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D-Day2021.12.11.
서재에서 남은 업무를 보던 민후가 책상 위 탁상 달력을 보았다. 내일 날짜에 빨간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다. 아이가 빨리 생겨야 하니 불가피하게 잠자리를 가져야 하는 순간이 왔다. 진짜 부부처럼 지내보자고 했지만 막상 잠자리까지 쉽게 이어지지는 않았다. 민후는 아내를 몰래 짝사랑하고 있었지만, 아내는 그렇지 않을 것이기에 부담을 가질 수 있다고 판단되었다. 계약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잠자리에 응할지도 모르는 그녀라서 최대한 배려해주고 싶었다. 어제는 참지 못하고 그녀의 몸을 올라탔다. 키스를 거부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너무 달려드는 바람에 겁을 먹은 것을 보았다. 민후는 짐승처럼 욕정을 못 이기고 달려든 자신을 자책했다. 어제 겁을 잔뜩 먹은 아내를 생각하며 오늘은 그녀를 안정시켜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젤리를 찾아 대는 아내의 잠버릇이 나오는 새벽에도 오늘은 반드시 인내할 것이다. 민후가 서재에서 나와 침실로 갔다. 문을 여니 이불이 불룩한 게 보였다. 이불 뒤집어쓰고 뭐 하는 건가? 아내가 귀여워 민후는 웃으며 다가갔다.
“뭐 해? 이불 뒤집어쓰고.”
아무 소리가 안 나자 민후가 이불을 걷어보았다.
“뭐 하냐고, 거기서?”
이불 속에서 혼자 핸드폰을 보고 있던 은조가 놀라 고개를 돌렸다.
“헉!”
뭐 하나 궁금했는데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엉뚱한 아내의 행동에 민후가 웃었다.
“뭘 보기에 이렇게 숨어서 보는 거야?”
핸드폰으로 시선을 옮긴 민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서서히 가셨다.
“…….”
“…….”
핸드폰 속 영상은 계속 재생 중이었고 민후는 그것을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화면 속에는 살색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앗……!>
소리를 낮추었는데도 야릇한 음향이 흘러나왔다. 은조가 놀라 핸드폰을 엎어놓으며 말했다.
“아아, 오, 오해하지 말아요. 저 처음 보는 거예요!”
당황한 목소리로 말한 그녀가 민후의 눈치를 보았다. 민후가 놀란 눈으로 가만히 쳐다만 보고 있자 은조는 서둘러 더 둘러댔다.
“진짜예요! 진짜 처음 보는 거라고요. 친구가 첫날밤 앞두고 미리 봐두면 좋을 거라고 해서…….”
말하다 말고 은조가 입을 다물고 입술을 말아 넣었다 변명하다가 안 해도 될 말까지 해버렸다. 민후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은조를 보다가 옅게 미소를 지었다. 자신만 내일 밤을 기대하고 긴장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아내도 마찬가지였다는 걸 알게 되자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아내가 계약 때문에 마지못해 응하는 거면 어쩌나 하는 부담감이 있었는데.
“괜찮아. 뭐 어때서.”
민후가 은조 옆에 누우며 말했다.
“그럼 같이 볼까? 내일을 준비하는 기분으로.”
몰래 본 것을 들킨 것이 민망할까 봐 일부러 같이 보자고 했다.
“……네?”
은조가 당황한 눈으로 쳐다보다가 얼른 핸드폰을 등 뒤로 숨겼다.
“아, 아뇨. 더 안 봐도 될 것 같아요.”
생각보다 수위가 높았기에 이걸 남편과 함께 보기는 싫었다. 같이 보면 영화에 나오는 것들을 다 해봐야만 할 것 같기도 해서 같이 안 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은조는 핸드폰을 베개 밑으로 숨기고 누웠다.
“전 그만 잘게요.”
은조는 등을 돌리고 누워 질끈 눈을 감았다. 민후도 그 옆에 바로 누웠다. 적막이 흐르고 민후가 고개를 돌려 은조를 보았다. 며칠 팔베개하고 자신의 허리를 끌어안고 잤는데 오늘은 등을 돌리고 누웠다. 방금 몰래 영상 보던 것을 들켜 민망해서 그런 것 같았다.
“팔베개해줄까?”
“아뇨. 괜찮아요.”
“아무것도 안 안고 자도 괜찮아? 안고 자야 잠이 온다며.”
“오늘은 그냥 자볼게요.”
