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질투하는 남자2021.11.06.
아내를 데리러 가기 위해 민후는 일찍 사무실을 나섰다.
“먼저 퇴근합니다.”
비서실장이 후다닥 민후를 따라나서며 말했다.
“전무님, 이선주 씨 재판 결과가 나왔습니다.”
임원용 엘리베이터로 걸어가던 민후가 멈칫하고 쳐다보았다.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 나왔습니다.”
집행유예란 단어에 실망했는지 민후는 이내 고개를 돌렸다.
“다른 범죄기록도 없고 반성하고 있다고 집유가 나왔네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 민후가 말했다.
“집행유예니 감옥 가고 싶지 않으면 다시는 안 오겠죠?”
“예. 이번에 겁을 많이 먹은 것 같습니다. 안심하셔도 됩니다. 보안팀에도 특별히 얘기해 두겠습니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해 민후가 안으로 발을 들이며 말했다.
“나는 상관없는데.”
뒤돌아선 민후가 낮은 어조로 말을 이었다.
“가족을 건드리면 참기 힘듭니다.”
그 여자가 또 아내를 찾아갈 리는 없겠지만, 아내도 스토커인 걸 알고 있으니 지난번처럼 속지는 않을 테지만. 지금 생각해도 아내에게 상처 줄 목적으로 찾아간 것이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다.
“예, 저도 주시하겠습니다. 들어가십시오.”
비서실장이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을 향해 꾸벅 허리를 숙였다. . . .
[10분 후 도착.]
아내가 일하는 박물관으로 향하면서 간결한 메시지를 남겼다.
[회의가 좀 길어질 것 같아요. 예정보다 10분 정도 더 늦어질 것 같은데 기다릴 수 있어요?]
[주차장에서 기다릴게. 천천히 일 끝내고 나와.]
일상적으로 주고받는 메시지에도 이렇게나 즐거웠다. 박물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민후는 시트에 머리를 기대고 휴식했다. 24시간도 모자랄 정도로 바쁘다 보니 이렇게 짧은 시간 짬을 내 쉬는 것이 습관처럼 되었다. 평소엔 이렇게 눈을 감고 있으면 잠깐 쪽잠이 들기도 했는데 오늘은 머릿속이 맑았다. 머릿속엔 어젯밤 아내의 모습이 지워지지 않고 자꾸 떠올랐다. 농밀하고 진했던 키스도 생각났다.
‘키스하면 멈추지 못할 거야.’
‘상관없어요.’
욕망을 절제하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했을 때 아내는 상관없다고 말했다. 민후는 어제 아내가 진짜 첫날밤을 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중간에 멈춘 것이 아내에겐 상처가 되었으려나? 아내가 원하고 있다면 더 미룰 것도 없다. 아내가 부담스러워할 것 같아서 조금 천천히 다가가려고 했는데. 민후는 오늘 밤에는 아내와 첫날밤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마 오늘 밤은 같이 침대에 누우면 자신이 더는 참지 못할 것 같았다. 오늘은 가족 식사 때 술도 마시지 말아야겠다 생각했다.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박물관 직원들이 하나둘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민후는 곧 아내의 모습이 보일 것을 기대하고 출입구를 주시했다. 아내가 어떤 젊은 남자와 함께 나오고 있었다. 대화하는지 천천히 나란히 걷고 있었다. 이따금 아내가 남자의 말에 웃기도 했다. 다른 남자를 보고 웃는 아내의 모습이 상당히 거슬렸다.
‘뭐야, 꼭 데이트하는 것처럼.’
바라보는 민후의 눈썹이 꿈틀댔다.
남자가 주차된 차로 걸어가니 아내와 다른 직원들도 일제히 인사했다. 직원들이 다 저렇게 인사할 정도면 꽤 직급이 높다는 얘기이다. 민후는 못마땅한 시선으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는 꽤 좋은 차에 올라타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은조가 민후의 차를 발견하고 차로 총총대며 뛰어왔다.
“많이 기다렸죠? 미안해요.”
은조가 타자마자 기다리게 한 것을 사과했다.
“누구야, 저 사람?”
민후가 턱짓하며 물었다.
“아, 새로 오신 우리 관장님이요.”
“관장? 관장이 저렇게 젊어?”
“네. 대박이죠?”
은조가 웃으며 대답했다. 뭐가 대박이란 말인가. 아내의 반응도 마음에 들지 않아 민후는 인상을 굳혔다.
“외국에서 꽤 유명한 박물관 부관장까지 하신 분이세요. 젊은데 능력이 엄청나죠? 게다가 훈남이시기까지 해요.”
