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몸속의 짐승을 깨울 것만 같아2021.10.12.
‘아, 이건 위험한데.’
민후는 난감한 얼굴로 아내를 보았다. 은조는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손가락으로는 ‘젤리’를 조물거리면서. 그녀의 손 때문에 민후의 몸이 점점 반응했다.
‘아, 미치겠네. 남자도 예민하다고.’
그냥 있다가는 몸속에 숨어 있던 짐승을 깨울 것만 같아 민후가 은조의 손을 잡아서 떼었다. 다시 그의 허리에 두르게 하고 민후는 후, 하고 심호흡을 했다.
“으음.”
그런데 다시 못된 손이 민후의 몸을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뱀처럼 스멀거리며 올라온 손이 기어이 또 젤리를 찾아냈다.
‘아, 은조야, 제발.’
민후는 그날 밤 몹시 고통스러운 인내를 해야 했다. * 다음 날 아침. 출근하는 길에 민후는 하품을 여러 번 했다. 아내 때문에 잠을 제대로 못 잔 탓이다. 심지어 몸이 반응해버려 자다가 새벽에 찬물로 샤워까지 해야 했다. 운전기사가 룸미러를 통해 민후에게 말했다.
“오늘 피곤해 보이십니다, 전무님. 잠을 못 주무셨습니까?”
“잘 못 잤습니다.”
“불면증입니까? 요즘 스트레스가 원인인 불면증이 많다고 하더군요.”
민후는 잠을 못 잔 이유를 떠올리다가 피식 웃었다. 인형을 못 안게 했더니 자신을 껴안고 자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인형의 코를 그렇게 만지면서 자는 버릇이 있는 줄은 몰랐다. 언제까지 인형의 코 대신 자신의 소중한 신체 부위를 내어주어야 할지 참 난감했다. 무엇보다 자신이 언제까지 그걸 참고 인내할지도 알 수 없었다. Rrrrrr. 민후의 핸드폰이 울렸다. ‘명신제지 윤 회장님’이라고 화면에 떴다. 의외의 발신자를 보고 민후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안녕하세요. 회장님.”
[강 서방, 출근하는 길인가?]
“네, 그렇습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이상한 소식에 잘 못 지냈어.]
“…….”
[사돈에게 임신 소식 들었네.]
“아, 네.”
아버지가 윤 회장에게까지 전화해서 자랑하셨구나.
[강 전무, 이건 계약에 없는 거잖아?]
민후가 표정을 굳혔다.
“임신해서는 안 된다는 조항도 없습니다.”
[3년간 위장 부부로 살다가 이혼하기로 합의해놓고 갑자기 임신이라니!]
윤 회장이 단호한 투로 말했다.
[이건 안 되네. 아이는 안 돼.]
“왜 안 됩니까?”
윤 회장은 손녀딸 대용품일 뿐인 은조가 재벌가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행복하게 사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 자리는 원래 진짜 손녀딸의 자리였을 테니까. 사업상 한주 그룹과의 혼맥이 필요해서 대용품인 은조를 결혼시켰을 뿐이다. 그래서 3년간만 살다가 이혼하고 그 집을 나오게 할 생각이었다.
[애 낳고 키우는 게 여자한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아? 그 가녀린 애가 배불러서 애 낳는 것 생각만 해도 걱정되네.]
윤 회장은 진심을 숨기고 은조를 위하는 척 거짓말했다.
[또 애 딸린 이혼녀가 될 텐데, 은조가 재혼이나 할 수 있겠냐고!]
아내를 위하는 척 말하는 윤 회장이 가증스러웠지만 민후는 내색하지 않았다.
“출산과 육아는 최대한 제가 도와줄 겁니다. 육아 도우미도 쓸 거고요. 그리고…….”
민후가 말을 잠시 끊었다가 말했다.
“이혼, 안 할 수도 있습니다.”
[뭐?]
윤 회장이 놀라 목소리를 높였다.
[이혼을 안 한다니? 무슨 소리야, 그게.]
“남녀가 살다 보면 정이라는 게 쌓이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건 안 되네. 이혼하기로 했으면 해야지.]
민후는 손녀를 굳이 이혼시키려는 윤 회장이 이해 가지 않았다.
“윤 회장님은 결혼으로 한주 그룹의 파트너십 혜택을 받으셨으니 목적은 이루신 거 아닙니까? 왜 손녀를 이혼녀로 만들려고 그러십니까?”
윤 회장은 할 말이 없었다.
