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나도 꼴 보기 싫거든2021.12.18.
“나도 꼴 보기 싫거든요. 우리 동서.”
예지를 쳐다보는 선주의 눈에 동요가 일었다. 자신과 같은 편이라고 했던 예지의 말에 어느 정도 신뢰가 가는 것 같았다. 선주의 동요를 눈치챈 예지가 가까이 다가갔다.
“걔가 열 받아서 미치기 직전까지 가는 모습을 보고 싶어요.”
예지는 선주를 이용해 민후가 바람피우는 것처럼 꾸밀 계획이었다. 그 충격으로 은조가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가 잘못되면 일거양득이고. 하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민후의 스캔들을 만들어 차기 후계자로서 나서기 전에 이미지에 손상을 입히는 것이었다.
“우리 동서 만난 적 있다면서요. 그게 언제였어요?”
예지는 오빠에게서 스토커가 은조까지 찾아가 협박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저번 달 말이었나?”
선주가 눈동자를 올려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때 만나서 전무님 아이 임신했다고 그랬거든요.”
“그랬더니 뭐라던가요?”
“처음엔 그래서 어쩌라고, 이런 반응이더니 초음파 사진 내미니까 화가 나서 바르르 떨더라고요.”
“초음파 사진은 어디서 났어요?”
“인터넷에서 구했어요.”
“당신도 보통내기가 아니네요. 부인한테 찾아가서 그렇게 치밀한 거짓말을 하는 것 보면.”
선주가 예지를 쳐다보며 말했다.
“난 그때 내가 진짜 임신했다고 믿고 있었어요. 입덧도 했었거든요. 그런데 병원에서 상상임신이래요.”
예지는 이 여자가 점점 무서워지기 시작했지만 티는 내지 않았다.
“초음파에는 나오지 않지만 진짜 아기가 배 속에 있다고 믿었었어요.”
선주는 아련하게 허공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때는 정말 행복했었는데.”
예지는 선주가 생각보다 무섭고 간이 큰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더 이용가치가 있겠다 싶었다.
“그 덕분에 경찰에 가서 조사받고 재판도 받았죠. 그전에는 찾아가도 그냥 봐주거나 무시하거나 그랬는데 부인 한 번 찾아갔다가 이렇게 됐잖아요.”
선주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동서 그년도 대단하네. 그런 말을 왜 한마디도 안 하지? 임신한 몸으로 그런 얘기를 들었으면 엄청나게 충격이었을 텐데. 그래도 멀쩡했단 말이야?’
예지가 갑자기 고개를 갸웃하더니 물었다.
“가만, 그게 정확히 언제라고요? 우리 동서 만났다고 한 날이요.”
“지난달 마지막 주 금요일이었어요.”
‘마지막 주 금요일이면 가족들 식사하던 그날인데.’
예지는 뭔가 걸리적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날 남편의 아이를 뱄다는 여자를 만나고 와서 그렇게 태연했다고?’
예지가 선주에게 말했다.
“보여줬다던 그 초음파 사진 어디 있어요?”
그걸 다시 이용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그날 전무님 사모님이 가져갔죠.”
“가져갔다고요?”
“네. 그거 보여주면서 전무님한테 따졌겠죠? 아마 그날은 많이 싸웠을 거예요.”
예지는 가족 식사하던 날을 다시 떠올렸다.
‘그날 동서는 이 여자를 만났고, 남편의 아이를 뱄다는 충격적인 얘기를 들었고, 초음파 사진을 들고 갔다?’
예지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면서 그날의 타임라인을 정리해보았다.
‘그리고 그날 와서는 아무 얘기도 안 하고 있었는데, 가방에 있던 초음파 사진을 도우미가 발견했어!’
그리고 그날 은조의 반응이 좀 이상하긴 했었다. 예지는 은조의 임신이 너무 갑작스러웠기 때문에 아무래도 의심이 들었다. 선주를 만나고 온 후로 예지는 은조가 진짜 임신이 아닌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고개를 들었다.
“계단에서 굴렀는데도 멀쩡한 게 말이 되냐고.”
예지가 턱을 괴고 생각에 빠져 있다가 핸드폰을 들었다. 은조에게 전화를 걸었다. * 은조는 태블릿 PC를 들고 전시실을 둘러보며 체크하고 있었다. 토우를 주제로 한 새로운 전시 기획을 위해 전시할 유물 목록을 정리하고 있었다. 시대별로 목록을 만들기 위해 전시물을 보다가 신라 시대 토우 앞에서 은조의 걸음이 멈추었다. 신라 시대 토우에는 성적 표현이 과감한 것이 많은 편이었다. 남녀가 사랑을 나누는 모습을 본 따 만든 토우를 보며 은조는 어젯밤 일이 떠올랐다. 수없이 보았던 전시물이었지만 오늘은 새롭게 다가왔다. 어젯밤의 숨소리, 어젯밤의 공기, 어젯밤의 모든 것이 다 생생하게 떠올랐다.
