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키스하면 안 멈출 거야2021.11.02.
“미안. 일찍 오고 싶었는데 붙잡혀서 못 왔어.”
민후가 은조가 누운 침대에 걸터앉았다.
“혼자 저녁 먹게 해서 미안해.”
은조는 처음 보는 남편의 취한 모습이 생소했다. 항상 좋은 냄새가 나던 그에게서 술 냄새가 풍기는 것도 낯설었다. 단정했던 머리는 조금 흐트러져 있었고 눈빛도 흐트러져 있었다.
“많이 취했네요.”
은조가 말하자 민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대표님이 자꾸 술을 권해서.”
은조는 잠옷을 슬립으로 바꾸어 입은 것이 자꾸 의식돼 이불을 목까지 끌어당겨 덮고 있었다.
“씻고 얼른 자요.”
“응.”
민후는 대답하고는 한참을 은조를 내려다보았다. 술을 마셔서 그런지 그의 호흡도 약간 거칠었다.
“왜요?”
은조가 왜 그렇게 쳐다보는지 묻자 민후는 옅게 미소를 지은 채 쳐다보기만 했다. 술기운인지 조금은 흐트러진 그의 눈빛이 평소보다 더욱 짙고 깊었다.
“왜요, 왜 그렇게 봐요.”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것이 민망했던 은조는 이불을 끌어당겨 얼굴을 반쯤 가렸다. 그러자 민후가 웃으며 이불을 내렸다.
“왜 가려.”
“그렇게 쳐다보니까 민망하잖아요.”
더 민망해진 은조가 다시 이불을 당겨 얼굴을 다 덮었다.
“내려 봐. 얼굴 안 보이잖아.”
술에 취해 그런지 민후는 평소 같지 않게 능청스럽게 굴었다. 한 사람은 이불을 당기고 한 사람은 이불을 끌어 내리는 힘겨루기를 하다가 이불이 확 내려갔다. 그러자 슬립 차림의 은조가 드러났다.
“……!”
아내가 귀엽다는 듯이 웃던 민후의 입매가 순식간에 굳었다. 평소 팔다리가 다 가려진 잠옷 차림으로 자던 그녀가 속옷이나 다름없는 슬립 차림이었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심지어 누워 있다 보니 슬립 치마가 올라가 있었다.
“어머!”
은조가 얼른 치마를 내렸다. 서로 놀라서 동그래진 눈이 마주쳤다.
“봐, 봤죠?”
은조가 당황한 목소리를 내었다. 민후는 놀라 뭘? 이라고 묻지도 못하고 그대로 굳어 있었다. 치마가 올라간 사이 속옷까지 다 봤냐고 묻는 말에 민후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눈이 있다면 못 볼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왜 이불을 자꾸 당겨요.”
은조는 다시 이불을 끌어당겨 몸을 가렸다. 민후는 생각지도 못했던 아내의 모습에 술이 확 깨는 느낌이었다. 술은 깨는데 몸에 열은 확 올랐다. 조금 전까지 미소가 만연하던 민후의 표정이 이제는 진지해졌다. 은조는 움직이지도 않고 침대를 떠나지 않는 민후를 보며 긴장한 표정이었다. 오늘 아이를 빨리 갖자고 말하려고 했지만, 막상 이런 차림으로 기다린 걸 보이니 자신의 속을 보여준 것 같아서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민후가 몸을 서서히 움직였다. 은조의 어깨 양옆으로 팔을 짚고 덮칠 듯이 위에서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거 유혹인데.”
은조는 위에서 내려다보는 남편을 긴장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오늘 슬립을 입은 목적은 사실 어설프지만 유혹이 맞다. 빨리 아이를 갖고 싶다고 얘기하고 싶었으니까. 은조는 눈만 깜빡이며 남편을 올려다보았다.
‘유혹 맞아요. 아이…… 빨리 가지고 싶어요.’
목구멍에서 이런 말이 맴돌 뿐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이 순간이 민망하고 부끄러울 뿐이었다.
“유, 유혹 아니거든요.”
은조는 잠자리를 하자는 말을 차마 하지 못했다.
“그냥 입은 거예요. 잠옷으로 가끔 이런 것도 입거든요.”
