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질투의 화신2021.11.20.
민후는 출근하면서 젊은 관장의 팔을 잡고 걸어가던 아내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젊은데 능력이 엄청나죠? 게다가 훈남이시기까지 해요.’
‘이왕이면 잘생기면 좋죠. 괜히 업무 효율이 올라가는 느낌?’
지난번 젊은 관장을 두고 아내가 칭찬하던 말을 떠올렸다. 같은 공간에서 일하는 젊은 직장상사. 왠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냥 직장상사일 뿐이겠지만 아내가 상사의 팔을 잡고 걷는 모습을 보고 난 후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사무실에 출근하고 비서실장의 일정 보고를 들으면서도 민후의 미간은 찌푸려진 채 펴지지 않았다. 일정 보고를 하던 비서실장이 책상 밑을 내려다보았다. 책상 밑에서 민후가 다리를 달달 떨고 있었다. 수년간 민후를 봐왔지만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뭔가 불안해 보이는 모습에 비서실장이 물었다.
“전무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음? 왜요?”
“초조해 보이셔서요.”
민후는 손으로 머리를 넘기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아닙니다. 나가봐요.”
이렇게 이유 모를 불안감이 질투에서 나오는지도 모른 채 민후는 초조한 감정을 삼켰다. * 은조는 친구가 운영하는 박물관 내 커피숍에 내려왔다. 친구 시은이 깁스한 채로 절뚝이며 걷는 은조를 보고 말했다.
“그렇게 걸어 다녀도 돼? 나한테 전화하지. 그럼 내가 업고 왔지.”
“조금씩 걷는 건 괜찮아.”
은조가 주문대에 서서 물었다.
“커피 배달되지?”
“배달? 여기가 중국집인 줄 알아?”
시은이 장난스레 톡 쏘았다.
“어디로 배달시킬 건지 알면 말이 달라질걸?”
은조가 턱을 들고 장난스럽게 말하자 시은이 물었다.
“어디로 배달하는데?”
은조가 웃는 얼굴을 들이밀며 작게 말했다.
“관장실.”
“헉! 진짜?”
시은은 새로 온 관장을 짝사랑하고 있었다.
‘야야, 새로 오신 관장님 완전 잘생겼더라. 혹시 결혼했대?’
처음 부임한 날부터 시은은 관장에게 관심을 보였다.
‘결혼했는지는 모르겠는데? 내가 한번 알아봐 줘?’
가끔 커피를 사러 오기도 하는데, 그때마다 시은은 얼굴이 시뻘게진 채로 커피를 내렸다.
‘관장님 미혼이래. 지금 여자친구도 없대.’
관장이 미혼인 것을 알게 되었고 은조는 친구의 짝사랑을 도와주고 싶었다.
“오늘 아침에 관장님한테 조금 신세 졌거든. 감사의 뜻으로 커피라도 한잔 쏘려고.”
“무슨 신세?”
관장의 얘기에 시은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아침에 입구에서 만났는데 걷는 거 불편하지 않냐고 팔을 잡고 걸으라고 하더라? 혼자 충분히 걸을 수 있어서 거절하려다가 네 생각이 딱 난 거지.”
은조가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아, 이렇게 도움을 받고 보답으로 커피를 사드려야겠다. 내가 다리가 불편하니까 너를 대신 보내야겠다, 이렇게 시나리오가 떠오른 거지.”
시은이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며 손뼉 치는 시늉을 했다.
“역시. 내 베프. 훌륭하다! 잘되면 이 언니가 한 턱 쏠게.”
은조는 그래서 오늘 입구에서 관장을 만났을 때 그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네가 들고 가서 ‘한은조 실장님이 이거 전해드리라고 해서요.’ 하면서 전해줘.”
그렇게라도 얼굴 한번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시은의 얼굴은 상기되었다.
“관장님 드실 커피 정성스럽게 내려봐.”
“알았어. 기다려. 영혼을 담아서 커피를 내려드려야지.”
시은이 신난 얼굴로 들어갔다.
. . . 시은이 커피를 들고 관장실로 향했다. 문 앞에 서서 긴장된 얼굴로 머리카락을 가다듬었다.
“흠흠!”
목도 한 번 가다듬고 관장실 문을 노크했다. 똑똑.
“네. 들어와요.”
노크하니 바로 대답이 들렸다. 시은이 문을 빼꼼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관장님.”
