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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남편을 유혹하는 법 (17/100)

17. 남편을 유혹하는 법2021.10.30.

16551882665806.png[애 지워.]

끔찍한 말에 은조의 입이 놀라 벌어졌다.

16551882665806.png[계약 끝나면 이혼하기로 되어 있는데 애 있으면 아무래도 이혼이 힘든 법이다. 그러니 애 지워.]

은조는 손끝이 덜덜 떨렸다. 할머니가 얼마나 끔찍한 사람이었는지 다시 깨달았다.

16551882665806.png[양 선생님께 찾아가면 알아서 해주실 거다. 강 전무나 회장님한테는 자연 유산되었다고 해. 그러면 모든 것이 깔끔해지는 거다.]

은조는 가짜 임신이지만 아이를 지우라는 할머니 말이 너무나 무서워 소름이 돋았다.

16551882665806.png[수술하면 집으로 와서 며칠 지내. 그것도 애 낳는 거나 다름없으니 친정에서 몸조리한다고 내가 연락하마.]

은조는 두려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전화기만 귀에 대고 있었다.

16551882665806.png[알아들었지? 그렇게 알고 그만 끊자.]

윤 회장은 은조의 대답 따위는 필요 없다는 듯 자기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통화를 끝내고 은조는 천천히 귀에서 전화기를 떼어냈다. 놀란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 팔에는 아직도 소름이 돋아 있었다. 할머니가 처음 사업 목적으로 결혼을 제안했을 때만 해도 손녀에게 강제로 결혼시키기가 미안해 3년간의 계약 결혼을 시킨 거로 생각했다. 계약으로 결혼했지만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려 살게 되면 할머니로서는 더 잘된 일이 아닌가. 굳이 임신한 아이를 지우라고까지 하는 이유가 대체 뭔가?

16551882665806.png‘애 있으면 이혼이 힘든 법이다.’

반드시 이혼해야만 하는 이유라도 있는 걸까? 한주 그룹과 사돈 맺은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으면서. 은조는 남편과 사이가 좋아지면 3년의 계약이 끝나더라도 이혼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혼에 대한 할머니의 강한 의지를 알고 나서는 더욱 이혼하기 싫어졌다. 할머니가 했던 말을 다시 떠올렸다.

16551882665833.png‘애가 있으면 이혼이 힘들어? 그러면 반드시 아이를 낳아야겠어.’

할머니와 통화 후 은조는 임신에 대한 의지를 더욱 확고히 했다.

16551882665833.png‘민후 씨에게 빨리 아이를 갖자고 해야겠어.’

가짜 임신을 진짜로 만들기 위해 민후와 임신 협의를 했지만 이제 은조는 그와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리고 싶은 마음이 더 뚜렷해졌다. 지금부터 더 적극적으로 아이를 갖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은조는 할머니와 통화 후 마음이 급해졌다. 아이를 갖기로 합의는 했는데 부부 사이가 아직 그렇게 친밀해지지는 않았다. 남편은 그 전에 서로가 친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준비 기간이 더 길었다가는 많이 늦어질 수도 있다. 그러면 현재 가짜 임신과 출산 시기가 많이 어긋날 것이다,

16551882665833.png‘내가 먼저 얘기해야겠어.’

남편이 자신을 배려하느라 급하게 진행하지 않기에 은조는 자기가 먼저 하자고 얘기해야겠다 생각했다. 핸드폰을 들어 남편에게 전화할까, 문자 보낼까 고민했다.

16551882665833.png‘뭐라고 얘기해? 그거 빨리하자고?’

은조는 눈을 질끈 감고 도리질했다.

16551882665833.png‘아니야. 미쳤어. 이런 걸 전화로 얘기하기는 그렇지.’

집에 오면 슬쩍 얘기해보거나 아니면 분위기를 그런 쪽으로 잡는 게 나을 것이다. 은조는 핸드폰을 다시 넣었다. *

16551882694136.jpg“전무님, ○○산업개발 대표님께 연락이 왔는데요. 오늘 갑자기 일이 생겨서 오찬 약속을 못 지킬 것 같다고 혹시 저녁 식사는 어떠신지 여쭈어보십니다. 저녁에 다른 일정 없으니 저녁 식사로 변경할까요?”

비설실장의 말에 민후가 잠시 고민했다. 저녁에 따로 약속이 있는 건 아니어서 시간은 괜찮은데 내키지 않았다. 요즘은 일찍 퇴근해 아내와 함께 저녁을 먹는 시간이 즐거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반기 사업을 위해서는 꼭 만들어야 할 자리였다.

16551882694142.png“네. 그렇게 하세요.”

16551882694136.jpg“네. 그러면 예약 식당도 변경하겠습니다.”

저녁 약속으로 변경하고 민후는 아내에게 문자를 보낼까 생각하며 핸드폰을 들었다.

16551882694142.png[오늘 저녁 약속 있어. 먼저 식사해.]

