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하고 싶다며? 부부들이 하는 거2021.10.19.
은조와 민후가 탄 차가 대형 마트를 지나고 있었다. 은조는 도우미와 마트에서 장을 볼 때 항상 부러웠던 것이 있었다. 주말이나 휴일에는 신혼부부들이 함께 장 보러 오는 경우가 많았다. 신혼부부가 카트를 같이 밀면서 장 보는 모습을 볼 때마다 은조는 그게 부러웠다. 제대로 된 연애 한 번 못 해 보고 결혼도 쇼윈도였던 은조 입장에서는 그 모습이 로망처럼 마음에 남아 있었다. 은조가 고개를 돌려 운전하는 민후를 보았다. 요즘 남편과 많이 가까워졌는데 함께 마트에 장 보러 가자고 말해볼까?
‘남편이 마트에서 장을 본다? 에이, 물어봤자 거절하겠지?’
잘 상상이 가지 않는 장면이었다.
‘대기업 전무님이나 되는 사람이 그런 일을 하겠어?’
그래도 은조는 취기가 올라서 그런지 왠지 모를 용기가 났다.
‘한번 말이나 해보는 거지, 뭐.’
“나, 하고 싶은 거 있는데. 말해도 돼요?”
취기 때문인지 혀짧은 소리가 났다. 민후가 설핏 웃는 것이 보였다.
“하고 싶은 거? 뭔데?”
“부부들이 하는 거, 우리도 해요. 하고 싶어요.”
은조의 말에 민후가 고개를 돌리고 쳐다보았다. 놀란 듯 눈이 커졌고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역시, 싫은 건가?’
은조는 괜히 말했나 보다 생각했다. *
‘부부들이 하는 거?’
당황한 민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부부들이 하는 거라고 하니 민후는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방금 아내가 술 냄새 나냐며 얼굴을 들이밀면서 아내와 다시 키스해보고 싶다고 생각한 탓인지 몰라도 머릿속이 온통 19금으로만 찼다.
‘부부가 하는 게 그거 말고 또 있나?’
아내를 보니 농담으로 한 말 같지는 않았다. 평소 장난이나 농담을 하는 아내가 아니기도 했고. 취기가 올라서 아내가 용기가 난 걸까?
“어, 언제? 오늘?”
은조가 생각하는 듯하다가 대답했다.
“음…… 모레 주말에 할래요?”
은조는 남편 쉬는 날에 마트에 가야 하지 않겠나 생각했다. 운전대를 잡고 있던 민후의 손에 땀이 차기 시작했다. 솔직히 아내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먼저 말을 꺼낼 줄은 몰랐다. 아내가 부담스러울 것 같아서 가까워진 다음에 시도할 생각이었는데.
“음. 난 좀 준비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당신이 원하면…… 좋아.”
은조가 고개를 돌리더니 물었다.
“무슨 준비요?”
“아직 덜 친해진 것 같아서. 더 좀 친밀해져야 덜 부담스럽지 않을까 해서.”
은조가 의아한 듯 빤히 쳐다보았다.
‘마트 장 보는 데 더 친해져야 하나?’
다른 부부처럼 우리가 진짜 연애해서 결혼한 사이가 아니라서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
“좋아. 주말에 해.”
민후가 말하자 은조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신난다. 나도 남편과 마트 간다.’
서로가 생각하는 부부들이 하는 것이 거리가 있는 것을 두 사람은 알아차리지 못하고 서로 다른 꿈을 꾸고 있었다. 민후는 미소 지으며 좋아하는 아내를 힐끔 쳐다보았다.
‘저렇게 좋아한다고?’
‘그럼 아내는 기다리고 있었던 건가?’
지금까지 아내가 부담스러울까 봐 좀 더 친해진 후에 자연스럽게 잠자리를 가지려고 했었다. 하지만 아내는 자신이 먼저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너무 아내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나, 하는 후회감이 들었다.
. . . 집에 도착해 차에서 내리는 데도 은조가 어지러워하며 비틀댔다.
“아.”
은조가 비틀대자 민후가 얼른 그녀의 허리를 잡았다.
“괜찮아?”
허리를 안은 탓에 그녀와 몸이 맞닿았다. 눈이 마주치고 안 그래도 홍조를 띠던 은조의 얼굴이 더 붉어졌다.
“괘, 괜찮아요.”
은조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려고 애쓰며 집으로 들어갔다.
‘아, 빨리 정신 차려야지. 냉수로 좀 씻어야겠다.’