[그, 그때 강 전무도 3년만 부부처럼 보이다가 이혼하는 걸 원했잖아! 결혼하기 싫은데 억지로 해야 하는 상황이라며!]
“사람 마음은 변할 수 있으니까요.”
윤 회장이 화를 숨기지 못하고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마음이 바뀌었다고 계약 조항을 무시해버리다니! 계약한 대로 기간 끝나면 이혼하는 거로 하세!]
민후의 꾹 다문 입매가 굳어졌다.
[사업하는 사람이 계약을 그렇게 우습게 보면 쓰나. 그렇게 알고 전화 그만 끊네.]
전화를 끊은 민후는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윤 회장이 임신을 반대할 거라 생각은 하지 못했다. 혼외자이지만 피가 섞인 손녀인데 대체 왜 저러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계약 결혼했지만 관계가 좋아져서 진짜 부부로 살면 할머니로서 더 환영해야 하는 거 아닌가? 민후는 아내가 윤 회장의 사업상 수단으로 쓰이는 것뿐 아니라 손녀로서 기본적인 사랑도 받지 못한다는 생각에 화가 났다. . . . 회사에 도착해 사무실로 들어가니 비서실장이 따라 들어왔다.
“좋은 아침입니다. 전무님.”
“네. 오늘 일정 어떻게 됩니까?”
비서실장이 태블릿을 들고 오늘 일정을 알렸다.
“오전 11시에 광고시사회가 있습니다. 오후에 다른 일정은 없고, ○○기업 회장님 손자 약혼식 초대장이 온 게 있습니다. 참석 못 하는 대신 축전과 함께 선물을 보낼까요?”
중요하지 않은 행사나 모임이라고 판단하면 비서실장이 알아서 처리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렇게 해요.”
민후는 노트북 화면을 보면서 대답했다.
“축전을 대신 써왔는데 한번 보시겠습니까? 수정할 부분이 있으면 말씀해주십시오.”
문 실장이 대신 쓴 축전을 책상에 올렸다. 민후가 내용을 읽어보다가 곰곰이 생각하는 모양새로 주먹 쥔 손을 턱으로 가져갔다. 약혼식과 식 후 이어지는 부부동반 프리이빗 파티에 초대장을 받았으나, 그에 참석 못 한다는 정중한 사과문이었다. 민후는 부부동반 참석 파티라는 말에 아내가 생각났다. 아내와 데이트할 핑곗거리가 더 생겼다.
“잠시만.”
민후가 손을 살짝 들어 말했다.
“약혼식에 간다고 전하세요.”
“네?”
문 실장이 고개를 쭉 빼고 물었다. 중요하지 않은 사교 모임에는 잘 가지 않는 민후였기에 문 실장은 의아했다.
“오랜만에 ○○기업 회장님도 뵙고 내년 해외사업에 관해 대화도 좀 나눌까 해서요.”
“아, 예.”
민후는 부부동반 사교모임이라 아내와 함께 가고 싶어 계획을 바꾸었다는 속엣말을 비서실장에게 하지는 않았다. * 은조가 오전 업무를 시작하고 얼마 있지 않아 남편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오늘 저녁에 시간 어때?]
메시지를 보자마자 또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오늘도 데이트하자고 하려나?
[시간 괜찮아요.]
[○○기업 회장님 알지? 전에 창립기념일 행사 때 인사드린 적 있어. 기억나?]
[네. 기억나요.]
[회장님 손자 약혼식 초대장이 왔어. VIP 지인들만 부부동반으로 초대해 간단하게 파티도 열리나 봐. 오늘 같이 갔으면 하는데.]
[네? 오늘이요?]
은조는 비즈니스 정장 차림의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았다.
[옷이 이래서 어떻게 약혼식 파티에 가요? 그냥 출근 복장인데.]
[적당한 파티복을 준비하라고 할게. 퇴근하고 디자이너 숍에 들렀다가 가면 될 것 같고.]
[네. 알았어요.]
의상 문제까지 해결되었으니 못 갈 이유가 없었다. 아니, 남편과 사교모임에 간다고 하니 오히려 들뜨는 기분이었다. 예전에도 사교모임에 몇 번 같이 간 적은 있었지만 그때는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쇼윈도부부의 임무만 충실히 하다 온 기억이 있다. 하지만 이번은 기분이 달랐다. 기대되고 설레는 기분이다. 남편과 데이트하는 상황이니까. 앞으로 진짜 부부처럼 지내보자고 한 만큼, 이런 소소한 일상들을 남편과 함께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니 은조는 마음이 들떴다. * 퇴근하고 파티복으로 갈아입기 위해 디자이너 숍에 들렀다.
