남편이 없다는 것이 생각보다 매우 허전했다. 생각해 보면 남편과 한 침대에 잔 지 아직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런데 벌써 익숙해진 건가? 남편의 빈자리를 보며 옆으로 누웠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민후였다. 입가에 미소를 띤 채 전화를 받았다.
“민후 씨.”
[아직 안 잤어? 내가 자는 거 깨운 거야?]
“아니에요. 아직 안 잤어요.”
당신이랑 통화도 안 했는데 어떻게 잠이 들겠어요. 은조는 속말은 삼키고 물었다.
“바쁜 건 끝났어요? 지금까지 일한 거예요?”
[아냐. 중국 쪽 사람들하고 저녁 먹고 들어오다가 일이 좀 있었어. 그거 좀 정리했더니 시간이 많이 지났네.]
“무슨 일이요?”
민후는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음, 별건 아니고. 가서 얘기해줄게.]
민후는 선주를 만난 사실과 형수의 음모를 알게 된 것을 은조가 알게 되면 걱정만 시킬 것 같아서 말하지 않았다.
[이제 여유가 좀 생겨서 전화하는 거야.]
“너무 피곤하겠어요. 오늘 새벽에 나갔는데 여태 쉬지도 못했죠?”
은조는 좀 더 길게 그와 통화하고 싶었지만, 종일 일했던 사람을 붙잡고 있기가 미안했다.
“벌써 12시 넘었어요. 씻고 자요, 내일 또 일이 있잖아요.”
[그러게, 시간이 많이 늦었네.]
대답하는 민후의 목소리가 무거웠다. 전화를 끊기 싫은 것은 민후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겨우 여유가 생겨 아내 목소리를 들었는데 이렇게 짧은 통화는 아쉬웠다. 바로 전화를 끊기 싫었던 민후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당기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침대 헤드에 기댄 편안한 자세로 아내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저녁 혼자 먹었어?]
“네. 혼자 간단하게 먹었어요.”
[뭐 먹었는데?]
끊기 싫으니 시시콜콜한 것까지 궁금해졌다.
“그냥 샐러드요.”
[그거 먹고 되겠어?]
영양가 있는 음식을 먹으라는 잔소리 같은 말을 늘어놓다가 할 말이 없어지자 둘 다 전화기만 들고 있었다.
“…….”
[…….]
두 사람 다 보고 싶다는 속의 말을 꺼내지는 못하고 숨소리만 듣고 있었다.
“그만 자요. 저도 자야겠어요. 끊을게요.”
은조가 먼저 끊겠다고 하니 민후가 말했다.
[안고 잘 거 없는데 어제 어떻게 잤어?]
매일 자신을 안고 자던 아내가 어떻게 잤을까 궁금했다. 솔직한 마음은 아내가 자신의 부재를 아쉬워하기를 바랐다.
“눈 떠보니 인형을 안고 있던데요? 민후 씨가 꺼낸 거 아니었어요?”
아, 맞다. 민후가 새벽에 나오면서 인형을 꺼내 아내 옆에 두고 나왔던 것을 기억했다. 괜히 인형을 꺼내주었다. 안 그랬으면 자신의 부재를 그녀가 조금은 느꼈을 텐데.
[그래. 나 없는 동안은 인형이라도 안고 자. 잘 자.]
“네. 민후 씨도 잘 자요.”
전화를 끊고 은조는 인형을 품에 안고 누웠다. 익숙한 듯했지만 뭔가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이 있었다. 남편을 안고 자면 따뜻하기도 했지만 뭔가 안정감을 더 채워줬는데. 은조가 고양이 인형을 품에 안고 말랑한 고양이 코를 만지며 말했다.
“안녕. 오랜만이네. 며칠만 네가 민후 씨 대신 나랑 자 줘야겠다.”
은조가 인형을 품에 꼭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 민후는 한국에 있는 비서실장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입수한 사진과 동영상을 보냈다.
[이선주 씨를 거기서 만났는데 그게 강기현 부사장님 사모님이 일부러 접근시킨 거라 이 말씀입니까?]
비서실장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와.]
비서실장이 충격적이라는 듯 탄식을 뱉었다.
“사진들 봤죠? 그거로 이선주 씨 계획적인 접근 증명 충분히 될 것 같습니다. 한국 들어가는 대로 법적 조치할 거니까 준비해 두세요.”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건 그 동영상인데.”
민후가 의자에 몸을 기대고 턱을 문지르며 물었다.
“어떻습니까? 문 실장. 그림 좀 만들 수 있겠어요?”
[재벌의 갑질 논란으로 여론이 금방 형성이 되겠죠. 문제는 한주 그룹이 언급되면 안 된다는 말씀 아닙니까?]
“정확합니다.”
민후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걸으며 통화를 계속했다.
“한주 그룹 며느리라는 신분이 거론되면 우리 그룹 이미지에 타격을 받을 겁니다. 가능하면 한주 그룹 말고 친정인 이엑스 푸드의 딸로 기사가 나가면 좋겠는데.”
[그러면 그전에 이엑스 푸드 관련 기사를 먼저 내보내고 여론이 일어날 때쯤, 이 동영상을 풀면 이엑스 푸드가 더 부각이 될 겁니다.]
“내보낼 만한 기사가 있습니까?”
[어머니인 이엑스 푸드 부회장님이 갑질로 좀 말이 많죠. 그걸 그대로 딸이 배운 겁니다. 알아보면 어렵지 않게 기사는 나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민후가 턱을 문지르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래요. 그렇게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