은조는 방금 야한 영화를 봐서 그런지 남편의 몸을 끌어안기가 더 민망했다. 며칠간 아내를 꼭 껴안고 자다가 안지 않으니 민후가 오히려 허전했다. 민후가 은조를 향해 몸을 돌려 누웠다. 남편이 자신을 향해 누우니 은조는 긴장했지만, 티는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대신 내가 안아도 될까?”
의외의 말에 은조가 고개를 틀어 쳐다보았다. 민후가 더 가까이 다가와 은조에게 팔을 둘렀다. 한쪽 팔로 은조의 몸을 뒤에서 가볍게 안고 그가 말했다.
“나도 안고 자는 게 익숙해졌나 봐.”
그가 뒤에서 안고 있으니 귓가에 그의 낮은 음성이 들렸다.
“이제 내가 안고 자는 버릇 생기겠는걸.”
귓바퀴를 간질이는 그의 호흡 때문에 이상한 감각이 목 뒤부터 척추를 타고 흘렀다.
“아내를 안아야 잠이 드는 버릇이 생기겠어.”
은조는 심장이 쿵쿵 뛰었다. 자신을 안아야 잠이 드는 버릇이 생길 것 같다는 말에 얼굴이 홧홧하고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적막한 탓에 제 심장 소리가 밖으로 들릴 것만 같아 불안했다. 왜 그런 말을 해요. 그러면 내가 오해하잖아요. 은조는 민후가 한 말이 어떤 의미인지 궁금했다.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민후는 은조를 팔로 안고 있다가 말했다.
“어제는 내가 좀 과했지? 놀라게 해서 미안.”
“아니에요. 제가 경험이 없어서…….”
“…….”
민후는 말없이 호흡만 내뱉다가 말했다.
“내일은 천천히, 조심히 할게.”
경험이 없다는 말에 민후는 그녀가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배려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영상을 미리 본 것도 이해가 갔다. 아내가 귀여워 피식 웃음이 났다. 민후가 은조를 안은 팔에 더 힘을 주었다. . . . 아침에 눈을 뜬 민후가 마주한 건 자신을 안고 잠든 아내였다. 밤에 어떤 자세로 자도 아침에 눈을 뜨면 항상 은조가 민후를 안고 있었다. 안을 게 없으면 잠을 못 잔다는 아내의 잠버릇이 어떻게 생각하면 고마웠다. 만약 싸우고 잠이 들어도 아침에 눈을 뜨면 이렇게 안고 있을 것 아닌가? 그러고 보니 남들 다 하는 부부싸움이란 것도 해본 적이 없었다. 거의 남처럼 지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건데 그런 소소한 일상들도 경험해보고 싶은 욕심이 났다. 민후는 잠든 아내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반듯한 콧대와 하얀 얼굴에 내려앉은 풍성한 속눈썹. 붉고 도톰한 입술. 어디 하나 사랑스럽지 않은 곳이 없었다. 어제 몰래 영상을 보다가 들켜 당황해하던 귀여운 얼굴이 생각났다. 첫날밤을 위해서 그녀도 준비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반가웠다. 오늘 밤 부담스럽지 않게 그날을 맞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마침내 D-Day. 출근한 민후는 사무실 책상 위에 있는 전자달력에 시선이 갔다. 자동으로 바뀌는 전자달력이라 오늘 날짜가 숫자로 찍혀 있었다. 하도 신경을 썼던 날짜라 그런지 오늘이 그날이라는 생각에 갑자기 몸에 긴장감이 들었다. 비서실장이 늘 그렇듯이 오늘의 일정을 알렸다.
“잠시 후 9시 반에 해외 영업팀과 회의가 있고 오후에는 부사장님 면담 외에는 특별한 일정 없습니다. 오늘은 일정 최대한 잡지 말라고 하셔서 내일이나 모레로 다 미루었습니다.”
“네. 수고했습니다.”
민후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비서실장이 태블릿 PC를 닫으며 말했다.
“그런데 오늘 무슨 날입니까?”
며칠 전에 민후가 오늘 날짜에는 일정을 잡지 말라고 부탁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 전 며칠 동안도 술 약속을 잡지 말라고도 지시했다. 비서실장은 자신이 모르는 중요한 일정이 있나 싶어서 물었다.
“중요한 약속이 있으신 겁니까?”
민후가 서류를 보면서 대답했다.
“아주 중요한 약속이죠.”
“제가 동행하지 않아도 되는 겁니까?”
