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전무님 방에서 자면 안 돼요?2021.12.28.
은조 집에서 나온 예지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도착했어요? 서방님하고 같은 호텔 투숙했죠?”
통화하는 사람은 중국으로 간 선주였다.
[호텔도 같은 호텔에 묵는데 의심하지 않을까요? 나 위험해지는 거 아니에요? 집유 기간이라 조심해야 한다고요.]
“거기 한국인들 많이 가는 유명 호텔이에요. 우연히 같은 호텔 예약했다고 하면 되지, 뭐가 위험하다는 거예요?”
[비행기에서 마주쳤을 때 전무님이 날 너무 무섭게 노려봤어요. 전무님이 과연 넘어오겠어요?]
선주는 비행기에서 마주친 민후의 표정이 너무 냉랭해 영 불안했다.
“선주 씨, 불안해하지 말아요. 서방님도 아내가 없는 곳에서 선주 씨를 만나면 태도가 달라질 거예요. 한국에서는 사회적 지위도 있고, 보는 눈도 많고 하니 아무래도 조심스럽지 않겠어요?”
선주는 예지의 말에 솔깃했다.
[정말…… 그럴까요?]
“그럼요. 우리 남편 말이 서방님이 해외에 가면 여자들 데리고 놀면서 방탕해진다고 했어요.”
예지는 선주를 안심시키고 사기를 북돋기 위해 거짓말까지 했다.
“아내도 없는 곳에서 자기 좋아죽겠다는 여자를 만나면 그 유혹 이겨낼 남자 있을까요?”
선주는 민후를 잘 아는 가족의 말이라 점점 현혹되기 시작했다.
“선주 씨가 매력이 없는 여자도 아니고. 안 그래요?”
한때 상상 연애까지 했던 선주여서 금세 홀리듯이 빠졌다.
[네. 알겠어요.]
전화를 끊은 예지는 비열한 웃음을 보였다. 또 다른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사모님.]
“잘 따라붙고 있죠? 사진 찍는 거 들키지 않게 조심하고요.”
[관광객처럼 위장해서 따라다니면서 사진 찍고 있습니다.]
“기사에 낼 만한 거 그럴싸한 거 한두 장만 건지면 돼요. 사진값은 톡톡히 쳐 드리죠.”
예지는 선주에게 접근하라고 시킨 뒤 몰래 사진 찍을 사람도 함께 보냈다.
“사진만 기가 막힌 각도로 찍힌다면 더 바랄 것이 없는데.”
‘재벌 2세, 내연녀와 해외 밀회 포착!’이라는 자극적인 제목과 함께 기사를 내는 것이 예지의 목표였다. 얄미운 은조의 속을 뒤집어놓을 목적. 그리고 민후의 이미지를 추락시켜 그를 신임하는 이사진들이 등을 돌리게 할 목적. 그 두 가지였다.
* 민후는 중국 쪽 사람들과 식사를 하기 위해 유명 식당으로 들어갔다. 문제 수습을 위해서 민후 쪽에서 접대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저녁이라 술도 함께 마실 수 있는 주점 겸 식당이었다. 주점에 들어온 지 30여 분도 지나지 않아 옆 테이블에 여자 손님 한 명이 앉았다. 무심코 고개를 돌린 민후의 두 볼이 서늘하게 굳었다. 혼자 앉아 있던 여자는 다름 아닌 선주였다. 선주는 일부러 민후 일행이 앉은 옆 테이블에 앉았다. 민후와 눈이 마주치기를 기다렸다가 놀란 척 연기하며 인사했다.
“어머, 전무님. 여기서 또 뵙다니! 우리 인연이 깊네요.”
민후는 두 번째로 선주를 마주치고는 소름이 쫙 돋았다.
‘이것도 설마 우연인 건가?’
선주가 목소리를 높여 아는체하니 일행들도 다 선주를 쳐다보았다.
『아는 분입니까?』
중국 왕 회장이 중국어로 물었다.
“……아.”
민후는 왕 회장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했다. 그때 선주가 유창한 중국어로 왕 회장에게 대답했다.
『전무님과 같이 일했던 계약직 직원이었어요. 하늘 같은 제 상사님이셨죠.』
중국어가 유창해 민후가 다소 놀란 얼굴로 쳐다보았다. 중국 쪽 사람이 민후의 옛 부하 직원이었다고 하니 반갑게 인사했다.
