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어차피 아기도 만들어야 하는데2021.10.23.
명신제지 윤 회장의 집. 윤 회장은 은조가 임신했다는 소식에 계속 심기가 불편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괘씸하단 말이야!”
윤 회장은 팔짱을 끼고 입술을 잘근 씹어댔다.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그 계집애가 그럴 줄 몰랐네.”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하던 은조가 자신의 당부를 거역한 일은 처음이었다. 윤 회장은 쓰으, 소리를 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번에 만났을 때도 둘이 되게 데면데면했었는데. 분명히 서로 대화도 잘 안 했었단 말이야.”
계약서로 맺어진 혼인 관계이고 집에서도 각자의 공간에서 따로 생활한다고 들었다. 무엇보다 은조에게 이건 진짜 결혼이 아니니 대외적으로만 부부로 보이기만 하라고 당부했다.
‘강 전무는 결혼도, 여자도 관심 없는 사람이야. 너한테도 관심 없을 테니 다른 걱정은 안 해도 된다.’
이렇게 얘기했었다.
“강 전무도 은근 엉큼한 사람이었네.”
‘사람 마음은 바뀔 수도 있는 거니까요.’
“살다 보니 정이라도 생겼나?”
윤 회장은 고개를 내저으며 혼잣말했다.
“아니야. 분명히 은조 그년이 유혹했어. 육탄공세를 했겠지. 허!”
윤 회장이 코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애 낳아서 그 집에 눌러앉아 살려고?”
윤 회장이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그렇게는 안 되지. 그 자리는 원래 네 자리가 아니야. 넌 대타일 뿐이야.”
윤 회장이 서랍을 열어 안에 있던 액자 하나를 꺼내서 보았다. 액자 속 사진을 보는 윤 회장의 표정이 아련하게 변해갔다.
“원래 우리 유정이가 있어야 할 자리야.”
윤 회장은 사진 속 죽은 손녀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매만졌다.
“불쌍하고 가여운 것. 살날이 창창하게 남았는데.”
윤 회장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 . . 12년 전. <어젯밤 명신제지 부사장 일가족이 탄 승용차가 빗길에 미끄러져 가드레일을 받고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승용차에는 40대 명신제지 부사장 부부와 18세 딸이 함께 타고 있던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병원으로 옮겼지만 모두 사망했다는 소식입니다.> 병원으로 달려가는 차 안에서 윤 회장은 라디오 뉴스를 들었다. 눈물을 참느라 윤 회장의 눈가가 점점 시뻘게졌다. 남편이 일찍 죽는 바람에 자식이라고는 아들 단 하나였다. 그 아들이 낳은 자식도 딸 하나가 전부. 아들을 하나 더 낳았으면 하고 바랐지만, 며느리는 더 이상의 출산은 없다고 못 박았다. 하나 있던 손녀가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성격이 할머니를 닮았다고 주변에서 사람들이 그랬다. 자신을 닮아 더 예뻤던 걸까? 어릴 때부터 영재 소리를 듣고 자랐던 손녀는 윤 회장의 성취 욕구를 충족시켜주었다. 아들이 충족시켜주지 못했던 것을 손녀가 해준 것이다. 그렇게 애지중지 키우던 손녀였기에 안타까운 마음이 더했다. 아들 내외와 함께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도 아들이지만 손녀의 죽음에 심장이 찢겨나가는 것 같았다. 병원에서 확인한 손녀의 주검 앞에서 윤 회장은 오열했다. 그렇게 똑똑하고 재원이던 손녀가 아까워 죽을 것 같았다.
“차라리 이 늙은이를 데려가지! 이 아까운 애를 왜!”
늘 카리스마 있던 윤 회장의 오열에 측근들이 놀랄 정도였다. 장례를 치르고 한 달이 다 되어갈 때 윤 회장은 번쩍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아, 맞아! 그때 그 애!”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윤 회장은 십몇 년 전 일을 떠올렸다. 아들이 외도했던 여자가 있었다. 아이를 뱄다고 했었다. 밖에서 따로 만났던 그 여자는 총각이라 속인 아들에게 상처를 입을 대로 입었고 벼랑 끝에 내몰린 모습이었다.
“이거 갖고 애나 지워.”
돈 봉투를 던져주며 애를 지우라고 했었다. 그게 서로를 위해 깔끔한 해결방법이었다. 그 여자는 돈 봉투를 보며 상처 입은 마음에 소금을 뿌리느냐고 울면서 소리쳤다. 그길로 나간 여자는 혼자 애를 낳아 기른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다시 나타날 것 같지는 않아 윤 회장은 내버려두었다.
“이름이…… 송화라고 했었나?”
윤 회장은 눈을 반짝이며 혼잣말했다.
“그 애를 찾아야겠어.”
송화를 찾아내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때 낳았던 딸은 중학교 3학년이 되었다.
“네가 은조니?”
“네. 누구세요?”
“몇 살?”