은조는 곧장 씻으러 들어갔다. 민후는 집에 오자 생각이 복잡해졌다. 아내가 저렇게 원하는 게 있었는데 자신이 너무 천천히 다가가고 있었다는 생각에 이르자 더 늦출 필요가 뭐 있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
‘굳이 주말까지 미룰 필요가 있나?’
둘은 법적으로 부부이고 얼마 전 아이를 갖자는 합의도 한 상태다. 민후는 아내가 원하고 자신도 원하는데 미룰 이유가 없다 판단되었다.
‘당장 오늘……?’
그런 생각을 하자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냉장고를 열어 캔 맥주를 하나 꺼냈다. 생각만으로 몸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아 시원한 맥주를 들이켰다. 더 미룰 것도 없이 오늘 아내와 잠자리를 가져야겠다. Rrrrrr.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형 기현이었다. 형의 이름을 보자마자 민후의 눈썹이 꿈틀댔다. 아내가 형수가 준 무알코올 칵테일을 마시고 취기를 보인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민후가 굳은 표정으로 전화를 받았다.
“어, 왜.”
무뚝뚝한 말투로 전화를 받자 저쪽에서 툴툴댔다.
[전화 받는 본새하고는.]
“무슨 일이야.”
[아까 인사도 없이 가길래, 잘 들어갔나 궁금해서 전화했어.]
민후는 코웃음을 흘렸다. 형이 이럴 사람이 아닌데 언제부터 자신들을 걱정했다고 이러나 싶었다.
[제수씨는…… 괜찮아?]
기현은 예지가 임신부인 은조에게 술이 들어간 칵테일을 줬다고 하니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았나, 궁금해서 전화했다. 걱정이라기보다는 아내의 바람대로 혹시 진짜 아기가 잘못되지는 않을까 하는 약간의 기대감에서였다. 민후가 눈을 가늘게 하며 미간을 좁혔다.
“왜 갑자기 내 아내의 안부를 묻는 거야? 형이 언제부터 이런 걱정을 했다고.”
[아니…… 아까 보니까 좀 비틀거리는 것 같아서.]
민후가 코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아내가 비틀거렸어?”
[좀 그래 보이던데? 꼭 술 취한 사람처럼. 임신부가 비틀거리니까 걱정되어서 말이야. 지금 괜찮아?]
기현이 슬쩍 떠보듯이 물었다.
“괜찮아.”
[아…… 그래? 그럼 다행이고.]
다행이라는 말투에 어쩐지 실망감이 역력했다.
“형수가 아내에게 무알코올 칵테일을 줬다는데 그게 아무래도 좀 이상해.”
[뭐가?]
“내가 남은 거 맛을 봤는데 와인 맛이 느껴졌거든. 술이 좀 들어간 것 같던데.”
[무알코올 칵테일에 무슨 술이 들어가. 네가 착각한 거겠지.]
기현이 시치미를 떼자 민후가 픽 웃으며 말했다.
“형수가 일부러 술을 넣어달라고 한 건 아니고?”
[뭐? 야, 네 형수가 일부러 술을 넣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사람 모함하지 마라.]
기현은 도둑이 제 발 저리는지 오히려 큰소리를 냈다.
“아내가 술을 거의 못 해. 조금만 알코올이 들어가도 얼굴이 빨개지는데 오늘 딱 술 마신 증상이었어. 남은 칵테일에서 술맛이 나기도 했고.”
민후가 떠보듯이 말하자 기현이 더욱 흥분하며 화를 냈다.
[야! 그래서 지금 네 형수가 일부터 술을 넣었다는 얘기야? 엉?]
옛날부터 형은 자신이 수세에 밀린다 싶으면 더욱 큰소리로 화를 냈다.
[너 사람을 그렇게 모함하면 못쓴다. 제수씨가 실수로 옆에 있던 샴페인을 좀 마셨는지도 모르잖아. 아까 보니까 깜빡하고 샴페인 잔 들더구먼.]
형이 저렇게 펄쩍 뛰며 화를 낸다는 건 뭔가 찔리는 게 있다는 얘기였다. 심증은 있어도 물증이 없는 상황이라 민후는 더는 할 말이 없었다.
[제수씨 걱정 되어서 전화했더니만 괜한 사람을 의심하고 말이야. 네 형수가 너 이런 생각하는 거 알면 얼마나 서운하겠냐? 어? 재수 없는 새끼.]