관장 준호가 고개를 돌려 보았다. 직원 중 한 명인 줄 알았는데 커피숍 사장이어서 의아하게 여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여긴 어쩐 일로.”
“이거요.”
시은이 테이크아웃 커피잔을 내밀었다.
“한은조 실장님이 관장님 가져다드리라고 해서 대신 가져왔어요. 아시다시피 다리가 불편해서요.”
시은은 평소보다 더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아침에 도와주셔서 감사하다고.”
“아, 네.”
준호가 커피를 받아들었다. 커피를 받으면서 손가락이 살짝 닿았다. 시은은 순간 전기가 찌릿 온몸을 관통하는 줄 알고 움찔했다.
“감사합니다.”
“한은조 실장님이 제 친구거든요. 그래서 대신 심부름 왔어요.”
시은이 수줍어하면서 말하자 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래요? 커피 잘 마시겠다고 전해주세요.”
“네, 그럼 수고하세요.”
시은이 손을 앞으로 가지런하게 모으고 인사했다.
“고맙습니다.”
준호도 같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시은이 나가려다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아, 참. 커피, 에티오피아 원두와 브라질 원두 섞어서 직접 갈아서 핸드메이드로 만든 거예요.”
준호가 다소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전에 그거 좋아하셨던 것 같아서요.”
“기억해주시니 감사하네요.”
시은이 수줍게 웃으며 문을 닫고 나왔다. . . .
“갖다 줬어?”
얼굴이 빨개져서 온 시은에게 은조가 흥미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시은이 붉어진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어떡해. 아직도 가슴 두근거려.”
“주니까 뭐라셨어?”
“아, 그래요? 커피 잘 마시겠다고 전해주세요.”
시은이 턱을 당기며 굵직한 목소리를 냈다.
“목소리도 어쩜 그렇게 멋있어?”
은조는 시은의 짝사랑에 같이 설레면서 웃었다. . . . 얼마 후 사무실에서 일하던 은조에게 내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네, 전시기획팀 한은조입니다.”
[한 실장님. 커피는 뭐 하러 보냈어요.]
관장 준호였다.
“도움을 받았으면 당연히 은혜를 갚아야죠.”
[커피 사주셨으니 오늘 점심 제가 사겠습니다.]
“네? 커피 정도로 뭘 그러세요. 안 그러셔도 되는…….”
은조는 점심을 사겠다는 준호 말에 시은도 데려갈까, 하는 생각을 했다.
“저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요.”
[네, 말씀하세요.]
“늘 같이 점심 먹는 친구가 있는데, 혹시 같이 가도 될까요? 친구가 혼자 먹게 되어서.”
[아, 커피숍 사장님이요?]
“어머, 어떻게 아세요?”
[아까 커피숍 사장님이 그러시더라고요. 한은조 실장님이 친구라고.]
“아, 얘기했구나.”
[단짝 친구인가 봅니다. 네, 괜찮습니다. 같이 먹죠.]
“친구 밥값은 제가 낼 거예요. 부담 갖지 마세요.”
[괜찮습니다. 친구분까지 제가 사죠.]
전화를 끊은 은조는 곧장 시은에게 전화했다. 전해 들은 시은은 꺄! 소리를 질렀다. * 민후는 오늘따라 일에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아내가 근무하는 곳에 젊은 상사가 있다는 게 왜 이리 거슬릴까? 아침에 그 상사의 팔을 잡고 걷는 모습을 본 뒤로 신경이 쓰여 집중되지 않았다. 그 상사와 일로 자주 마주칠까? 같은 공간에서 일하나? 관장이니 관장실이 따로 있겠지? 일을 그만하면 어떻겠냐고 말해볼까? 그건 좀 오버겠지? 이상하게 아내에게 집착 같은 것이 생겨버렸다. 자신이 생각해도 미친 것 같았다. 민후는 자꾸만 아내의 직장 상황이 궁금해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셔츠 소매를 살짝 걷어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핸드폰을 들어 은조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민후 씨.]
아내의 목소리를 들으니 불안한 감정이 조금 가시는 것 같다.
“오늘 바빠?”
[아뇨.]
[나 외근 나가는 길에 거기 들러서 같이 점심 먹을까 하는데. 어때?]
외근 나갈 일은 없었다. 아내와 함께 점심 먹으려고 일부러 아내 직장까지 갈 생각이었다.
[……아.]
은조가 머뭇거리자 민후가 물었다.
“시간이 안 돼?”