“열여섯이요.”
“음. 우리 유정이랑 두 살 터울이구나.”
윤 회장이 은조를 찬찬히 뜯어보자 은조가 되물었다.
“누구신데요?”
“누구긴, 네 할머니지.”
“예? 할머……니요?”
엄마랑 단둘밖에 없었던 은조에게 호감을 끌어내는 건 쉬웠다.
“응. 그러니까 네 아빠의 어머니.”
“아……빠?”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뿌리를 궁금해하는 법이니까.
“아빠는 오래전에 돌아가셨다고…… 들었는데요.”
“아니야. 네 아빠는 한 달 전에 돌아가셨다. 네 엄마가 거짓말한 거야. 한 번도 네 아빠를 못 만나게 했니?”
사춘기 아이에게 믿었던 엄마에 대한 배신감을 끌어내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자, 이제 집에 가자. 원래의 네 집으로.”
사춘기 아이는 자신의 뿌리, 할머니가 내민 손을 고민하며 쳐다보았다. 윤 회장은 어서 잡으라는 듯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우리 유정이 자리를 채워줄 대용품이 필요해.’
. . . 윤 회장은 죽은 손녀의 사진을 보며 혼잣말했다.
“원래 우리 유정이랑 이어져야 했던 혼처였지. 유정이였으면 계약서를 쓰며 결혼하지는 않았을 거야.”
윤 회장이 부드러운 천으로 액자 유리를 천천히 닦았다.
“놓치기는 아까운 혼처였으니 대타로 보낸 자리였는데.”
유리를 닦던 윤 회장의 손이 멈칫했다.
“네까짓 게 제 분수도 모르고 임신을 해?”
3년만 살고 이혼하기로 민후와 계약도 했는데 민후가 마음이 바뀌었다고 하니 기가 찰 노릇이다.
“이러다 이혼 못 하고 쭉 사는 거 아니야?”
윤 회장은 대타로 들어간 은조가 한주 그룹 며느리 자리를 꿰차고 앉을까 봐 불안했다. 은조가 유정이 자리에서 대신 행복해지는 꼴은 못 볼 것 같았다. 은조는 유정이가 제게 해주지 못한 일들을 대신에 해줄 역할인 거지, 유정이가 누릴 수 있었던 걸 가로채어서는 안 된다. 불쌍한 유정이는 꽃도 못 피우고 그리되었는데, 유정이 대신 행복해지면 괘씸해 못 참을 것 같았다.
“안 돼. 애는 낳아서는 안 돼.”
윤 회장이 표정을 서서히 굳혔다.
“강 전무는 말이 안 통하니 은조를 따로 만나서 얘기해야겠어.”
비장한 표정의 윤 회장이 말했다.
“애를 지우라고 해야겠어.”
윤 회장이 입꼬리를 씩 올려 웃었다.
“은조는 내 말이라면 꼼짝 못 하니까.”
* 민후가 은조의 잠옷 리본 매듭 끝을 잡고 살짝 당겼다.
“자, 잠깐만요.”
은조가 민후의 손을 잡았다.
“오해한 것 같아요.”
“응?”
“부부가 하는 거, 잠자리라고 생각했어요?”
내려다보는 민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니야?”
“내가 마트 장 보는 거 하고 싶다고 얘기하지 않았어요?”
“뭐?”
“나는 그거 얘기한 건데.”
은조는 자신이 다른 부부들이 하는 거 하고 싶다고 말하고, 마트에서 장 보는 것을 얘기한 줄 알았다. 취기가 올라서 그랬는지 말했다고 착각했나 보다. 민후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했다. 부부들이 하는 게 마트에서 장 보는 거라니. 황당해서 말이 안 나왔다.
“그럼 진작 그렇게 얘기하지. 왜 헷갈리게 얘기해.”
“난 얘기한 줄 알았죠. 내가 실수했어요.”
민후는 어이가 없었다.
“물어보지도 않고 마음대로 해석한 민후 씨도 잘못이 없지는 않아요.”
“부부가 하는 거라고 하니 난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어.”
민후는 자신이 너무 음탕했나, 자책했다.
“어쨌든 오해해서 미안해.”
민후는 여전히 아내의 위에 엎드린 채 팔로 지탱하고 있는 자세였다. 은조는 너무 놀라 술이 확 깨는 것 같았다. 아이를 갖자고 합의는 했지만 갑자기 이런 분위기가 되니 긴장되고 두려워졌다. 마음의 준비란 것도 필요하지 않겠나. 은조는 남편이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으니 너무 민망했다. 남편의 두 팔 안에 갇힌 모습이라 몸을 돌릴 수도, 피할 수도 없어서 더 그랬다.
“저기, 좀 비켜 주시…….”
