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아내가 사라졌다2021.11.27.
은조는 상체를 앞으로 기울여 기사에게 말했다.
“기사님. 세워주세요. 제발이요.”
“얌전히 있어!”
윤 회장이 은조의 어깨를 잡아서 눌러 앉혔다.
“할머니.”
두려운 눈으로 윤 회장을 보았다. 근무 중에 잠깐 불러내서 이렇게 납치하듯 데려가는 경우가 어디 있나. 절대 할머니와 병원에 가서는 안 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은조가 핸드폰을 들었다. 도움을 청할 곳은 남편 민후밖에 없었다.
“이리 내!”
윤 회장이 은조의 핸드폰을 가로채 뺏었다.
“아! 안 돼요. 줘요. 할머니.”
핸드폰은 윤 회장의 핸드백으로 들어갔다. 윤 회장은 얼음처럼 차가운 얼굴로 은조를 노려보았다. 은조가 어깨를 흠칫 떨었다. 저 눈빛, 시퍼렇게 날이 선 듯한 저 눈을 보면 오금이 저렸다.
어렸을 때 할머니의 정신적인 지배에 길든 은조는 할머니의 저 눈빛을 마주하면 아무 저항도 할 수가 없었다. 성인이 되고는 나아지기는 했지만, 트라우마처럼 남아 이렇게 가끔 등골이 서늘할 때가 있다. 은조는 얼른 시선을 돌렸다. 두려운 얼굴로 멀어지는 직장을 돌아보았다.
‘병원에 가면 다 들킬 텐데.’
*
“먼저 퇴근합니다. 일찍들 들어가세요.”
민후가 퇴근 준비를 하고 사무실을 나오며 말했다.
“네. 들어가십시오, 전무님.”
비서실장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요즘 매일 퇴근이 이르시네. 기분도 좋아 보이시고.”
비서실장이 돌아서며 혼잣말하고는 웃었다. 임원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는 민후는 핸드폰으로 열심히 문자를 쳤다.
[지금 출발해. 정시 퇴근이지?]
은조 다리가 아직 낫지 않아 퇴근 후 데리러 갈 참이었다. 하지만 메시지도 읽지 않고 답이 없었다.
‘바쁜가?’
주차장에 도착해 차에 타서도 답이 없자 민후는 회의라도 하나 보다 생각했다. 퇴근이 늦어지면 가서 기다릴 생각으로 민후는 박물관으로 향했다. 운전 중에도 핸드폰을 몇 번 확인했지만 여전히 메시지도 읽지 않았다. 바빠도 항상 메시지는 바로 확인하고 답을 주던 아내여서 민후는 이상하게 여겼다. 박물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은조에게 전화를 걸었다. 길게 신호음이 갈 뿐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귀에서 전화기를 떼어내는 민후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아무래도 이상했다. 이렇게까지 오래 연락을 안 받은 경우가 없었다. 손가락으로 탁탁탁 핸들을 치다가 민후가 차에서 내렸다. 도무지 그냥 앉아서 기다릴 수가 없었다. 사무실까지 들어가지는 못하더라도 박물관 내부에 가서 동태라도 살펴야 할 것 같았다. 박물관 내부에 무슨 비상이라도 걸릴 만한 문제가 있는지.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 층별 안내도 앞에 섰다. 사무실이 어느 층에 있나 알아볼 목적이었는데 1층에 커피숍이 눈에 띄었다.
‘아, 커피숍.’
박물관 내에 있는 커피숍 사장이 제일 친한 친구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민후는 곧장 커피숍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담한 사이즈의 커피숍에는 장시간의 관람으로 아픈 다리를 쉬어가려는 손님이 두어 팀 앉아 있었다.
“어서 오세요. 주문 도와드릴까요?”
주문대에서 시은이 상냥하게 말했다. 민후는 지금 주문대에 있는 사람이 아내의 친구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 혹시……. 시은은 키가 훤칠하게 크고 멋지게 생긴 민후를 보면서 생각했다.
‘어디선가 본듯한데. 어디서 봤더라? 연예인인가?’
“한은조 씨 잘 아십니까?”
시은은 그제야 민후를 어디서 보았는지 생각났다. 얼마 전 둘이 돌담길 걷는 모습을 보았다.
“아! 은조 남편이시죠?”
민후가 안도하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 맞습니다. 친구분이 여기서 근무한다고 들었습니다. 반갑습니다. 강민후라고 합니다.”