젊은 관장을 칭찬하는 말이 못마땅한 민후가 말했다.
“훈남인 게 관장 능력이 뛰어난 건가?”
“에이, 그냥 직원들끼리 하는 얘기죠. 지난번 관장님은 나이가 많으셨거든요. 이왕이면 잘생기면 좋죠. 괜히 업무 효율이 올라가는 느낌?”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민후가 코웃음을 쳤다. 인물로 따지면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 민후인데 아내가 다른 남자 인물을 칭찬하는 것이 왜 이리 기분이 나쁠까? 그러고 보니 자신한테는 한 번도 잘생겼다는 얘기 안 한 것 같다. 수도 없이 잘생겼다는 칭찬을 들었던 민후인데 정작 아내에게는 들어보지 못했다. 저 젊은 관장보다 자신이 더 잘생긴 것 같은데 말이다.
“당신은 저렇게 생긴 남자를 잘생겼다고 하나 보지?”
민후가 뒤틀리는 속내를 감추고 말했다. 사실은 조금 유도한 질문이다. 아내의 입에서 ‘민후 씨가 훨씬 잘생겼죠.’ 하는 대답이 나오기를 바랐다.
“저 정도면 잘생겼죠. 매너 있고 정의감도 있어요. 지난번에 무슨 일이 있었느냐면요.”
아내의 입에서는 당신이 더 잘생겼다는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대신 더 신나서 젊은 관장을 칭찬했다.
“개인 수집가 소장전을 기획하고 있어서 보물급 유물을 여러 점 소장한 한 수집가와 미팅했는데요.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셨거든요. 그 수집가 선생님이 제 옆에 앉아서 저를 슬쩍슬쩍 만지고 그랬거든요.”
“뭐?”
민후가 인상을 쓰면서 쳐다보았다.
“당신을 만졌다고?”
“아주 대놓고는 아니고 슬쩍 이런 식으로.”
은조가 민후의 손을 잡으며 재연했다.
“그걸 보신 관장님이 일부러 저를 불러서 수집가 선생님에게서 떼어놓고 대신 본인이 그 옆에 앉으셨어요. 어찌나 고맙던지.”
민후는 늙은 수집가가 아내를 슬쩍 만졌다는 것도, 그걸 그 젊은 관장이 보호해줬다는 것도 다 마음에 안 들었다.
“고맙네.”
그래도 고마운 건 고마운 거다. 자신이 없을 때 아내를 보호해줬으니. 그런데 왠지 기분이 썩 좋지 않은 이유는 뭘까? 아내를 태우고 삼성동으로 향하면서도 민후는 기분이 풀리지 않았다.
“그 늙은 수집가 같은 일이 자주 있어?”
“아뇨. 자주 있지는 않아요. 신경 안 써도 돼요, 민후 씨.”
“어떻게 신경을 안 써? 딴 남자가 내 아내를 만지는데.”
은조가 고개를 돌려 민후를 보았다. 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딴 남자가 내 아내를 만지는데.’
그의 말에 은조는 심쿵했다.
‘뭐야, 지금 질투하는 거예요?’
지나가는 민후의 말에 은조는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 본가에 도착하니 강 회장이 은조를 반갑게 맞았다.
“어서 오너라, 아가. 몸은 좀 어떠냐? 어디 불편한 곳은 없어?”
은조는 강 회장 앞에서 뻔뻔하게 임신 연기하기가 힘들었다.
“……네.”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하며 고개 들기가 힘들었다.
“들어와 이리 앉아라.”
강 회장은 은조를 공주님 모시듯이 극진하게 대했다. 기현과 예지 부부도 이어서 도착했다.
“아버님, 저희 왔어요.”
“어, 그래. 어서 와라.”
“안녕하셨어요, 형님.”
은조가 일어나 예지에게 인사했다. 은조를 발견한 예지는 순식간에 표정이 변했다.
“오셨습니까, 형수님.”
민후는 지난번 칵테일 사건이 떠올라 싸늘한 표정으로 인사했다.
“네. 서방님.”
예지도 눈을 내리깔고 언짢은 표정으로 인사했다. 예지가 소파에 앉아 있는 은조를 보며 얄밉게 말했다.
“왔으면 들어가서 아주머니 도와야지, 왜 그러고 앉아 있어?”
은조가 일어나려고 하자 강 회장이 말렸다.
“임신부가 무슨 일이야. 앉아 있어라.”
강 회장이 붙잡자 예지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초기에는 조심해야 한다며.”
강 회장이 예지를 보며 말했다.