은조가 조심스레 말해도 민후가 움직이지 않았다. 민후는 아내를 진지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한번 그 생각을 했더니 민후의 몸 안에 있던 본능이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해 다시 물러서기 싫었다. 이대로 아내를 안아보고 싶었다. 키스도 나누고 맨살을 맞대고 서로의 따뜻한 체온을 나눠보고 싶었다. 하지만 민후는 불안함이 깃든 아내의 눈을 보고 결국 몸을 일으켰다. 아직은 아내가 부담감을 완전히 떨치지 못한 모습이었다. 민후도 잠옷 바지를 입고 침대에 누웠다. 오해로 인해서 분위기가 더 어색해졌다. 괜히 주변을 살피는데 아내가 늘 안고 있던 인형이 없었다. 이제부터 인형 없이 자자고 했더니 인형을 아예 치워버렸나 보다. 오늘 밤에는 아쉬움이 남았지만 아내도 친밀해지려고 노력을 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자, 팔베개해.”
민후가 팔을 뻗어 아내에게 팔베개를 해주었다. 품으로 아내가 들어오는 느낌이 좋았다. 민후는 어제 자다가 아내가 자신의 몸을 더듬었던 것을 떠올렸다.
“당신, 인형 코 만지면서 자던 버릇 있었어?”
은조가 눈을 들어 민후를 보았다.
“어떻게 알았어요?”
“자다가 젤리 코, 젤리 코, 하면서 찾던데.”
“아, 코가 젤리처럼 말랑해서 그렇게 불렀어요. 내가 자다가 찾았어요?”
“응. 그러면서 내 몸을 더듬었어.”
“미안해요. 조심할게요. 오늘도 또 그러면 손을 찰싹 때려요.”
밤이 깊어졌고 은조도 민후도 잠이 들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자 은조가 어김없이 손을 더듬었다.
“젤리 코…… 어디 있어.”
더듬더듬. 어둠 속에서 은조의 손이 민후의 복근을 쓱 쓰다듬었다. 손은 점점 위로 올라왔다. 민후는 오늘도 잠자기는 틀렸다고 생각이 들었다.
‘오늘도 또 그러면 손을 찰싹 때려요.’
아내는 오늘도 그러면 손을 치라고 했지만 예쁜 아내 손을 어떻게 때리겠나. 은조의 손이 민후의 가슴을 쓱 쓰다듬었다.
“아…….”
민후는 눈을 질끈 감으며 난감한 듯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어제도 몸이 서서히 반응해버렸는데 오늘은 더 폭발적으로 반응할 것만 같다. 아내와 잠자리를 할 생각을 잠깐 했다가 가까스로 추스른 탓에 지금도 본능을 꾹꾹 눌러 참고 있기 때문이다.
“후우.”
민후는 깊게 숨을 내쉬었다. 더는 참기가 힘들 정도로 온몸에 뜨거운 피가 흘렀다. 아무래도 또 찬물 샤워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일어나기 위해 팔을 천천히 뺐다. 그러다 은조가 잠에서 깨 눈을 부스스 떴다. 눈을 뜨고 저를 바라보는 아내와 눈이 마주치자 민후는 더욱 욕망에 휩싸였다. 너무 인내해서 그런가, 비몽사몽의 아내 표정이 요염해 보였기 때문이다.
“응? 민후 씨?”
아내가 잠에 취한 목소리를 내었다.
“안 잤어요?”
“응.”
“왜요?”
“왜 그런지 한번 봐.”
민후가 시선을 은조의 손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은조도 그의 시선을 따라서 옮겼다. 자신의 손이 남편의 가슴에 떡하니 올려져 있었다.
“어머!”
은조가 손을 확 떼어 냈다. 그때 잠도 달아났는지 그녀의 눈도 커졌다.
‘미쳤어. 내가 무슨 짓을…….’
인형 코를 만지고 자던 버릇이 있던 은조는 난감했다.
“이러는데 어떻게 자겠냐고.”
“미안해요. 인형인 줄 알았어요.”
안 만지겠다는 걸 보여주려는지 은조는 반대로 돌아누웠다. 돌아누운 은조를 보던 민후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그의 흉곽이 크게 부풀었다가 가라앉았다.
“그렇게 미안하다고 하면 끝이야?”
민후의 말에 은조가 뒤를 돌아보았다.
“네?”
“사람 흥분시켜놓고 돌아누우면 끝이냐고.”
남편이 화가 났나, 싶어서 은조는 민후를 빤히 쳐다보았다.
“내가 웬만하면 참아보려고 했는데.”
민후가 은조 쪽으로 돌아누우며 말했다.
“어차피 우리, 아기도 만들어야 하는데…….”
민후가 상체를 반쯤 일으키고 은조를 내려다보았다.
“말 나온 김에 오늘…… 할까?”
은조는 눈만 깜빡이며 민후를 쳐다보기만 했다. 무슨 의미인지 선뜻 이해하지 못한 눈치였다.
“부부가 하는 거. 그거 오늘 해.”
은조의 눈이 점점 커다래졌다. 남편이 말하는 부부가 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