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부부들이 하는 거2021.10.16.
예지가 칵테일을 들고 왔다.
“자, 무알코올로 부탁했으니 안심하고 마셔.”
“고마워요. 형님. 잘 마실게요.”
은조는 칵테일을 받아서 한 모금 마셨다. 은조가 눈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
“그런데 형님, 무알코올 맞아요? 쓴맛이 살짝 나는 것 같은데요.”
“무슨 소리야. 내가 만드는 거 직접 옆에서 지켜봤어. 술 하나도 안 들어갔어.”
예지가 시치미를 떼고 말했다.
“탄산수가 쓴맛처럼 느껴질 때도 있지.”
은조는 고개를 갸웃하며 칵테일을 마셨다. 평소 술이 약한 은조는 술을 아주 조금만 마셔도 금방 취했다. 칵테일을 거의 다 비워내니 은조의 얼굴이 홍조를 띠고 있었다.
“이상하네. 술 마신 것처럼 얼굴에 열이 나네.”
은조는 손등으로 볼을 꾹꾹 눌렀다. 약혼식이 한창 진행되었고 은조는 다정해 보이는 오늘의 주인공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에서 꿀이 떨어졌다. 서로 사랑해서 이렇게 많은 사람의 축복 속에서 결혼을 약속하는 약혼식. 저들은 지금 얼마나 행복할까 생각이 들었다. 은조는 행복한 예비 신랑, 신부를 보면서 자신의 결혼 과정을 떠올렸다. * 1여 년 전. 어느 날 할머니가 은조를 불러 앉혔다.
“이리 앉아라.”
은조는 발소리도 내지 않고 사뿐히 걸어 할머니 맞은편에 앉았다.
“너 결혼을 좀 해야겠다.”
은조가 놀라 고개를 들어 할머니를 쳐다보았다.
“너한테는 아주 과분한 사람이니까. 행운으로 알고.”
할머니가 계약서 한 장을 테이블에 올렸다.
“결혼해서 3년만 부부처럼 살다가 이혼하면 돼. 대외적으로 부부로 보이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진짜 결혼생활 한다고 생각하지 마라.”
결혼이란 단어만으로 놀라운데 그 내용은 더 가관이었다.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위장 부부라니.
“한주 그룹 둘째 아들이야. 강 회장이 둘째도 결혼시키고 싶어 해. 나도 한주 그룹과의 혼맥이 필요하기도 하고. 한주 가(家)에 들어가서 강 회장 그 양반한테 미운털 박히지 않게 잘해. 네가 잘해야 우리 집안도 예쁘게 보이는 법이니까. 알았니?”
천천히 고개를 드는 은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럼…… 결혼하면 할머니랑 같이 안 살아도 되는 거야?’
은조는 할머니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 이 정략결혼을 하고 싶었다. 결혼할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도 중요하지 않았다. 싫든 좋든 할머니가 결정했으니 성사될 결혼이니까. 어차피 은조의 의견 따위 들어볼 생각도 하지 않았던 할머니는 맞선 자리를 만들었다.
“나가서 조신하고 얌전하게 잘하고 와. 어차피 강 전무도 결혼이 필요한 사람이니 무르지는 않겠지만 이왕이면 그 사람 마음에 드는 게 좋지 않겠어?”
은조는 할머니 말대로 조신하게 차려입고 나갔다.
“한은조 씨?”
처음 보았던 남편 민후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은조가 지금까지 보아왔던 남자 중에 가장 잘생기고 멋있는 남자였다. 연예인보다도 훨씬 멋지고 매력 있었다. 배가 나온 땅딸보라 해도 상관없이 결혼했을 테지만 이렇게 멋있는 남자와 결혼이라니 할머니가 제게 선물을 준 것만 같았다. 거기에 민후는 배려가 깊고 신사다웠다.
“윤 회장님과 제가 계획한 일이지만 중요한 건 은조 씨 의견입니다. 은조 씨가 싫으면 이 결혼은 거부하셔도 됩니다.”
무엇이든 은조의 의사를 물었다. 무엇이든 당신 뜻대로 하는 할머니와는 대조되었다. 그래서 은조는 첫인상부터 민후가 마음에 들었다.
“저는 괜찮아요. 결혼하고 싶어요.”
은조의 대답에 민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살던 집에 들어와 살게 될 텐데 생활 공간은 따로, 각자 생활할 겁니다. 본가에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갈 거고 그때 가족들에게만 다정한 척 연기하면 됩니다.”