“작은 애 일 시키지 말아라.”
순간 예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은조는 난감했다. 진짜 임신이 아닌데 이런 특혜를 받으며 앉아 있는 것은 가시방석이다.
“아니에요, 아버님. 무거운 것만 들지 않으면 괜찮아요.”
“아이고, 무슨 소리야. 여기 일할 사람이 없냐? 아주머니도 있고 큰 며느리도 있지 않으냐. 두 사람이 하면 충분하다.”
은조는 예지의 눈치를 안 볼 수 없었다. 평소에도 은조가 노는 꼴을 못 보는 성격인데 임신했다고 주방 일에서 열외를 시켜주니 지금 예지가 어떤 기분일지는 안 봐도 뻔했다. 예지는 날카로운 눈으로 은조를 노려보았다. 안 그래도 임신에 또 실패해서 화가 나 죽겠는데 강 회장이 은조를 감싸니까 돌아버릴 것 같았다.
‘아버님이 그런다고 진짜 가만히 앉아 있어?’
예지는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며 은조를 노려보았다. 예지의 표정 변화를 지켜보고 있던 민후가 픽 웃으며 한마디 거들었다.
“그래. 당신은 앉아 있어. 아주머니랑 형수님이 하시면 되니까.”
민후의 말에 예지는 더 독한 눈으로 은조를 쏘아보았다. 이내 예지는 잔뜩 인상을 쓴 채로 주방으로 들어갔다. 응접실에 앉아 있는 강 회장이 은조에게 살갑게 물었다.
“새아가 먹고 싶은 거 없니? 먹고 싶은 게 있으면 해달라고 해.”
“특별히 없어요, 아버님.”
옆에 있던 민후가 주방 쪽을 힐끔 보았다. 지난번 예지가 무알코올 칵테일이라며 술을 넣었던 일을 떠올리고는 가볍게 복수가 하고 싶어졌다.
“당신 꼬막 비빔밥 먹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 예전에 형수님이 해주셨던 꼬막 비빔밥 그거 생각난다고 했잖아.”
은조가 놀라 눈을 크게 뜨며 쳐다보았다.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민후는 놀라 쳐다보는 은조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했다. 은조는 민후가 일부러 그런다는 것을 알고는 가만히 있었다.
“그래? 아가, 그게 먹고 싶니? 그러면 먹어야지. 큰 아가. 이리 와봐라.”
강 회장이 큰 소리로 예지를 불렀다. 예지가 주방에서 나왔다.
“우리 둘째 아가가 꼬막 비빔밥이 먹고 싶다는구나. 큰 새아기 그거 잘하지? 네가 그거 좀 해줘라.”
“예? 지금이요?”
예지가 목을 쭉 빼고 물었다.
“그래. 임신부가 먹고 싶을 때 먹어야 한다고 하지 않니? 지금 해줘.”
예지가 튀어나올 듯 커다란 눈동자를 은조에게 돌렸다.
‘지금 나보고 저년 먹을 음식을 하라고 시키는 거야?’
예지는 기가 차고 코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은조를 보았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를 참느라 예지의 눈동자가 이글거렸다. 은조는 예지의 표정을 보며 속으로 조금 통쾌함을 느꼈다. 민후가 왜 그런 거짓말까지 하며 예지를 곤란하게 한지 알 것 같았다.
“형님, 미안해요. 예전에 형님이 만들어주셨던 꼬막 비빔밥이 계속 생각나더라고요. 혹시 괜찮으시면 부탁……드려도 될까요?”
은조도 얄미웠던 예지가 곤란해하는 것이 통쾌해 얼굴에 철판을 깔고 연기했다.
“꼬막이 없는데? 갑자기 얘기하면 어떡해? 미리 얘기했어야지.”
예지가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꼬막이야 가서 사 오면 되지 않느냐? 기현아, 네가 가서 좀 사 와라.”
강 회장이 기현에게 꼬막을 사 오라고 하자 기현이 가만히 있다 봉변당한 얼굴을 했다.
“예? 제가요?”
“그래. 임신했을 때 먹고 싶다는 건 웬만하면 다 먹어야 한다. 한겨울에 수박을 찾는 것도 아닌데 뭐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네. 얼른 가서 사 와.”
기현과 예지는 강 회장의 말이라 거역할 수도 없어 난감한 얼굴이었다. 예지는 독하게 눈을 뜨고 은조를 노려보았다.
‘저년 저거. 일부러 저러는 게 분명해. 그냥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어!’
끓어오르는 화를 참느라 예지가 숨을 밭게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