결혼하고 이런 문자를 아내에게 직접 보낸 건 처음이었다. 그동안은 개인 생활에 간섭하지 않았기에 저녁을 먹고 들어가든 야근을 하든, 일일이 전하지 않았다. 민후는 요즘 일상이 얼마나 많이 달라졌는지 실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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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저녁 약속 장소인 최고급 일식당에 도착했다. 모든 좌석이 따로 개별실로 되어 있어 프라이빗한 공간이었다. 안내하는 직원이 미닫이문을 열어주자 산업개발 대표가 먼저와 기다리고 있었다.

16551882694136.jpg“아이고, 강 전무님. 어서 오십시오.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이도 훨씬 많은 대표가 민후에게 허리를 굽히며 악수했다.

16551882694142.png“저야말로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민후도 공손하게 인사하며 악수했다.

16551882694136.jpg“무슨 말씀입니까! 오늘은 제가 모시는 자리입니다.”

하반기 협력해야 할 사업이 있어 민후나 그쪽이나 서로에게 예를 갖추었다. 비즈니스적인 친분이기는 해도 다져두는 게 필요했다. 저녁 식사는 으레 술도 한두 잔 하기 마련이어서 식사와 함께 술잔도 오갔다.

16551882694136.jpg“한잔 받으십시오, 강 전무님.”

16551882694142.png“아뇨. 제가 먼저 따라드리겠습니다.”

16551882694136.jpg“아닙니다. 오늘 제가 전무님 접대하는 자리인데 저의 기회를 뺏을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민후가 술잔을 들자 대표가 술을 따랐다.

16551882694136.jpg“술은 꽤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16551882694142.png“그렇게 술이 세지는 않습니다. 정신을 잃으면 안 되는 자리여서 정신력으로 버텼더니 소문이 그렇게 났습니다.”

16551882694136.jpg“하하, 저도 술은 좀 하는데 대작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민후가 시선을 들어 대표를 보았다. 대표는 오늘 작정하고 술을 마실 생각인 것 같았다.

16551882694142.png“대표님, 오늘은 많이 마실 생각 없습니다. 딱 한 잔만 하겠습니다.”

식사는 이어졌고 대표가 자꾸 술을 권했다. 민후는 계속 거절할 수도 없어 받아 마시다 보니 많이 취했다. 저녁 식사만 하고 헤어지고 싶었는데 대표는 2차를 고집했다.

16551882694136.jpg“2차 가셔야죠. 오늘 제가 강 전무님 확실하게 접대해드린다니까요.”

  * 예지는 초조한 표정으로 임신테스트기를 들고 화장실로 향했다. 배아 이식 시술 후 며칠이 지났고 임신이 됐는지 처음 확인하는 순간이다. 가장 긴장되고 초조한 순간이 아닐 수 없다.

16551882722265.png“이번에는 제발…….”

예지는 테스트기를 기도하듯이 두 손으로 들고 중얼거렸다. 한 번 실패했던 경험이 있다 보니 더 긴장되었다. 비장한 표정으로 화장실로 들어갔다. 얼마나 긴장했던지 소변을 받을 때 손이 덜덜 떨렸다. 소변을 묻히고 빨간 줄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선명하게 한 줄만이 나타났다.

16551882722265.png“좀 더 기다려 보자. 두 번째 줄은 늦게 나타난다고 했으니.”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두 번째 빨간 줄은 나타나지 않았다. 불안하던 예지의 눈이 더욱 흔들렸다.

16551882722265.png“이거 불량 아니야?”

예지는 새로운 테스트기를 뜯어서 다시 시도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선명한 한 줄만 나타났다.

16551882722265.png“에이 씨! 이런 망할 불량품을 팔아!”

예지가 테스트기를 집어 던졌다. 플라스틱 테스트기가 욕실 바닥에 내리꽂혔다가 튕겨 벽에 가 부딪쳤다. 예지는 얼굴이 잔뜩 일그러진 채로 세 번째, 네 번째 테스트기를 뜯어서 시도해보았다. 결과는 모두 같았다.

16551882722265.png“아악! 짜증 나!”

한 줄만 선명한 테스트기가 욕실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16551882722265.png“으흐흑.”

예지는 손에 얼굴을 묻고 흐느껴 울었다. 눈물이 범벅된 얼굴을 들며 예지가 말했다.

16551882722265.png“이게 다 은조 그년 때문이야!”

은조가 임신을 하고 나서부터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에 잠을 잘 자지 못하였다. 불면증이 다시 재발한 것은 다 은조 때문이다. 배아 이식 시술을 하고 나서는 잘 먹고 잘 쉬어야 착상이 잘되는데 마음 편하게 지내지 못했다. 그래서 착상에 실패한 거다. 예지는 임신 실패의 원인을 은조 탓이라고 단정했다. 자신도 빨리 임신이 되어야 하는데 실패해 화가 머리끝까지 난 예지는 은조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을 듣는 예지의 눈빛은 이미 이성을 잃은 채였다.