집에서는 따로 생활한다니 은조로서는 최고의 제안이었다. 결혼이라는 제도가 은조에게는 자유를 주는 셈이었다. 살면서 민후는 은조에게 많은 배려를 해주었다. 그녀에게 요구하는 것은 없었고 정중하게 부탁했으며 뭐든지 은조의 의사를 중요시했다. 강압적인 할머니에게서 자라온 은조는 배려심 깊은 민후에게 더 매력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겉으로는 무뚝뚝했지만 마음은 따뜻한 사람이라고 느껴졌다. 그렇게 조금씩 민후에게 자신도 모르게 빠져들었다. 선을 본 후 데이트 같은 것도 없었다. 그다음 본 게 상견례 자리였다. 거기서 중학교 동창이었던 예지를 만난 것은 의외였다. 은조도 놀랐지만 예지가 더욱 놀랐다. 중학교 때는 엄마와 살았었기 때문에 형편이 좋지 못했었다. 입고 다니던 옷, 들고 다니던 가방도 평범했던, 눈에 띄지 않던 학생이었다. 그런데 그 평범했던 애가 한주 그룹의 며느리로 들어온다니 예지로서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그 구질구질했던 은조 맞아?’
중학교 때와는 확연히 달라진 모습도 그랬지만 별 볼 일 없었던 애가 재벌가로 시집온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얘가 어떻게 우리 도련님과 결혼을 해?’
심지어 재벌가 자제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좋았던 민후와 결혼하다니 시기가 나서 미칠 것 같았다.
‘아니, 도련님은 눈이 대체 어디에 달린 거야! 어떻게 저런 평범한 애를 골랐지?’
그때부터 예지의 시기와 질투는 은조에 대한 견제로 이어졌다. 결혼식 때 웨딩드레스를 입고 민후의 팔짱을 끼고 행진했던 것이 남편과 처음 했던 스킨십이었다. 민후의 일정이 바쁘다는 이유로 신혼여행도 가지 않았다. 해방감만으로 좋아서 한 결혼은 그렇게 업무 처리하듯 기계적으로 진행되었다.
* 은조가 턱을 괸 채로 고개를 돌려 남편의 얼굴을 보았다. 지금은 남편을 좋아하게 되어서 그렇게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치렀던 결혼식 과정이 모두 아쉽기만 했다. 남편과 연애하고 결혼했다면 우리도 저렇게 꿀 떨어지는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결혼 준비를 하면서 설레기도 하고, 잊지 못할 신혼여행 가서 추억도 쌓았을 텐데. 이런 생각을 하며 은조는 씁쓸한 미소를 보였다. 민후가 자신을 보며 웃는 은조를 쳐다보았다. 얼굴이 술을 마신 사람처럼 발그레했다.
“어디 아파? 왜 얼굴이 빨개?”
은조가 손으로 볼을 감싸며 말했다.
“그렇죠? 얼굴 빨갛죠? 형님이 주신 칵테일, 분명 무알코올이라고 했는데…….”
민후는 은조가 마시다 만 칵테일 잔을 보았다. 민후가 남은 칵테일을 조금 마셔보았다. 아주 약하지만 씁쓸한 와인 맛이 느껴졌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분명 술이 들어간 것이다.
“이걸 형수님이 갖다 줬다고?”
민후가 시선을 돌려 예지를 보았다. 은조는 민후가 자기가 마시던 칵테일을 들고 마신 걸 보고는 소녀처럼 손으로 입을 가렸다.
‘어머, 그거 내가 먹던 건데…….’
남편이 자신이 먹던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마시는 것을 보니 왠지 친밀한 관계로 느껴져 심쿵했다. 그러고는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유치하게도 느껴졌다. 민후는 예지가 일부러 술이 들어간 걸 가져다준 것으로 느껴져 기분이 좋지 않았다. 사실 가짜 임신이라서 은조에게 아무런 영향은 없다. 하지만 형수와 형은 현재 아내가 임신한 거로 알고 있으니 그게 사실이라면 그냥 가볍게 넘겨서는 안 될 일이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집에 먼저 가자.”
민후가 은조를 일으켜 세웠다. 은조는 술 취한 사람처럼 휘청했다.
“어지러워. 왜 이러지? 꼭 술 마신 것 같아요.”
민후는 아내를 부축해 파티장을 나오면서 형과 형수를 노려보았다. . . . 예지, 기현은 은조를 부축해서 나가는 민후를 보았다. 자신들을 노려보며 가는 모습을 본 기현이 말했다.
“저 자식, 눈깔이 왜 저래? 지금 우리 째려본 거야?”
“음, 그래 보여.”
“미쳤나, 저 새끼가.”
예지는 술에 취한 듯 비틀거리는 은조를 보고 민후가 왜 노려보았는지 알 것 같았다.
“술 얼마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그 정도로 비틀거리고 그래?”
예지는 조소하듯 웃으며 말했다.
“무슨 말이야?”
묻는 기현에게 예지가 대답했다.