민후가 정중하게 인사하자 시은이 웃으며 대답했다.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안 그래도 한번 뵙고 싶었는데.”
시은은 무척 밝은 성격이었다.
“은조 데리러 오셨나 봐요. 요즘 매일 데리러 오신다고 들었어요.”
“네. 그런데 아내가 연락이 안 되어서요. 혹시 여기 사무실이 어디에 있습니까?”
시은이 핸드폰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저도 지금 연락이 안 되어서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아까 밖에 나가는 것 봤거든요. 아직 안 들어온 것 같은데.”
“밖에 나가요?”
“아까 오후에 절뚝거리면서 나가기에 어디 가냐 했더니 누구 잠깐 만나러 간다고 나갔거든요.?”
민후의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누구를 만나러 갔는데 연락이 안 된다?
“누구 만났는지 혹시 아십니까?”
“아뇨. 그건 못 물어봤어요. 잠깐 나갔다 오는 모양새여서 금방 오겠거니 했는데.”
시은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어떻게 된 거지? 왜 연락이 안 되지?”
민후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대체 누구를 만나러 나갔는데 연락이 끊긴 거지? 불안감에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 연락이 안 될 때만 해도 단순한 의아함이었는데 누구를 만나러 나간 후 연락이 안 된다는 말에 민후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다시 핸드폰을 들어 전화를 해보았지만 전화는 받지 않았다. 대체 왜 연락이 안 되는 거야! 손으로 앞머리를 거칠게 몇 번 넘겼다. 핸드폰을 들고 이리저리 의미 없는 걸음을 왔다 갔다 했다. 웬만해서는 평정심을 잘 잃지 않는 민후가 불안감을 이기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 병원에 도착해서는 윤 회장은 기사를 시켜 휠체어를 가져오라 일렀다. 은조가 순순히 따라가지는 않을 것이고 깁스한 발 때문에 걸음도 느릴 것이기 때문이다. 기사가 휠체어를 가져오자 은조를 억지로 앉혔다. 은조는 의사를 만나게 되면 가짜 임신임이 들통나는 건 시간문제라 생각했다. 심지어 지금 생리 중이라 검사도 하기 전에 이미 탄로 날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은조는 할머니에게 사실대로 말해야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할머니는 아이를 낳지 않기를 원하니 진짜 임신이 아니라고 하면 안심하게 될 테니. 그러고 나서 민후와 아이를 갖기로 한 협의는 몰래 진행하면 될 것이다.
“할머니, 저랑 얘기 좀 해요. 할 얘기가 있어요.”
“조용히 해. 일단 양 박사님 먼저 만나.”
윤 회장은 은조의 말을 단칼에 잘라버렸다.
“중요한 얘기예요.”
“가만히 있어! 수작 부리는 거 누가 모를 줄 알아?”
윤 회장은 은조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휠체어에 앉혀 어깨를 꾹 눌렀다.
“저 안 도망가요. 할머니 말대로 할 테니 이거 좀 놓으세요.”
윤 회장이 고개를 돌려 은조를 보았다. 은조는 할머니를 안심시키는 것이 우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 말대로 할게요.”
은조를 보는 윤 회장의 입가에 웃음기가 살짝 걸렸다.
“이제야 말을 듣는구나.”
네가 반항해봤자지. 어디서 기어올라, 기어오르길. 윤 회장은 은조가 다시 통제 가능하다고 판단되어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은조가 제가 말한 대로, 생각한 대로 움직여야 마음이 평온해졌다. 윤 회장이 데스크의 간호사에게 다가갔다.
“양 박사님 계시죠? ”
“지금 수술 중이신데요.”
윤 회장이 미간을 찌푸리며 간호사를 째려보았다. 내가 누군 줄 알고 감히 날 기다리게 해?
“윤혜란이 왔다고 전해줘요.”
“아, 박사님께 말씀은 들었어요. 오시면 우선 피검사와 소변검사부터 하라고 하셨어요.”
간호사가 종이컵을 내밀었다. 윤 회장이 못마땅한 얼굴로 간호사를 보았다.
“검사는 무슨 검사! 양 박사님하고 얘기 끝났어요. 바로 수술하기로 했다고! 양 박사님께 연락해요.”
VIP인 자신을 몰라보고 일반 손님 취급하는 것부터 마음에 안 들었는데 소변 받는 컵을 내미는 멍청한 간호사가 기분 나빴다.