『아, 안녕하세요. 여기서 우연히 만나신 겁니까?』
『네. 혼자서 여행 중인데 올 때 비행기에서도 만났는데 여기서도 또 만났네요.』
『허허, 두 분이 인연이 깊네요.』
왕 회장이 민후와 선주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우리 중국 속담 중에 유연천리 래상회, 무연대면 불상봉(有緣千里 來相會, 无緣對面 不相逢)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연이 있으면 천 리 밖에 있어도 만날 수 있으나 인연이 없으면 얼굴을 마주하고 있어도 만날 수 없다는 뜻이죠. 두 분이 먼 타국에서 두 번이나 마주치니 인연을 넘어 필연 같습니다.』
중국 회장이 민후 마음도 몰라주고 선주에게 호의적으로 굴었다. 민후는 안 되겠다 싶어서 선주를 단호하게 끊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선주 씨, 지금 중요한 얘기 중이니까…….”
그만 가달라고 말하려는데 중국 회장이 눈치 없는 소리를 했다.
『혼자 여행 오셨다고요? 괜찮으시면 합석하시죠.』
민후가 당황하며 쳐다보았다.
『어머, 정말이요? 안 그래도 혼자 다니기 너무 외로웠는데 실례가 안 된다면 합석해도 될까요?』
민후가 미간을 잔뜩 좁히며 선주를 쳐다보았다.
『예, 그럼요. 다 괜찮으시죠?』
중국 회장은 민후를 비롯한 일행들에게 물었지만 형식적이었다. 이미 자신이 엉덩이를 옆으로 밀어 앉으며 자리를 만들어주고 있었다. 해외사업부 부장과 팀장도 민후와 같이 일했었다고 하니 합석에 별로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민후가 심각한 얼굴로 왕 회장에게 말했다.
『회장님. 업무적인 중요한 정보가 오갈 수도 있는데 합석은 좀…….』
『하하. 전무님. 업무 얘기는 이제 그만합시다. 아까 다 하지 않았습니까? 지금은 술 한잔하면서 우리 중국을 보고 느끼실 시간입니다.』
민후는 할 말을 잃고 난감한 표정이었다. 이 자리에서 사실은 저 여자가 자신을 스토킹했고 그것으로 처벌도 받았다는 얘기를 할 수가 없었다. 선주는 민후가 대놓고 싫어하는 눈치라 바로 앉기가 그랬는지 망설이고 있었다.
『이쪽으로 앉으세요.』
왕 회장이 선주에게 앉으라 하니 선주는 민후의 눈치를 보며 앉았다. 바로 맞은편에 앉은 것이 불편해진 민후가 상체를 뒤로 물리고 바로 고개를 돌렸다. 오늘은 민후 일행이 중국 쪽 사람들을 접대해야 하는 자리라 싫어도 자리를 박차고 나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선주가 중국어를 유창하게 하니 왕 회장과 대화가 잘 통했다. 그 과정에서 민후는 선주가 투숙 중인 호텔이 자신의 호텔과 같은 곳인 것을 알게 되었다.
『센트럴호텔? 강 전무님도 그 호텔이죠? 두 분 진짜 인연이네요?』
왕 회장은 속도 모르고 사람 좋은 웃음을 웃었다. 민후는 이 모든 것이 과연 우연일까, 하는 의구심이 점점 들었다. 자신을 스토킹한 전적이 있던 사람이니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어디서 정보를 구한 걸까? 정확한 항공편에, 투숙한 호텔까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대며 선주에게 자신의 정보가 어떻게 들어갔을까, 생각했다. 왕 회장은 남자들만 있다가 젊은 여자가 한 명 자리에 끼니 기분이 좋아 보였다. 술이 오갔고 왕 회장은 선주에게 술을 많이 권했다. 선주도 넙죽 받아마시며 점점 취했다. 민후에게도 술을 권했지만, 민후는 입술만 살짝 적시는 정도로 분위기만 맞추었다. 왕 회장은 술에 취하니 선주에게 선을 넘을 듯 말듯 스킨십했다. 그럴 때마다 선주가 힐끔 민후를 쳐다보았지만, 민후는 별로 도와주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민후가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에 갔다. 화장실에서 나오는데 선주가 앞에서 딱 기다리고 있다가 민후를 붙잡았다. 민후는 선주가 자신에게 달려들자 본능적으로 뒷걸음쳤다.
“전무님! 저 왕 회장님 이상해요. 자꾸 성추행한다고요!”
민후가 인상을 찌푸리며 선주를 일단 떼어냈다.
“왜 이래요! 똑바로 서요.”