“사실은 아까 동서한테 준 칵테일, 거기에 내가 알코올 좀 섞어달라고 했거든.”
“뭐?”
“아주 쪼끔 넣었어. 쪼오끔.”
예지가 손가락을 모아 보여주며 말했다.
“임신했는데 술 마셔도 돼?”
“안 되지. 아, 몰라! 얄미워서 그랬어!”
기현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예지를 보았다.
“그러다 나중에 잘못되면 어쩌려고?”
“칵테일 한 잔 가지고 뭘 그래. 많이도 아니야. 진짜 조금 넣었다고.”
여전히 쳐다보는 기현의 눈치를 보며 예지가 짜증 내듯 말했다.
“솔직히 잘못되었으면 좋겠어! 안정기에 들기 전에 잘못되었으면 좋겠다고!”
기현은 처음으로 아내가 무서워 보였다. * 은조를 차에 태우고 집으로 향했다. 민후는 건배만 하고 샴페인을 마시지 않았기에 운전대를 잡았다. 은조는 자신이 술이 든 칵테일을 마신 줄도 모르고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는 생각만 했다. 남편과 단둘이 밀폐된 차 안에 있으니 어쩐지 가슴이 더 몽글몽글해지는 기분이다. 자꾸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가자미눈을 하고 남편 쪽을 보았다. 운전대를 잡은 손등 위로 굵은 핏줄이 도드라져 있는 것조차 멋있다. 부드럽게 코너링하는 수준급 운전실력도 멋있다.
‘남편이 너무 좋아. 꺄!’
은조는 손으로 자신의 볼을 감싸고 속으로 탄성을 질러댔다.
“아직도 취기가 안 가셔?”
은조가 볼을 감싸는 모습을 본 민후가 물었다.
“무알코올이라고 했는데 왜 취한 것처럼 어지러운지 모르겠어요. 술 냄새도 안 났거든요.”
“아무래도 형수가 칵테일에 술을 넣은 것 같아.”
운전하던 민후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
은조가 동그랗게 눈을 뜨고 쳐다보았다.
“당신도 꼭 술 마신 것 같다고 했잖아. 아까 남은 거 맛을 보니 약하게 와인 맛이 느껴졌어.”
“정말이요?”
은조가 놀라며 입을 벌렸다.
“나 임신한 거로 아는데 술을 일부러 넣었다고요?”
“일부러 넣은 건지, 바텐더의 실수인지는 알 수 없지만, 술이 들어간 건 확실해.”
“진짜 술이 들어갔나? 어쩐지 기분도 꼭 술 마신 것 같아요.”
“그런데 원래 술을 잘 못 마시나? 칵테일에 술이 들어가봤자 소량일 텐데.”
“술 잘 못 마셔요. 맥주 한 잔이면 취해요.”
“그 정도 주량이니 칵테일 마시고도 저렇게 와인 한 병 다 마신 사람처럼 얼굴이 빨개지지.”
“제 얼굴 많이 빨개요?”
은조가 두 볼을 감싼 채로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 보여 민후가 설핏 웃었다.
“그래. 꼭 만취한 사람 같네.”
민후가 농담으로 한 말에 은조가 입을 삐죽였다.
“진짜요? 나 그렇게 취해 보여요?”
취기가 올라서 그런지 아내가 오늘따라 귀여웠다.
“술 냄새도 많이 나요? 맡아봐요. 하아.”
은조가 민후에게 상체를 기울이며 입으로 입김을 불었다. 마침 신호에 걸려 차가 서 있었고 민후가 고개를 돌렸던 탓에 두 사람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민후가 흠칫 놀랐다. 키스할 것처럼 아내의 얼굴이 훅 다가왔기 때문이다.
“술 냄새 나요?”
은조는 자신에게서 술 냄새가 나는지에만 관심 있고 둘의 얼굴이 무척 가깝다는 건 눈치채지 못했다. 두 볼이 발그레한 아내의 얼굴이 예뻤다. 바로 코앞에 아내의 얼굴과 입술을 보자 민후는 아내와 키스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다시 키스해보고 싶었다.
“술 냄새 안 나.”
민후가 당황한 얼굴을 돌리며 대답했다.
“음, 다행이다.”
은조가 만족한 듯한 얼굴로 똑바로 앉았다.
“나, 하고 싶은 거 있는데. 말해도 돼요?”
은조는 취기 때문인지 평소보다 말이 많아졌다. 말투도 좀 어려진 것 같다. 민후는 아내의 색다른 모습이 싫지 않았다.
“하고 싶은 거? 뭔데?”
“부부들이 하는 거, 우리도 해요. 하고 싶어요.”
민후의 눈동자가 흔들리며 아내를 보았다. 부부들이 하는 거? 민후의 머릿속에는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