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그냥 한번 안아주고 싶어2021.11.30.
민후와의 전화를 끊고 윤 회장은 짜증스럽다는 듯 혀를 찼다.
“두 시간도 안 되었는데 왜 이렇게 안달이야?”
애도 아니고 성인이 두어 시간 연락 안 된 것 가지고 자신한테까지 전화한 것 보면 은조를 계약관계로만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확인한 것 같아 짜증이 났다. 윤 회장은 이 결혼이 이런 방향으로 전개되길 바라지 않았다.
“얘는 왜 이렇게 안 나와?”
은조가 한참이 지나도 화장실에서 나오지 않자 윤 회장이 화장실로 갔다. 화장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화장실 칸마다 문을 활짝 열어 확인한 윤 회장이 사나운 얼굴을 홱 돌렸다.
“이게 도망을 가?”
. . . 그 시각, 만삭 임신부 뒤에 몸을 숨기고 몰래 화장실을 빠져나온 은조는 병원 후문 쪽에서 민후를 만났다. 민후가 은조를 발견하자마자 뛰어왔다.
“은조야!”
얼마나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는지, 단정했던 그의 머리카락이 조금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심각한 얼굴로 다가와 은조의 어깨를 잡더니 물었다.
“괜찮아? 어디 다친 데는 없어?”
“네. 괜…….”
대답도 채 하기 전에 몸이 확 딸려갔다. 민후가 은조를 와락 껴안았다. 키 차이 때문에 은조의 얼굴이 그의 가슴에 폭 묻혀버렸다. 은조는 민후의 반응에 다소 놀랐다. 민후가 은조를 다시 보며 어깨와 팔을 연신 만지며 물었다.
“진짜 괜찮은 거야?”
은조는 민후를 보자 그제야 안도가 되었는지 다리에 힘이 풀렸다. 힘이 풀려 풀썩 주저앉으려던 것을 민후가 붙잡았다.
“어지러워? 어디가 불편한지 말해. 여기 병원이야.”
여차하면 입원이라도 시킬 얼굴로 물었다.
“아니, 괜찮아요. 긴장이 풀려서……. 얼른 가요.”
은조가 불안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며 재촉했다. 주차장으로 가 은조를 차에 태운 민후가 말했다.
“차 문 잠그고 잠깐만 있어.”
민후는 어느 때보다 심각한 표정이었다.
“금방 올게. 윤 회장님 지금 어디 있어?”
“할머니 만나려고요?”
은조가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대로 그냥 넘어갈 수 없어.”
아이를 지우라고 강제로 데려왔다는 말에 민후는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어떻게 제 핏줄인 손녀에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을까?
“안심해. 문 잠그고 있으면 돼. 밖에서 잘 보이지도 않아.”
민후는 다시 병원으로 들어갔다. 5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타려는데 마침 윤 회장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 있었다. 은조를 찾으러 내려온 것이었다. 윤 회장과 마주치자 민후의 얼굴이 무섭게 굳었다. 노려보는 민후의 눈빛이 섬뜩할 정도였다. 윤 회장이 흠칫 놀라 민후를 보았다. 조금 전 통화한 게 10분도 안 된 것 같은데 어째서 여기 있느냐는 얼굴이었다.
“윤 회장님. 이게 무슨 짓입니까!”
냉기가 뚝뚝 흐르는 냉소적인 어조에 윤 회장이 표정을 굳혔다. 보아하니 은조를 이미 만났고 제가 억지로 끌고 왔다는 내용도 다 알고 있는 눈치다.
“대체 뭐가 말인가? 애초 계약 위반한 사람이 누군데!”
윤 회장도 지지 않고 매서운 눈으로 민후를 응시했다.
“저랑 조용히 얘기 좀 하시죠.”
“그러지.”
윤 회장은 자신이 앞장서서 또각또각 걸어갔다. 70대 노년이지만 등 하나 굽지 않은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걸었다. 한적한 구석진 창가로 간 윤 회장이 뒤돌아 팔짱을 끼고 오만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왜, 뭐가 불만이라 그렇게 똥 씹은 얼굴이야?”
“누구 마음대로 애를 지우라고 하는 겁니까!”
한적한 병원 복도에 민후의 목소리가 포효하듯 울렸다. 하지만 윤 회장의 포스도 만만치 않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민후의 시선을 받아냈다.
“계약에도 없던 임신을 시켜놓고 적반하장으로 누구한테 화를 내는 건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노려보던 민후가 성큼 다가갔다.