[선약이 있어서요.]
“선약? 누구랑?”
[관장님이랑 같이 점심 먹기로 했어요.]
민후의 눈썹이 갈매기 날개처럼 끝이 휙 올라갔다.
“…….”
턱관절도 움찔거렸다.
“관장하고 점심을 먹기로 했다고?”
[아, 둘이 먹는 건 아니고요. 제 친구 있죠? 커피숍에서 일하는. 그 친구도 같이 먹어요.]
단둘이 먹는 게 아니라 셋이서 먹는다고 해도 민후는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은조는 민후가 근처까지 오는데 같이 점심 먹을 기회를 놓치게 되어 안타까웠다.
[어떡하죠? 나도 민후 씨랑 점심 먹고 싶은데.]
그럼 그 약속을 취소하든가. 민후는 이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다음에 같이 점심 먹어요. 저 다리 나으면 민후 씨 회사 근처로 제가 갈게요.]
끝내 아내는 그 젊은 관장과의 점심을 택했다. 서운함에 손으로 이마를 천천히 문질렀다.
“그래. 다음에 해.”
속에서 부글부글 화가 끓었지만 목소리는 차분했다. 전화를 끊은 민후는 한동안 돌처럼 굳은 채로 앉아 있었다. 그 관장이랑 같이 점심을 먹는다고? 직장상사나 동료와 점심을 먹는 것은 민후도 자주 있는 일이었다. 간혹 여자 동료와도 함께 식사했다. 그런데 아내가 그 자랑 점심을 먹는다고 하니 왜 이렇게 못마땅한 걸까? 왜 자꾸 신경이 쓰이는 걸까? 민후는 질투심으로 심기가 몹시 불편해졌다. 비서실장이 문을 열고 말했다.
“전무님, 언제 나가십니까? 저희 식사하러 가겠습니다.”
점심 약속이 있다고 미리 말했더니 비서실장이 저렇게 물었다.
“도시락 하나 배달 부탁합니다.”
민후가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문틈으로 얼굴만 내밀고 있던 비서실장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도시락이요? 아까 약속 있으시다고…….”
“까였습니다.”
민후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까여요? 누구한테요?”
“…….”
대답 없는 민후를 보다가 문 실장은 문을 닫고 나갔다. 초밥이 가지런하게 담긴 일식집 도시락이 배달됐다. 비서실장이 자신의 것도 주문해 민후와 나란히 앉아 먹었다. 민후는 초밥을 입에 넣고 기계처럼 우물거리다 삼켰다. 머릿속에는 온통 아내가 지금쯤 그 관장이란 남자와 밥을 먹고 있겠지, 생각했다. 밥알을 씹는 건지, 돌을 씹는 건지 모르겠다.
“문 실장.”
“예.”
“직장상사들이 여자 직원 중에 호감이 가더라도 유부녀한테는 집적대지는 않죠?”
“아뇨.”
문 실장이 제법 단호하게 대답했다.
“다 그렇게 도덕적으로 살면 세상이 얼마나 평화롭고 아름답겠습니까? 안타깝게도 그렇지가 않죠.”
“유부녀한테도 그런다고?”
문 실장은 초밥을 우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무님. 우리 회사에도 불륜이 알게 모르게 많다고…….”
민후의 눈썹이 꿈틀대자 문 실장이 움찔했다.
“흠흠. 아닙니다. 저도 소문으로만 들어서.”
“유부녀인데도 의도적으로 접근한다는 거지? 같이 점심 먹고 그런 것도 위험한가?”
“점심이요? 점심이야 같이 먹을 수 있죠. 그거 말고 업무 외 시간에 개인적으로 연락을 주고받는다고 하면 그건 십중팔구…….”
문 실장이 의미 있게 눈짓을 했다. 비서실장 얘기를 들으니 더 불안했다. 아내를 못 믿는 건 아니다. 그놈을 못 믿겠다. 아내가 워낙 사랑스럽고 예쁘지 않은가? 흑심을 품고 점심을 사준다고 한 것도 아내는 순수해서 그런 시커먼 속내를 못 헤아릴 것이다. 너무 불안하다.
* 민후는 퇴근을 앞당겨 아내를 데리러 박물관으로 갔다. 차에 태우고 벨트를 매주며 말했다.
“오늘 점심 맛있게 먹었어?”
“네.”
은조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시동을 걸며 민후가 말했다.
“외간남자랑 먹는 게 더 맛있었나 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