16551882665833.png[여보세요.]

은조 목소리만 들어도 짜증이 솟구쳤다.

16551882722265.png“너 때문이야!”

예지는 다짜고짜 빽 소리쳤다.

16551882665833.png[네?]

16551882722265.png“다 너 때문이야! 너! 너! 너 때문이라고!”

예지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는 전화를 끊었다.

16551882722265.png“아악!”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핸드폰을 집어 던졌다. *

16551882722265.png[너 때문이야!]

다짜고짜 소리치는 예지의 말에 은조가 눈을 크게 떴다.

16551882665833.png“네?”

16551882722265.png[다 너 때문이야! 너! 너! 너 때문이라고!]

예지가 빽 소리치고는 전화를 끊었다. 은조는 끊어진 핸드폰을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았다.

16551882665833.png“뭐야, 뭐가 나 때문이라는 거야.”

은조는 예지에게서 전화가 왔을 때 지난번 칵테일 일을 떠올리며 전화 받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그날 술을 넣었냐고 따져 묻고도 싶었지만, 발뺌할 것이 뻔하기에 일단 넘기기로 했다. 전화기를 내려놓으며 혼잣말했다.

16551882665833.png“오늘은 또 뭐 때문에 저 난리야?”

그때 도우미가 다가오며 물었다.

16551882694136.jpg“사모님, 오늘도 전무님하고 같이 식사하시나요? 그렇게 준비할까요?”

16551882665833.png“아뇨. 오늘은 저녁 약속이 있대요. 저 혼자 먹을게요.”

16551882694136.jpg“네. 사모님.”

아까 낮에 저녁 약속이 있다며 먼저 식사하라는 문자를 받고 은조는 기분이 묘했다. 이런 문자도 처음 받았다. 지금까지는 이런 시시콜콜한 스케줄을 공유하지 않았다. 일찍 들어와 식사하게 되면 도우미가 알아서 차려주고 남편 혼자 식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제 보통 부부의 모습을 갖추어가는 것 같아서 은조는 기분이 좋았다. 혼자 식사를 하면서 은조는 생각했다.

16551882665833.png‘민후 씨 들어오면 아이를 빨리 갖자고 말해야겠다.’

음식을 씹으면서도 은조는 계속 그 생각을 했다.

16551882665833.png‘어떻게 얘기해야 하지? 막상 얘기하려니 너무 민망한데?’

16551882665833.png‘다짜고짜 아이 갖자고 하면 좀 그러니까 분위기를 은근하게 잡을까?’

이런 생각을 하며 도우미가 빨래 개키는 모습을 가만히 보았다. 도우미가 자신의 속옷을 정리하는 모습을 본 은조는 뭔가가 떠올랐다.

16551882665833.png‘영화 같은 거 보면 여자가 야한 속옷을 입고 유혹하고 그러던데.’

혼자 이런 생각을 하던 은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16551882665833.png‘미쳤어, 안 돼. 난 절대로 못 하지, 그런 거.’

16551882694136.jpg“사모님 저는 그만 퇴근할게요.”

16551882665833.png“네. 수고하셨어요.”

도우미가 퇴근하고 혼자 남게 된 은조는 드레스룸으로 갔다. 아까 야한 속옷을 입고 유혹한다는 생각을 잠깐 한 터라 속옷을 살펴보고 싶었다.

16551882665833.png“어차피 나는 그런 속옷이 없지.”

야한 속옷 자체가 없어서 은조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있다 하더라도 엄두도 못 낼 테지만. 속옷 서랍을 뒤져보니 슬립이 있었다.

16551882665833.png“영화 보면 이런 걸 잠옷으로 입고 자던데.”

은조는 슬립을 몸에 대고 거울을 보았다.

16551882665833.png“오늘부터 잠옷을 이거로 바꿀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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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의 잠옷보다는 이런 슬립이 좀 더 분위기를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16551882665833.png“자다가 치마가 위로 올라가면 어쩌지?”

어차피 잠도 자야 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되었지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 . . 밤 11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16551882665833.png“많이 늦네. 저녁만 먹고 들어오는 줄 알았는데 술자리인가 봐.”

은조는 벽에 걸린 시계를 보고는 침대맡의 조명을 껐다. 과감하게 슬립으로 잠옷을 바꾸고 기다렸는데 민후가 생각보다 귀가가 늦었다. 잠을 청하려고 눈을 감는데 현관문 도어락 소리가 났다. 남편이 왔나 보다, 생각하며 은조는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리고 눈만 깜빡거렸다. 웬일인지 발소리가 다른 날과 달리 요란했다. 침실 문이 벌컥 열렸다. 약간 흐트러진 남편의 모습이었다. 술 많이 마셨나 보다. 민후가 침대로 약간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다가오자 술 냄새도 났다. 은조는 남편이 이렇게나 취한 모습은 처음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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