“계약한 기간 동안은 우린 법적으로 부부입니다. 누구도 부부의 일에 관여할 자격 없습니다.”
윤 회장이 입꼬리를 슬쩍 끌어당기고 말했다.
“자격? 애초 이 결혼 계약을 제안한 사람은 나야. 내 손녀를 강 전무에게 보낸 사람은 나라고! 걔는 내 계획대로 움직여야 해!”
민후의 눈동자가 사납게 일렁였다. 그동안 아내가 얼마나 정신적인 학대를 겪으면서 살아왔을지 짐작이 되기에 분노가 차올랐다. 피가 섞인 손녀를 물건 팔아넘기듯 강제로 결혼시키고 임신했다는 말에 강제로 유산까지 시키려는 윤 회장의 민낯이 충격적이었다. 민후가 흥분을 가라앉히려고 깊게 호흡했다.
“일을 진행하다 보면 변수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에 따라 계약서를 수정하기도 하죠.”
차분해진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 계약서, 수정 좀 하시죠.”
“수정?”
뭘 어떻게 수정할 거냐는 듯 윤 회장이 오만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3년 계약 기간이 끝나고 이혼한다는 조건, 수정했으면 합니다. 이혼 문제는 아내와 제가 결정할 겁니다. 물론 아이도 낳을 거고.”
윤 회장의 얼굴에 동요가 일어났다.
‘이혼하기 싫어요. 민후 씨를 좋아해요.’
은조가 울면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뭐야, 지금 둘 다 이혼을 원하지 않는 거야?’
윤 회장이 다시 민후를 응시하며 물었다.
“왜, 이혼하지 않으려는 건가?”
민후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윤 회장을 바라보았다. 윤 회장 앞에서 아내를 좋아하게 되었다고, 그래서 이혼을 원치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과연 도움이 될까, 고민했다. 이런 자신의 마음이 윤 회장에게 오히려 약점으로 잡히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가 되었다. 아내를 좋아한다고 해도 그걸 어여삐 여기며 이혼 안 시키겠다고 말할 윤 회장이 아니란 것은 이미 간파했기 때문이다. 윤 회장에게는 이 결혼이 이익을 창출하는 비즈니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민후는 짧은 시간 계산기를 두드려보듯 생각했다.
“곧 차기 경영후계자 선정이 있을 건데, 이혼이 제 커리어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것으로 예상합니다. 이혼했다는 기사가 나 여기저기 가십거리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려서 좋을 건 없죠.”
민후는 차기 경영권을 쥐기 위한 전략의 일환이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아이도 낳고 단란하게 사는 모습을 보이는 게 유리할 거라 판단됩니다.”
윤 회장은 그럼 그렇지, 하고 코웃음을 쳤다.
‘은조 그것이 누군가의 사랑을 받는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안 되네. 3년이 지나면 합의 이혼하기로 한 계약조항은 지켜주길 바라네.”
민후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대체 이혼을 고집하는 이유가 뭡니까? 손녀를 이혼녀로 만들려는 이유가.”
아내의 말대로 또 다른 계획에 아내를 이용할 생각인 건가?
“다른 조건이 맞는 곳에 재혼시킬 생각이에요? 사업이익이 생기면 또 손녀를 물건 넘기듯이 팔아치울 겁니까?”
윤 회장이 매서운 눈을 치켜떴다.
“말조심해. 팔아치우다니! 내가 억지로 결혼시킨 것 같잖아. 은조도 결혼하길 원했어.”
“회장님에게서 벗어나고 싶었으니까요!”
민후가 목소리를 높였다.
“아내는 결혼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라 회장님을 벗어나고 싶어서 결혼한 겁니다. 그만 손녀에게 간섭과 강요를 중단하세요.”
“뭐?”
“은조, 독립적인 인격체입니다. 성인이고 혼자 삶을 계획하고 혼자 살아갈 수 있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자신이 결정할 수 있도록 아내를 놓아주세요.”
자신에게서 벗어나고자 결혼했다는 말에 윤 회장은 어이가 없었다.
‘허, 그것이 잔머리를 굴렸어?’
“아이도 낳기를 원하니 그냥 놔두세요.”
윤 회장은 민후가 원하는 것이 있으니 이것을 이용해볼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민후를 가만히 응시하던 윤 회장이 입을 열었다.
“좋아. 이왕 생긴 아이니까 아이는 낳아도 된다는 조항을 계약서에 추가하지.”
윤 회장이 턱을 치켜들고 말했다.
“대신 조건이 있어.”