얼굴을 붉힌 채로 변명하는 은조를 민후는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마치 아내의 속을 다 꿰뚫어 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은조를 내려다보는 민후의 숨소리가 조금씩 거칠어졌다. 술에 취하면 본능이 더욱 짙어지는 것이 정상인가? 오늘따라 민후는 아내를 안고 싶은 욕망이 더욱 커졌다. 집으로 오는 내내, 아니 대표와 술을 마시면서도 빨리 집에 가고 싶은 생각만 간절했다. 취기가 오를수록 아내가 보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보고 싶어서 침실로 바로 직행했는데 오늘따라 아내가 야한 잠옷 차림으로 누워 있다. 목선과 어깨가 훤히 드러난 채로. 순간 내재 되어 있던 짐승이 꿈틀댔다. 술에 취해서 그런지 오늘은 참아낼 자신이 없다. 저 하얗고 긴 목에 얼굴을 묻고 싶었다. 입술을 내려 부드러운 피부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얼굴을 붉히고 저를 가만히 올려다보는 아내가 너무 사랑스러웠다. 살짝 벌어진 도톰하고 붉은 입술을 입에 물고 싶었다.
“키스하고 싶은데…….”
민후가 취기로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다 이내 미간을 살짝 구기고 자책하듯이 말했다.
“미안, 내가 많이 취했나 봐. 술 냄새 풍기면서 키스라니.”
민후는 이렇게 술에 취한 채로 키스하는 것은 아내를 전혀 배려하지 않은 행동이라 여겼다. 끓어오르는 욕망을 꾹 눌러 참으려는 때.
“해요, 키스.”
은조가 대답했다. 몸을 일으키려던 민후가 쳐다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은조가 얼굴을 붉힌 채로 쳐다보고 있었다. 은조는 할머니와 통화 후 가짜 임신을 빨리 진짜 임신으로 만들고 싶었던 순간을 떠올렸다. 용기를 내 그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한 번도 경험이 없던 터라 두려움도 없지 않았지만, 미지의 감각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도 있었다. 민후는 떨리는 눈으로 아내를 응시했다. 지금 키스하면 몸 안에 봉인된 짐승을 깨우게 될 것이 분명했다. 자제하기 힘들 것이 뻔했다.
“키스하면 멈추지 못할 거야.”
멈추지 못할 뿐 아니라 폭주할지도 모른다.
“상관없어요.”
은조가 대답했다. 민후의 숨이 조금 더 거칠게 뿜어졌다. 그가 호흡할 때마다 알싸한 알코올 향이 퍼졌다. 민후의 시선이 은조의 입술에 닿은 채로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비스듬히 얼굴이 기울어지고 입술이 닿았다. 입술이 닿자 은조가 살짝 입술을 벌렸다. 반쯤 벌어진 입안으로 거침없이 그의 숨결이 들어왔다. 은조는 눈을 감고 입안에서 느껴지는 그의 뜨거운 열기에 흠칫 몸을 떨었다.
“음.”
옅게 떨리던 은조의 신음조차 민후가 삼켜버렸다. 결혼하고 두 번째 키스다. 첫 번째 키스가 떨리는 긴장감으로 서툴렀던 느낌이라면 두 번째는 뭔가 더 어른스럽고 야릇했다. 그의 입술에서 나는 알싸한 알코올 향 때문인지 퇴폐적이기도 했다. 입안으로 그의 숨결이 차오를 때마다 은조는 형언할 수 없는 감각에 휩싸였다. 몸이 뜨거워지는 것 같기도 했고 공중에 붕 뜨는 것 같기도 했다. 무릎이 절로 오므려지고 손끝에 힘이 들어가 남편의 소매를 꽉 쥐기도 했다. 민후의 커다란 손이 은조의 머리를 감쌌다. 잠시 입술을 떼고 뜨거운 숨을 그녀의 얼굴에 쏟아내다가 다시 입술을 물었다. 키스가 짙어질수록 참을 수 없는 욕망이 민후를 잠식했다.
몸은 점점 뜨겁게 달아오르고 그녀를 더 깊이 안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숨어 있던 본능이 막 깨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어야 한다. 아내와의 첫날밤을 이렇게 술에 취한 채로 보내고 싶지 않았다. 천천히 그가 고개를 들어 은조의 눈을 가만히 응시했다. 은조를 응시하는 그의 눈동자가 열기로 일렁였다.
“하아…….”
민후가 신음과도 같은 한숨을 토하며 은조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키스하지 말 걸 그랬어.”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붉어진 얼굴로 밭게 숨을 토하는 은조는 의아한 표정이었다. 키스하지 말 걸 그랬다고? 뭔가 실망스러웠나?
“참기가 너무 힘들어…… 이러다 술 취한 채로 당신을 안을 것 같아.”
고개를 든 민후가 은조의 볼을 부드럽게 감쌌다.
“술에 취해서 첫날밤을 보내고 싶지 않아. 당신한테도 예의가 아니지.”
민후가 은조의 이마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고 시선을 맞추었다.
“나중에 분명 후회할 것 같아.”
민후가 상체를 일으켜 은조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당신에게 더 좋은 기억으로 남게 해주고 싶어.”
