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만졌으면 책임을 져야지2021.10.26.
“부부가 하는 거. 그거 오늘 해.”
은조가 눈을 크게 뜨며 당황했다.
“……네?”
아까 부부가 하는 거에 대한 의미를 서로 다르게 해석했다. 남편이 얘기하는 건 부부관계다.
“마음대로 만졌으면 책임을…… 져야지.”
은조는 자신의 잠버릇 때문에 잠에서 깬 남편이 화가 났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자는데 민감한 신체를 그렇게 만지면 화가 날 것 같기도 했다.
“미안해요. 잠결에 나도 모르게 만진 거니 이해해줘요.”
은조가 침대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러면 다시 인형을 안고 잘게요. 인형이 없어서 그런 거니까.”
은조가 장롱을 열어 넣어둔 인형 베개를 다시 꺼냈다. 인형을 꼭 끌어안고 침대에 누웠다.
“이제 안을 일도, 만질 일도 없으니 편하게 자요.”
예전처럼 인형을 안고 눕는 아내를 보며 민후는 이게 아닌데, 생각했다. 아무래도 실수한 것 같았다. 몸이 너무 반응해버려 잠시 이성을 잃었다. 말 나온 김에 오늘 하자, 라고 하다니. 민후는 자신의 경솔한 발언을 후회했다.
“아까 내가 한 말은 미안해. 잠시 이성을 잃었어.”
은조가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아니에요. 잠버릇 때문이니 제 잘못이에요.”
은조는 남편의 잠을 방해한 것이 짜증 나게 했을 거로 생각했다. 오늘 하루만 그런 게 아니라 연속 잠을 깨운 거니 화 날 만도 했다.
“잠버릇 때문에 잠 깨워서 미안해요. 이제 편하게 자요.”
다시 인형을 꼭 끌어안고 은조는 잠을 청했다. 민후는 팔베개를 해주면서 아내와 더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데 자신의 실수로 다시 거리감이 생긴 것 같아 후회되었다. 경솔한 발언으로 아내가 불쾌하지는 않았을지도 신경 쓰였다. 아까는 아내의 손길 때문에 잠을 못 이루었는데 이제는 아내의 기분이 상했을까 신경 쓰여 잠을 못 이루었다. * 다음 날 아침, 걱정했던 것보다 아내는 기분이 괜찮았다. 아침 식사하며 아내가 먼저 말했다.
“나 때문에 잠을 잘 못 잤죠? 미안해요. 제 버릇이 그렇게 심한 줄 몰랐어요.”
“아니야. 내가 적응해야 할 문제야.”
“잠을 방해하면 안 되니까 인형은 다시 안고 잘게요.”
민후가 밥을 먹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내가 적응할 거니까 인형 안지 마.”
그의 목소리가 다소 단호해서 은조가 눈을 들었다. 민후는 흥분을 못 참은 건 자신의 문제였고 아내가 만지는 건 기분 좋았다는 솔직한 말은 할 수가 없었다. 아내가 자신을 변태로 오해할 수도 있으므로.
“그래도 쉽게 안 고쳐질 텐데. 매일 잠을 깨우면 어떡해요?”
은조는 자신 때문에 남편이 숙면을 못 하는 상황이 미안할 뿐이었다.
“내가 적응한다니까! 그러니까 인형은 다시 장롱에 넣어 둬.”
민후는 다소 강한 어조로 말하고 다시 밥을 먹었다. 은조는 남편을 빤히 보다가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만지는 버릇 때문에 짜증 난 거 아니었어? 내 잠버릇에 적응하겠다고?’
은조는 매일 남편을 안은 채로 잠에서 깨어날 자신을 생각하니 민망했다. 또 잠결에 민감한 부분에 손을 대다 남편이 잠에서 깨면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 젤리 코 찾는 잠버릇을 고칠까? 당분간은 젤리란 젤리는 다 멀리해야겠다. 다짐하며 은조는 밥을 먹었다.
. . . 출근한 민후는 어제 오해로 인한 해프닝을 떠올리고 어이가 없어 픽 웃었다.
‘아내가 하고 싶다던 부부들이 하는 게 고작 마트에서 장 보는 거였다니.’
비서실장이 태블릿을 보며 오늘의 일정을 보고하고 있었다.
“2시에 계열사 사장단 회의가 있고 4시에는…….”
민후는 어제 자신이 이상했던 건지 궁금했다.
“문 실장.”
“예.”
“부부들이 하는 거. 라고 하면 뭐가 제일 먼저 떠오릅니까?”
“부부들이 하는 거요? 부부싸움?”
민후가 고개를 들어 쳐다보았다.
“그게 제일 먼저 떠오릅니까?”