민후가 미간에 힘을 주고 윤 회장을 보았다. 이것 봐라. 윤 회장은 손녀의 임신조차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
“조건이 뭡니까.”
윤 회장은 이 기회에 한주 그룹에 투자를 받을까 하며 머릿속 계산기를 두드렸다.
“임신과 출산이 여자에게 얼마나 힘든 과정인지는 알지?”
윤 회장이 턱을 치켜든 채 말을 이었다.
“남자야 한 번 지르면 그만이지만 열 달 동안 몸 무겁게 품었다가 죽을지도 모르는 고통 속에 애를 낳고, 또 육아는 얼마나 사람을 지치게 하는지…….”
민후는 마치 손녀를 진짜 걱정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하는 윤 회장이 가증스러웠다.
“한주 그룹이 이번 우리 신사업에 10억 정도 투자했으면 하는데.”
10억이라는 숫자에 민후가 잇새로 헛바람을 흘렸다. 아내를 끝까지 이용하려는 윤 회장의 계략에 분노가 치밀었다. 민후와 윤 회장이 서로 대치하듯 노려보았다.
* 민후는 은조를 태우고 집으로 왔다. 많이 놀랐을 아내가 걱정되어 운전하는 틈틈이 아내를 살폈다.
“괜찮아? 어디 불편하면 바로 얘기해.”
“괜찮아요.”
은조는 짧게 대답하고 계속 창밖만 바라보았다. 정신없던 일이 지나고 나니 오늘 할머니에게서 들었던 말이 잊히지 않았다.
‘며칠 전에 강 전무랑 통화했어. 강 전무도 계약 끝나면 이혼한다고 했어. 더 결혼생활 이어갈 생각이 없는 사람이야.’
‘사업가인 강 전무가 그런 계약조항 무시하고 애를 낳았다는 이유로 이혼 안 할 것 같아?’
‘사업이익을 위해 필요해 결혼한 것이지, 애 낳고 살 생각이 없다 이 말이야! 알겠니? 이 맹추야!’
아이를 낳기로 한 이유에는 혹시 아이가 생기면 이혼은 없던 거로 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도 있었다. 그가 계약했던 대로 기간이 지나면 이혼하기를 원한다면 은조도 그 희망을 고이 접는 것이 나을 것이다. 고개를 돌려 운전하는 민후를 보았다. 당신은 정말 경영권을 차지하고 싶어서 아이가 필요한 건가요? 단지 그 이유인가요? 아까 병원에서 보자마자 날 껴안았던 건 뭔가요? 진짜 걱정을 많이 한 사람처럼 달려와 안았잖아요. 그건 왜 그런 거예요? 은조가 쳐다보고 있자 고개를 돌린 민후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 얼굴이 무척 다정해 은조도 같이 미소를 보였다. 그렇게 다정하게 웃어 주면 제가 착각한다고요. . . . 민후는 오늘 일을 겪고 나서 무슨 일이 있어도 은조를 윤 회장으로부터 보호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윤 회장이 저 정도로 악한 사람인 줄은 몰랐다. 아이를 강제로 지우라고 하더니 낳으려면 투자금을 내어놓으라 했다. 윤 회장에게 철저하게 이익 목적으로 이용당하고 있는 아내가 너무나 안쓰러웠다. 고개를 돌려 아내를 보았다. 그녀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내가 가여워 심장이 따끔거렸다. 민후가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아내도 웃는다. 아내가 이혼을 원해 헤어지게 되더라도 끝까지 지켜줘야겠다. 그동안 실체를 모르고 남처럼 지냈던 시간이 후회되었다. 자세히 알았더라면 좀 더 따뜻하게 그녀를 대했을 텐데. . . . 집에 도착해 아내가 신발 벗는 것을 도와준 민후가 은조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은조야.”
은조가 시선을 들어 민후를 보았다. 민후가 팔을 벌려 가만히 은조를 안았다. 은조의 머릿속에는 물음표만 떴다. 아까 병원에서도 안더니 오늘 남편이 좀 이상했다.
“……미, 민후 씨?”
민후가 은조의 머리와 등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냥 한번 안아주고 싶었어.”
민후는 윤 회장에게 당하고 살아왔을 아내가 가엾고 안쓰러워 마음이 아팠다.
“오늘 너무 놀랐지?”
은조는 민후의 품과 그의 손길이 너무 다정하고 따뜻해 스르르 눈을 감았다. 안락하고 포근했다. 어떤 위험도 다 차단될 것 같은 보호막 같았다. 남편과 헤어지지 않고 계속 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