‘집중하자, 집중.’
업무 중이기에 은조가 다시 마음을 가다듬는데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예지였다. 예지의 이름을 보자 은조는 별로 받고 싶지 않았다. 아직 그날 자신의 등을 민 그 손길이 잊히지 않았다. 정확한 증거를 확보하기 전까지 아무 얘기도 하지 말라는 민후 말을 떠올리고 은조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전시실을 벗어나 통화할 수 있는 자리로 옮겼다.
[동서, 나야.]
“네, 웬일이세요?”
은조는 딱딱하게 대꾸했다.
[동서, 병원 어디 다녀? 산부인과 말이야.]
“그건 왜요?”
[나 좀 소개해 달라고. 나 다시 시술도 해야 하는데 병원을 한번 옮겨볼까 해서. 우리 같이 다니면 좋잖아.]
은조는 조금 당황했지만 이내 거절의 뜻을 밝혔다.
“전 그냥 늘 다니던 병원 다녀요. 크지 않은 곳이에요. 형님 마음에 차지 않을 거예요.”
브랜드 따지고 규모 있는 것을 선호하는 예지가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응. 괜찮아. 큰 곳 다녀봤지만 매번 실패만 했잖아. 동서 다니는 병원 어딘데? 병원 이름이 뭐야?]
은조는 예지를 어떻게 따돌릴까 생각했다.
“거긴 시험관 시술 안 하는 곳이에요. 규모가 크지 않다고 했잖아요.”
이렇게 얘기해도 예지는 포기하지 않고 꼬치꼬치 물었다.
[그러니까 병원 이름이 뭐냐고. 시술하는지, 안 하는지는 내가 이름 들어보면 알아.]
은조는 난감했다. 왜 이렇게 집요하게 병원 이름을 알려고 드는 걸까? 혹시 자신의 임신을 의심이라도 하는지 불안했다.
“형님, 저 지금 일하는 중이라 가봐야 해요. 그만 끊을게요.”
바쁘다는 핑계로 전화를 끊었다. 은조는 꺼진 핸드폰 화면을 보며 왠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 예지는 끝내 병원 이름을 얘기하지 않고 급하게 전화를 끊은 은조가 의심스러웠다.
“왜 병원 이름을 말 못 하는 건데? 응?”
꺼진 전화기에 대고 추궁하듯 쏘아붙였다.
“뭐 켕기는 게 있어?”
고개를 든 예지가 갸웃거렸다.
“아무래도 하는 짓이 수상해!”
예지가 다시 핸드폰을 들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사모님.]
남자의 목소리였다. 이것저것 예지가 시키는 일을 해주는 사람이었다.
“배 실장. 알아볼 게 있어. 동서가 다니는 병원 좀 알아봐.”
[작은 사모님 말씀입니까?]
“그래. 뒤 좀 밟아봐.”
[예. 그리고 사모님, 강민후 전무님 아무래도 출장 가실 것 같습니다.]
“출장?”
[예, 방금 들었는데 급하게 중국 출장 스케줄이 잡혔다고 합니다.]
예지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언제 가는데? 기간은?”
[당장 가야 하는 상황이라고 들었는데 확실해지면 보고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예지가 뭔가 꿍꿍이가 있는 듯 간사하게 웃었다. 예지가 다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선주 씨? 저예요. 이예지.”
예지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선주 씨, 중국 여행 다녀올래요?”
* 민후는 난감한 얼굴로 보고서를 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전무님. 저희가 좀 잘 알아보고 진행해야 했는데.”
해외사업부 팀장이 민후 앞에서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1분기에 추진했던 중국 쪽 사업에 문제가 생겼다. 최근 국제정세변화에 따라 중국 상무부에서 외국 기업에 규제를 가하고 있다는 보고서였다. 수습을 위해서는 중국 출장이 불가피했다. 중국 쪽 공공기관 책임자를 만나야 해서 민후가 꼭 가야만 하는 실정이었다. 민후는 정말 내키지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앞뒤 가리지 않고 지금이라도 당장 출장 갈 준비를 했을 텐데.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젯밤의 뜨거운 시간이 떠오르고 이대로 떠나기가 아쉬웠다.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수습에 걸리는 시간이 문제였다. 하루 이틀에 해결된다면 가까운 거리이니 빨리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중국 상무부 사람을 만나봐야 알 것 같습니다.”