선주는 진짜 술에 취한 건지, 술 취한 척 연기하는 건지 민후에게 기대다시피 했다.
“왕 회장님 저 추행 못 하게 해줘요.”
민후가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선주를 보았다. 보통의 아는 직원 같았으면 이 상황에 분명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선주가 먼저 의도적으로 접근한 것이 뻔해서 민후는 선주가 이러는 것도 짜증 났다.
“싫으면 일어나서 가면 되잖아요. 당신이 합석하고 싶어서 한 것 아닙니까?”
선주는 고개를 들어 냉정하게 말하는 민후를 쳐다보았다. 서운한 표정으로 울먹이는 연기까지 했다.
“전무님 너무하세요. 제가 당하고 있는 걸 그냥 보고만 있을 거예요?”
선주는 중심을 못 잡는 척하며 자꾸만 민후에게 기댔다. 그 순간을 누군가는 카메라에 계속 담고 있었다. 민후가 자꾸 안겨 붙는 선주를 강하게 떼어내고 무섭게 인상을 썼다.
“당신, 진짜 여행 온 거 아니지? 누구야? 누구한테 내 출장 스케줄 정보를 얻은 거야?”
선주가 움찔하더니 고개를 저으며 시치미를 뗐다.
“아니에요. 혼자 여행 온 거 맞아요.”
“당신 나한테 의도적으로 접근한 거잖아! 한국 돌아가면 법적 조치할 테니 그리 알아. 이번엔 실형 살게 해줄 테니까.”
“저 아무 짓도 안 했잖아요! 그냥 우연히 마주친 것뿐이라고요!”
집행유예 기간이라 그건 두려웠는지 선주가 소리쳤다.
“우연히 마주쳐도 날 아는체하지 말아야지!”
민후가 무서운 얼굴로 선주에게 말했다.
“이선주 씨, 당신 얼굴 보는 것 아주 역겨우니까 아는체하지 마.”
냉소적인 어조로 말하고 지나쳐 갔다. 그 자리에 혼자 남은 선주의 눈이 크게 요동쳤다. 지금까지 여러 차례 민후에게 접근하고 만남을 요구했지만 이렇게 잔혹하게 말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것이 다소 충격이라 선주는 그 자리에 한참 서 있었다. 그러고는 오히려 그것이 자극되었는지 선주가 결의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 . . 술자리가 끝나고 일행과 함께 택시를 타고 호텔로 돌아갔다.
“전무님, 편히 쉬십시오. 내일 뵙겠습니다.”
“네. 오늘 수고 많았습니다. 잘들 쉬어요.”
직원들이 11층에 내리고 민후는 자신의 객실이 있는 17층으로 올라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객실 쪽으로 걸어가는데 기다란 복도 끝에 누군가 서 있었다. 멀어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민후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객실 가까이 다가가자 예상대로 객실 앞에 서 있던 사람은 선주였다. 선주를 보자 불쾌한 감정이 몰아쳤다. 걸음을 멈춘 민후가 얼굴을 사납게 찌푸렸다.
“뭡니까.”
낮고 정제된 목소리로 말했다. 소리치는 것보다 더 무서운 목소리였다. 선주가 벽에 기댄 몸을 떼어내며 다가왔다.
“왕 회장님이 내 방에 마음대로 들어왔어요. 그 방에 못 들어가겠어요.”
민후가 눈가를 좁히며 쳐다보았다. 선주는 민후의 객실에 들어가기 위해 왕 회장으로부터 보호해달라는 명분을 만들었다. 물론 다 거짓이었다.
“왕 회장님이 여자 혼자 위험하다고 데려다주겠다면서 호텔까지 같이 왔어요. 그러고는 막무가내로 방에 들어왔다고요.”
민후는 선주의 말을 들으며 혼란스러웠다. 이걸 믿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사실이라 해도 자신이 돕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선주가 조금 더 다가오며 말했다.
“전무님 방에서 하루만 재워주시면 안 돼요?”
뭐? 민후는 온몸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처럼 불쾌했다. 짜증스럽다는 듯 미간을 잔뜩 구기고 말했다.
“호텔 직원에게 얘기해서 공안에 신고해달라고 해요. 중국말 잘하던데 직접 신고하든지.”
냉정하게 말하고 민후는 객실 문에 카드키를 댔다. 띠릭 잠금이 풀리고 들어가려는데 선주가 따라 들어오려는지 바짝 뒤에 붙었다.
“뭐 하는 짓입니까!”
“전무님, 저 무서워요. 저 좀 도와달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