“네. 요즘 제일 많이 하는 거라 그게 제일 먼저 떠오르네요. 하하.”
비서실장이 멋쩍은 듯 웃었다.
“그거 말고 그다음에는요?”
비서실장이 눈알을 위로 굴리다가 말했다.
“재활용 쓰레기 버리기? 마트 장보기?”
민후가 시선을 돌리고 이마를 문질렀다.
‘뭐야, 나만 음탕해? 나만 쓰레기야?’
자신이 너무 음탕한 생각을 한 게 맞는다는 것만 확인한 셈이 되었다. 민후는 아내가 하고 싶다고 한 게 고작 마트 장보기여서 아내가 소소한 일상을 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보통 부부들이 많이 하는 것 중 놓치고 못 했던 것들이 많을 것이다. 보통의 결혼 생활하고는 달랐으니까. 아내는 그런 평범한 부부들의 일상이 부러웠나 보다. 아내가 말하기 전에 민후가 먼저 챙겨야겠다 생각했다.
“문 실장, 보통 부부들이 뭐 하면서 시간을 보냅니까?”
“글쎄요, 각자 터치 안 하고 사는 게 제일 편하다고 생각하는데요.”
“3년 되었다고 했습니까? 신혼 때는 그래도 같이 시간을 많이 보냈죠?”
“그랬죠. 같이 일을 하다 보니 가사를 분담해서 설거지나 청소를 하고요. 밤에는 치맥 하면서 영화 한 편 때리고.”
비서실장이 멋쩍어하며 목을 긁적였다.
“죄송합니다. 표현이 저급했죠?”
“괜찮습니다. 영화 한 편 본다는 말을 그렇게 표현합니까?”
“재밌자고 쓰는 표현이죠.”
“영화 한 편 보고, 그러고 또요.”
“주말에는 드라이브 삼아 근교에 여행도 가고요. 교외에 맛집들이 많지 않습니까? 점심 먹으러 한두 시간 드라이브하고 오는 거죠. 호숫가나 강가 산책도 하고.”
문 실장 말을 듣고 보니 아내와 할 일이 많았다.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것들이다. 민후는 지금이라도 다른 부부들이 하는 것들을 하나씩 다 해봐야겠다 생각했다. * 주말이 다가왔고 약속했던 장 보는 날이 되었다. 민후가 직접 운전하며 마트로 향했다.
“보통 때는 장은 누가 봤어?”
“도우미 여사님이랑 같이 올 때도 있고요. 제가 리스트 드리면 도우미 여사님이 혼자 다녀올 때도 있고요.”
카트를 끌고 함께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민후는 실제로 마트에 온 것은 처음이라서 모든 것이 낯설고 신기했다. 생각보다 매장이 너무 커서 놀라기도 했다. 잠깐 매장을 걷는데 부부들이 함께 카트를 끌고 다니는 모습이 많이 보였다. 꼬맹이를 카트에 태우고 다니는 단란하고 행복한 가족들이 많았다. 민후는 왜 아내가 이걸 하고 싶다고 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나란히 카트를 끌고 다니면서 필요한 물건들을 카트에 담는 것도 소소한 즐거움이 있었다.
“이 색이 좋아요, 이 색이 좋아요?”
시시콜콜한 색을 고르는 것부터 서로 좋아하는 브랜드를 알게 되었고 각자의 디자인 취향도 조금씩 알게 되었다. 민후는 주말마다 아내와 함께 마트에 와야겠다 생각했다. 맥주가 진열된 코너를 지나갈 때 민후는 비서실장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치맥 하면서 영화 보는 것도 해봐야겠다. 민후가 캔맥주를 종류별로 카트에 담았다.
‘맥주 좋아하는구나. 여러 가지 브랜드로 골고루 갖춰야겠다.’
맥주를 많이 담는 민후를 보며 은조는 그렇게 생각했다. 쇼핑을 끝내고 차에 짐을 싣고 집으로 돌아왔다.
“마트에서 함께 장 보는 거 생각보다 재미있네.”
운전하며 민후가 말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매주 가자.”
매주 가자는 말에 은조도 좋다고 대답했다. 함께 저녁을 먹고 민후는 서재에서 남은 일을 했다. 밤 9시가 조금 넘었을 때 민후가 은조에게 말했다.
“치킨 시킬까?”
“네? 치킨이요?”
은조가 의외라는 얼굴로 되물었다. 남편이 치킨을 먹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은조는 직원들과 간식으로 시켜 먹기는 했지만, 집으로 치킨 배달을 시켜 본 적은 없었다. 민후가 비서실장이 한 말을 떠올리며 말했다.
“치맥 하면서 영화 한 편 때리는 거 어때?”
은조의 눈이 더욱 커졌다.