“긴급수술이 잡혀서요. 곧 오실 겁니다. 그리고 수술 중에 혹시 다른 감염이나 문제가 생길 수도 있어서 기본 검사는 필수입니다.”
윤 회장은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으로 종이컵을 받았다.
“소변검사부터 하래. 가자.”
윤 회장이 은조에게 다가가 말했다.
“혼자 갈게요.”
은조가 종이컵을 받아 일어나자 윤 회장이 내심 불안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할머니 공중화장실 싫어하시잖아요.”
결벽증에 가깝게 청결에 집착적인 윤 회장은 여러 사람이 사용하는 공중화장실을 사용하지 못했다. 그곳에 가면 득실득실한 세균이 온몸에 붙을 것만 같아 들어가는 것도 꺼렸다.
“허튼짓할 생각하지 마.”
윤 회장이 경고하며 대기 의자에 앉았다. 은조는 깁스한 발을 절뚝이며 화장실로 향했다. 종이컵을 들고 화장실로 가면서 뒤를 힐끔 보니 할머니는 이제 안심한 듯이 은조를 감시하지는 않았다. 은조는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했다. 화장실로 일단 들어와 어떻게 할머니 눈을 피해 도망갈까 궁리했다. 영화 본 것이 생각나 화장실 창문을 보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영화주인공처럼 저런 곳을 빠져나갈 리가 없다. 게다가 여기는 5층이었다. 그때 화장실에 만삭의 임신부가 들어왔다. 볼일을 보러 들어가는 임신부에게 은조가 말했다.
“죄송하지만 저 한 번만 도와주시겠어요?”
은조는 강제로 병원에 끌려왔다고 간략하게 설명했다.
“어머! 세상에. 제가 도와드릴게요. 어떻게 도와드리면 돼요?”
은조는 임산부에게 핸드폰을 빌려 우선 민후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뚜뚜.]
하필 통화 중이었다. 은조는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며 전화를 끊었다가 다시 전화를 걸었다.
[뚜뚜뚜.]
여전히 그는 통화 중이었다. 바쁜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은 그가 바쁜 사람인 것이 원망스러웠다. * 민후는 갑자기 사라진 은조에게 분명 무슨 일이 있다고 예감했다. 경찰에 실종 신고를 할까, 사람을 시켜 찾을까 온갖 생각을 하다가 윤 회장을 떠올렸다. 혹시 윤 회장을 만나러 갔던 걸까? 민후가 핸드폰을 들어 윤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길게 이어진 신호음 끝에 윤 회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음, 강 전무. 미안하지만 내가 지금 좀 바빠서 길게 통화 못 하니까…….]
“하나만 여쭙겠습니다.”
다급하면서도 단호한 말투였다.
[뭔가?]
“오늘 제 아내 만났습니까?”
[아니. 안 만났는데.]
“정말 안 만났습니까?”
. . .
“안 만났다니까 그러네.”
병원 대기 의자에 앉아 민후의 전화를 받은 윤 회장이 화장실 쪽으로 눈길을 주며 태연하게 거짓말했다.
“그런데 그건 왜 물어?”
긴 한숨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민후가 침통하게 말했다.
[아내가 연락이 안 됩니다.]
윤 회장이 핸드백에서 은조의 핸드폰을 꺼내 슬쩍 보았다. 부재중 전화가 30통이 넘게 와 있었다.
“애도 아니고 다 큰 성인인데 뭘 걱정해?”
[이렇게 연락 끊긴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연락 올 때 되면 오겠지. 몇 시간이나 됐다고. 바빠서 그만 끊네.”
. . . 전화가 끊어지고 민후의 눈이 커졌다.
‘몇 시간이나 됐다고.’
윤 회장의 말에 민후는 아내가 윤 회장과 함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민후는 아내가 연락 끊긴 기간이 얼마나 되었는지 얘기한 적이 없었다. 종일 연락이 안 되었는지, 단 몇 시간 동안 안 되었는지 얘기도 하지 않았는데 저렇게 말하는 윤 회장을 의심 안 할 수 없었다. Rrrrrr. 핸드폰에 모르는 번호가 떴다. 지금 정신이 없는데 수신 거부할까 생각했다가 혹시나 해서 전화를 받았다.
“네, 강민후입니다.”
[여보세요? 민후 씨!]
다급하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아내 은조였다.
“은조야! 지금 어디야?”
놀란 얼굴로 민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