민후는 미간을 잔뜩 좁힌 채 손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책임자라는 자리가 이런 사고를 수습해야 하는 자리이기는 한데 지금은 너무 짜증이 치밀었다. 그 이유가 사적인 이유라 티를 낼 수도 없었다.
“미팅 언제로 잡을까요?”
직원의 질문에 민후는 고민했다. 평소 민후라면 오늘 저녁이라도 당장 미팅 약속을 잡으라고 했겠지만 그렇게 하기 싫었다. 오늘 가나 내일 가나 결과가 그렇게 달라질 건 아니므로.
“내일 오후에 잡아주세요. 내일 첫 비행기로 갑시다.”
급하게 출장 일정이 잡히고 민후는 핸드폰을 들었다. 아내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하는데 내키지 않았다. 이렇게 가기 싫은 출장은 처음이었다. 이번 달에 아기를 가지기로 한 계획에도 차질이 생길지도 모른다. 민후가 책상 위 탁상 달력을 보았다. 아내가 말한 임신가능기간이 어제부터 9일간이라고 했다. 일을 빨리 해결하고 이삼일 안으로 돌아와야겠다. 민후가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민후 씨.]
신호가 가자마자 아내가 바로 전화를 받았다.
“잠깐 통화돼?”
[네. 괜찮아요.]
“음…….”
민후가 전화기를 들고 한 손으로는 책상 끝 모서리를 의미 없이 문질렀다.
[왜요? 무슨 일 있어요?]
“내일 급하게 출장 계획이 잡혔어.”
[……아.]
아내의 목소리에 약간 아쉬움이 묻어났다. 이 아쉬움이 민후가 느끼는 아쉬움과 같은 감정인 건지, 임신 계획에 차질이 생겨서 그런 건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안 갈 수가 없는 출장이라.”
민후는 정말 가기 싫은데 어쩔 수 없이 간다는 말은 속으로 삼켰다.
“길지는 않을 거야. 최대한 빨리 올게.”
[……네.]
여전히 힘없는 아내 목소리에 민후는 아내도 자신처럼 아주 아쉬울까? 그래서 힘이 없나, 하는 생각을 했다.
“왜? 가지 말까?”
만약 아내가 가지 말라고 하면 무리해서라도 다른 사람을 대신 보내고 싶었다. 은조는 잠시 말이 없다가 대답했다.
[방금 안 갈 수가 없는 출장이라고 했잖아요. 가야 하면 가야죠.]
아쉬운 얼굴의 민후가 대답했다.
“지금 노력해야 하는 기간이라서 그렇지. 며칠 다녀와도 괜찮겠어?”
민후는 사실 자신이 더 안 괜찮지만 아내에게 물었다.
[어쩔 수 없죠. 일 때문에 가는 건데, 길지는 않을 거라면서요? 얼마나 걸리는데요?]
“음, 최대한 빨리 해결하고 올 생각이야. 이삼일 내로.”
[그러면 그때까진 기간이 남아 있으니 괜찮을 것 같아요.]
민후는 아내가 괜찮다고 하는 것이 조금 서운했다. ‘임신을 못 하게 될까 봐’가 아니라 지금 아내와 떨어지는 것이 싫기 때문이다. 아내는 그것은 별로 개의치 않나 보다.
[내일 출발이라고요? 그렇게 알고 있을게요.]
* 전화를 끊은 은조는 꺼진 핸드폰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조금 전까지 들떴던 마음이 갑자기 무겁게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처음으로 그와 긴 밤을 보내고 앞으로 매일 할 거라는 그의 말에 들뜨고 설렜었다. 오늘 밤도, 내일 밤도, 그다음 밤도 매일 남편과 밤을 보낸다는 생각에 가슴이 자꾸만 두근거렸었는데……. 갑작스러운 출장에 아쉬운 마음이 컸지만, 마음이 무거워진 건 그 때문이 아니었다.
‘지금 노력해야 하는 기간이라서 그렇지. 며칠 다녀와도 괜찮겠어?’
그가 했던 말을 되뇌었다. 남편은 임신이 힘들까 봐 그 걱정이 앞서는 것 같았다. 자신처럼 떨어져 지내는 것이 아쉬운 마음은 전혀 없나 보다. 남편은 예상대로 전략상 아기가 필요한 상황일 뿐인 것 같았다. 처음으로 밤을 보낸 것 따위에 자신처럼 의미를 두지는 않는 것이다. 자신만 감정적으로 남편을 대하고 있었다. 혼자만 부부생활에 진심이었던 것. 은조는 실망한 감정을 이내 추슬렀다.
‘알고 있었는데 뭘 그래.’
은조는 마음을 다잡는 듯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