‘영화 한 편 때리자고?’
민후가 저런 말을 사용하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늘 점잖고 예의 바르게 행동하고 말하던 사람이 저런 말투를 쓰니 은조는 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좋아요.”
맥주는 잘 마시지 못하지만 같이 영화를 보는 것은 좋았다.
“제가 치킨 주문할게요. 어떤 치킨 좋아해요?”
“난 잘 모르니까 당신이 좋아하는 거로 주문해.”
은조는 언젠가 친구 시은이 맛있다고 추천해주었던 치킨을 주문했다. 민후가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며 말했다.
“보통 부부들이 밤에 치맥 하면서 영화 보는 걸 즐긴다고 해서 한번 해보려고.”
민후가 이런 생각을 하는 줄은 몰랐던 은조는 기분이 좋아 배시시 웃었다. 은조 역시 그런 소소한 일상을 함께 즐기고 싶었던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래서 아까 맥주를 그렇게 많이 샀던 거군요.”
민후가 거실 벽면에 스크린을 내리고 있었다.
“와, 이런 것도 있었어요?”
집에 이런 게 있는 줄은 몰랐다.
“성능 좋은 스피커도 있어. 거실에 홈시어터 기능이 가능한데 나도 여유가 없어 한 번도 이것으로 영화를 본 적은 없어.”
커다란 스크린이 설치되고 5개의 스피커가 사방에 둘리니 영화관 같은 입체 음향이 재생되었다.
“영화는 당신이 보고 싶은 거로 골라.”
은조는 평소 보고 싶었던 영화를 하나 골랐다.
“와, 소리 엄청나요. 진짜 영화관 같은데요.”
마침 제시간에 치킨도 배달됐다. 먹음직스러운 치킨과 시원한 맥주가 테이블에 차려졌다. 거실에 조명을 끄니 영화관이 따로 없었다. 웅장한 서라운드 음향과 함께 영화가 시작되었다. 맛있는 치킨을 먹으며 그와 함께 영화를 보고 있으니 은조는 더 바랄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우리 영화관도 한 번도 안 가봤지?”
민후가 말했다.
“네.”
“거기도 한번 가보자.”
“네.”
은조가 수줍게 웃으며 치킨을 베어 물었다. 영화가 중반쯤에 다다랐을 때 남녀 주인공의 애정 씬이 나왔다. 남녀 주인공이 키스하기 위해 서로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영화는 긴장감이 흘렀고 은조도 덩달아 긴장되기 시작했다. 입술이 닿는 장면이 화면 가득 채워졌다. 키스하는 소리가 서라운드 입체 음향으로 온 거실에 울렸다. 촉, 촉. 야릇한 음향에 고개를 돌릴 수도, 침을 삼킬 수도,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돌처럼 굳은 두 사람이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서로를 의식하며 긴장했다.
얼마 전 민후와 침대에서 키스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은조는 빨리 키스 장면이 끝나기를 바랐다. 하지만 은조의 바람과는 달리 두 주인공은 더욱 깊은 스킨십을 이어갔다. 심지어 옷을 벗기 시작하자 은조는 도저히 민후와 함께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맥주!”
은조가 갑자기 소리쳤다. 민후도 은조만큼 긴장하고 있던 터라 깜짝 놀라며 쳐다보았다.
“맥주 더 마실 거죠? 더 가져올게요.”
은조는 자리를 피하고자 맥주를 더 가져올 생각으로 말문을 열었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목소리가 크게 나와버려 자신도 당황스러웠다. 은조가 일어나자 긴장했던 민후도 후우, 하며 크게 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이렇게 긴장되는데 아내와 잠자리를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 * 은조는 박물관으로 출근해 가을 특별 기획전 준비를 위해 자료를 보고 있었다. 어제 영화보다가 키스 장면에서 둘 다 바짝 긴장한 순간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함께 치킨 먹으면서 영화 보는 별것 아닌 일상이 왜 그렇게 행복했을까 싶다. Rrrrrr. 그때 할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은조는 굳은 표정으로 전화를 받았다.
“네. 할머니.”
[일하는 중이니?]
“네.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
인사하는 은조의 목소리는 딱딱하게 긴장되어 있었다.
[내가 안녕할 것 같니?]
돌아오는 대답은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3년만 위장 부부로 살다가 이혼하라고 했더니 마음대로 덜컥 임신이나 하고!]
은조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전화기만 들고 있었다. 윤 회장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귓가에 파고들었다.
[설마, 너 애 낳을 생각을 하는 건 아니지?]
은조가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병원 다녀와.]
“네? 병원은 왜…….”
[○○병원 양 선생님께 연락해놓았다.]
윤 회장이 말했다.
[거기 가서 애 지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