민후가 고개를 들어 비서를 쳐다보았다. 동행이라니. 큰일 날 소리.
“아내와의 약속입니다. 집으로 가는 거예요.”
“아. 그러시군요.”
비서가 머쓱해 뒷목을 긁적이며 말했다.
“사모님 생일이나 결혼기념일, 그런 중요한 날인가 봅니다.”
“지금은 더 중요하죠.”
“……아, 예.”
비서실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보다 더 중요한 날이 뭐지?’
민후는 달력으로 오늘 날짜를 다시 한번 보며 피식 웃었다. D-Day. 중요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 종일 신경 쓰이고 긴장한 것은 은조도 마찬가지였다. 퇴근 후 집으로 가자 도우미가 저녁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여사님. 민후 씨 오면 제가 상 차릴 테니 일찍 퇴근하세요.”
“아, 네. 사모님.”
“뒷정리도 제가 할게요. 들어가 보세요.”
“네, 그럼 맛있게 드세요.”
남편이 오면 단둘이 있으려고 도우미도 일찍 퇴근시켰다. 민후도 평소보다 조금 더 일찍 퇴근해 집에 왔다. 띠띠띠띠 삐리릭. 현관문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가 나자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민후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다.
“일찍 퇴근했네요.”
“응.”
대답하고 서로 잠깐 마주친 눈빛에 서로가 쑥스러웠다. 일찍 퇴근한 이유를 두 사람 다 너무나 잘 알기에.
“여사님이 밀푀유나베를 만들어주고 가셨어요. 너무 먹음직스럽던데요. 저녁상 차릴게요. 씻고 오세요”
쑥스러움을 숨기려니 오늘따라 말도 많아졌다. 은조는 민후가 씻을 동안 식사 준비를 했다. 상차림이 거의 다 되어갈 때쯤 민후가 욕실에서 나왔다. 편안한 옷차림으로 갈아입은 민후가 식탁에 앉았다. 마주 앉아 식사하는데 평소보다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둘 다 오늘이 그날인 것을 의식하고 있으니 긴장되는 건 당연했다. 은조는 밥알도 목구멍으로 잘 넘어가지 않았다.
“오늘 하루 어땠어?”
어색함을 타파하려 민후가 물었다.
“음. 그냥 뭐…… 특별한 일은 없었어요.”
“특별전은 준비 잘되고?”
“네.”
영양가 없는 대화가 몇 번 오갔지만 은조의 긴장감은 도무지 풀어지지 않았다. 은조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방 수납장을 열고 보관 중이던 와인병을 꺼내왔다. 밥 먹다 말고 일어난 은조를 눈으로 좇던 민후가 말했다.
“와인 마시려고?”
“네.”
은조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 와인잔도 두 개를 가져왔다.
“아무래도 너무 긴장되어서요. 좀 마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민후가 은조를 보다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도 긴장하기는 했지만 아내의 행동이 너무 귀여웠다.
“난 일부러 며칠 동안 술 안 마셨는데. 심신을 정갈하게 하려고.”
민후는 몸속에 알코올 성분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로 아기를 만들고 싶었다. 그가 오늘을 위해서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은조는 조금 놀랐다.
“그럼 저만 조금 마실게요. 전 좀 마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민후가 웃으며 와인병을 손으로 잡았다.
“그래. 마시고 싶으면 마셔.”
와인오프너로 능숙하게 와인 뚜껑을 딴 민후가 투명한 잔에 와인을 따랐다.
“전에 보니 조금만 마셔도 취하던데 조금만 마셔.”
민후는 와인잔 바닥에 조금 찰 정도로만 따랐다. 은조가 잔을 들고 입가로 가져가자 붉은 와인이 입안으로 흘러들어왔다. 은조를 보는 민후의 얼굴에 자상한 미소가 번졌다.
“많이 긴장돼?”
잔을 내려놓은 은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실 며칠 전부터 떨렸어요.”
민후가 눈을 휘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리고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밀리는 소리에 은조가 고개를 들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민후가 다가와 식탁과 은조가 앉은 의자 등받이를 양팔로 잡고 섰다. 그리고 은조를 보며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사실은 나도 그랬어.”
은조는 떨리는 눈으로 민후를 올려다보았다. 민후는 상체를 반쯤 숙인 채로 은조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술 마셨으니 긴장이 좀 풀렸나?”
마신 지 몇 분이나 되었다고? 은조의 대답이 채 나오기도 전에 민후가 은조에게 입술을 겹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