기현은 적반하장으로 화를 내고는 전화를 끊었다. 눈에 뻔히 보이는 형의 모습에 민후는 코웃음을 흘렸다. 술 취한 모습 같다고 걱정되어서 전화했다는 의도부터 의심스러웠다. 범인은 반드시 현장에 다시 나타나 확인하는 것처럼. 아내가 진짜 임신이 아니어서 아무 이상은 없을 테지만 일부러 술을 넣은 게 사실이면 끔찍했다. 형과 형수는 아이가 잘못되길 바라는 거다. 형과 형수가 자신을 견제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런 끔찍한 생각까지 할 줄은 몰랐다.
‘지분 때문에?’
지주사 지분을 내게 빼앗긴다 생각하겠지. 형은 전부터 경영권 욕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냈으니까.
‘임신을 방해할 생각이라 이거지.’
민후는 심각한 얼굴로 캔 맥주를 마셨다. 가짜 임신을 진짜로 만들 계획이라 형 부부의 이런 방해가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민후는 기현만큼 경영권 욕심이 있었던 건 아니다. 형에게 지분이 가고 형이 경영 후계자가 되어도 크게 상관없었다. 하지만 아내가 진짜 임신이 되었을 때 이런 식으로 임신을 견제한다면. 아내가 위험에 빠지게 되는 건 용납할 수 없다. 그렇다고 지금은 가짜 임신이니 안심하라고 사실대로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럼, 나도 형을 견제할 수밖에.”
다 들이켠 맥주 캔을 꽉 움켜쥐어 찌그러트렸다. . . . 민후도 씻기 위해 욕실로 들어갔다. 아내가 잠자리를 원하니 주말까지 미룰 것도 없이 오늘 당장 잠자리를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민후는 떨리는 마음으로 평소보다 더 꼼꼼하게 씻었다. . . . 은조는 욕실에서 나와 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렸다. 따뜻한 바람을 맞으며 머리카락을 날리는 은조는 어느 때보다 행복한 표정이었다. 주말에 다른 부부들처럼 남편과 마트 장보기 갈 생각을 하니 이제 진짜 부부가 된 것 같았다. 그간 은조가 다른 부부들을 보면서 부럽고 은조도 해보고 싶었던 것들이 몇 가지 더 있었다. 날씨 좋은 날 공원에서 손잡고 함께 산책하는 부부들도 부러웠다. 산책도 하고 싶고 같이 골프도 치러 가고 싶었다. 은조는 그것들도 하나씩 남편에게 하자고 얘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남편과의 미래를 생각하니 행복해졌다. 잠옷으로 갈아입은 은조는 침대로 가서 누웠다. 습관처럼 인형을 안았다가 어제 인형 없이 자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던 남편의 말을 떠올렸다.
‘인형이 없으면 날 안고 자지 않겠어?’
그렇게 말하며 팔베개를 해주고 허리를 끌어안게 했었다. 남편 팔베개를 하고 누우니 무척 편하고 안락했다.
‘그래. 이제 진짜 부부처럼 지내야 하는데 이건 없어도 될 것 같아.’
은조는 일어나 장롱 속에 인형을 넣고 문을 닫았다. 다시 침대에 눕자 문이 열리고 남편이 들어왔다. 남편은 샤워하고 허리에 수건만 두른 모습이었다. 은조는 속으로 놀랐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얼른 시선을 돌리고 안 본척했다. 평소에는 잠옷 바지는 입고 침대로 오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수건을 두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은조가 이상하게 생각하며 남편을 보았다. 방금 샤워한 촉촉한 머리카락이 눈을 찌를 듯이 내려와 무척 섹시했다. 젖은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그의 너른 어깨로 떨어져 근육을 타고 주르륵 흘렀다. 남편이 다가오며 말했다.
“생각해보니 내일까지 미룰 필요가 뭐 있나 싶어서.”
“네?”
남편의 말을 이해하기 힘들어 은조가 되물었다.
“뭘요?”
민후가 팔을 짚으며 침대로 올라왔다.
“주말에 하자며. 미룰 것 없이 오늘 해.”
누워 있는 은조의 어깨 양옆으로 팔을 짚은 그가 엎드려 내려다보았다.
“왜, 왜 이래요?”
허리에 아슬아슬하게 수건만 걸치고 자신의 위로 올라탄 남편을 보며 은조는 당황한 목소리를 냈다.
“하고 싶다고 했잖아.”
“네?”
당황한 아내의 표정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부부들이 하는 거.”
“……?”
“부부관계.”
“……!”
은조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민후를 올려다보았다. 민후가 시선을 내려 아내의 잠옷을 보았다. 리본으로 묶인 것을 풀면 쉽게 벗겨질 것 같았다.
“어차피 아기도 빨리 만들어야 하니까.”
민후의 손이 은조의 잠옷 리본 끝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