은조는 민후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네. 피곤할 텐데 씻고 얼른 자요.”
아쉬움이 남았지만, 그의 말대로 첫날밤의 기억이 아쉬울 것 같기도 했다. 또한, 그가 자신을 배려한다는 생각에 감동이었다. 좋은 기억으로 남게 해주고 싶다는 말에 은조는 다가올 그 날에 대한 기대감과 설렘으로 두근거렸다. * 다음 날 아침. 잠결에 언제 팔베개를 했었는지 아내는 자신의 팔을 베고 잠들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또 젤리를 찾아내 민후의 신체 일부를 만지고 있었다. 오늘은 술에 취해 잠들어 그런지 자다가 깨지는 않았다. 푸르스름한 새벽 기운이 창으로 비쳤다. 새벽에는 좀 힘든데. 안 그래도 새벽에는 예민한데 아내의 손이 젤리를 만지작대니 민후의 몸은 점점 반응하기 시작했다.
“후우.”
길게 호흡하며 아내를 보았다. 아내가 슬립 차림으로 품에 안겨 잠든 모습을 보며 민후는 어제 아내와 뜨겁게 키스했던 것이 기억났다. 어제는 진짜 첫날밤을 보낼뻔했다. 술기운이어서 그런지 본능을 억제하기가 힘들었다. 아침인 지금도 참기 힘든 건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저 슬립 잠옷 때문인 것 같다. 아내는 남자가 시각적으로 많이 자극받는 걸 모르는 걸까. 갑자기 저렇게 노출이 많은 잠옷을 입은 건 일부러 자극하기 위해서였나? 아내가 첫날밤을 보내자고 메시지를 보낸 거였나? 그래도 어제는 참길 잘한 것 같다. 그렇게 술에 취한 상태로 첫날밤을 보냈더라면 아마 후회했을 것이다. 아마 아내가 계속 저 잠옷을 입고 잔다면 곧 첫날밤이 올 것 같다. 오늘 밤이나 내일 밤이면 아마도……. 민후는 술을 많이 마신 다음 날 아침에는 반드시 땀을 빼는 운동을 했다. 땀을 빼면 숙취가 많이 해소되었다. 아내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팔을 빼냈다.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침대에서 일어나 침실을 나갔다.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민후는 밖으로 나갔다. 조깅으로 땀을 빼고 나면 몸이 개운해질 것이다. 아직 동이 트기 전이라 푸르스름한 새벽 공기를 가르고 동네를 뛰기 시작했다. 뛰면서 어젯밤 아내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 긴 목과 가녀린 어깨가 다 드러난 슬립 차림의 아내 모습은 매혹적이었다. 그 유혹적인 모습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입술에 감기던 부드러운 아내의 뜨거운 숨결도 생생하게 기억났다.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아내의 모습에 민후는 더 속도를 내어 달렸다. 타다다닥. 민후의 발소리가 새벽공기를 가르고 골목에 울렸다. * 일어나보니 남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전무님 구두는 있는 거 보니 운동하러 가셨을 거예요.”
일찍 출근한 도우미가 민후가 운동 나갔을 거라고 말해주었다. 가끔 그가 새벽에 조깅을 간다고 말했다.
“여사님, 콩나물 있어요? 콩나물국 좀 끓여주세요.”
“네.”
은조는 어제 과음하고 들어온 민후를 위해 해장국을 끓여달라고 부탁했다. 잠시 후 민후가 운동하고 돌아왔다. 그의 민소매 티셔츠 앞과 등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얼굴도 땀으로 젖어 있고 근육으로 두꺼운 어깨와 팔에도 땀이 나 번들거렸다. 늘 셔츠차림의 모습만 보다가 이런 모습을 접하니 왠지 섹시해 보였다. 은조는 괜히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콩나물국 끓이고 있어요. 씻고 오세요.”
샤워를 끝내고 민후는 출근 복장으로 식탁에 앉았다. 조금 전은 짐승남이었는데 지금은 신사가 되어 나타났다. 은조는 날마다 남편의 매력에 점점 빠져드는 것 같았다. 괜히 시선 두기가 민망해 콩나물국을 떠먹으며 말했다.
“오늘 본가에서 식사하는 날이에요.”
일주일에 한 번 본가에서 식사하는 날이 돌아왔다.
“벌써 날짜가 그렇게 지났나.”
“삼성동으로 바로 오실 거예요?”
“당신 데리러 갈까? 같이 가.”
민후가 같이 가자고 말했다.
“네.”
그가 데리러 와서 사이좋게 함께 가는 것이 처음이라 은조는 절로 미소가 번졌다. 한편으로는 아직 임신 중으로 알고 있는데 본가에 가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