“급하게 연락드려 죄송합니다.”
“마침 해외에서 공수한 칵테일 드레스가 오늘 와서 준비할 수 있었어요. 사모님에게 어울릴 것 같은데 갈아입어 보시겠어요?”
은조는 피팅룸에 들어가 드레스를 입었다. 몸매를 드러내는 붉은색의 드레스는 조명에 따라 빛이 나는 소재였다. 어깨를 드러낸 디자인이어서 은조의 하얗고 긴 목이 돋보였다.
“어머, 사모님. 이거 딱 사모님 옷이네요. 전무님, 어떠세요? 사모님 너무 아름답지 않나요?”
칭찬을 아끼지 않는 직원의 말에 민후가 고개를 돌렸다. 표정이 늘 한결같던 민후의 눈이 조금 커다래졌다. 저 정도 변화는 그가 많이 놀랐다는 증거다. 아내가 차려입은 모습을 몇 번 본 적이 있었지만 오늘이 특히 아름다웠다. 붉은 드레스가 하얀 피부의 그녀와 무척 어울렸다. 하얗고 긴 목 아래로 반듯하게 뻗은 빗장뼈. 무릎까지 오는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적당한 치맛단 아래로 쭉 뻗은 다리까지 완벽한 모습이었다. 민후도 턱시도를 입었다. 턱시도 입은 그의 모습은 중세의 귀족 같은 모습이었다. 서로의 모습에 반해버린 듯 마주 보는 두 사람의 눈이 반짝였다. 미소를 보이는 얼굴은 들뜨고 설렘이 가득했다.
“가실까요?”
민후가 장난스럽게 말하며 팔을 내밀자 은조가 수줍게 웃으며 그의 팔을 잡았다.
두 사람은 민후의 운전기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약혼식이 열리는 호텔 파티장으로 갔다. 지인만 초대한 약혼식이라도 손님이 꽤 많이 있었다.
“강 전무. 오셨습니까? 이렇게 친히 축하하러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회장님 안녕하십니까? 손자분 약혼 축하드립니다.”
민후는 기업 회장과 그의 부인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저의 아내입니다. 예전에 한 번 인사드렸었죠?”
“안녕하세요. 축하드립니다.”
“고마워요.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축하 인사와 함께 인사를 나누는데 부사장이 말했다.
“강 대표님 내외분께서도 오셨는데 보셨습니까?”
강 대표라면 기현을 말하는 거였다. 민후와 은조가 고개를 돌리자 기현과 예지가 사람들과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시선이 느껴졌는지 기현과 예지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민후와 은조를 발견하고 두 사람의 얼굴이 싹 굳었다. 회장님으로부터 지분 10%를 받았다는 소식을 들은 뒤라, 동생을 보는 기현은 심기가 뒤틀리려고 했다. 기현과 예지가 다가왔다.
“형님, 안녕하세요.”
은조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은조의 모습을 훑어본 예지의 눈이 놀라 커지더니 표정이 점점 굳었다. 자신과 같은 붉은색의 드레스를 입었는데 은조의 드레스가 훨씬 예뻤다. 하필이면 예지가 구하려고 노력했지만, 자신에게는 기회가 돌아오지 않아 포기하고 있던 드레스라서 더 짜증이 났다. 예지가 다가오며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드레스 너무 야한 거 아니야? 임신부가 이런 천박한 드레스 입어도 돼? 이렇게 높은 하이힐까지 신고. 삐끗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예지는 겉으로 걱정하는 척하며 깎아내렸다. 은조는 기분이 나빴지만 현재 임신한 척 연기는 계속해야 해서 생글생글 웃으면서 대답했다.
“너무 야해요? 디자이너 선생님께서 이걸 준비해주셔서 그냥 입었는데. 형님 드레스 우아하고 예뻐요.”
누가 봐도 은조의 드레스가 더 예뻤다. 예지는 자신과 똑같은 붉은 드레스라서 더 비교되어 짜증 났다.
“음. 만이천 불짜리 뉴욕에서 공수했어.”
“어쩐지. 형님 안목이 있으세요.”
예지는 생글거리며 제 비위를 맞추는 은조가 짜증 났다. 은조의 드레스를 곁눈질로 쳐다보며 뒤돌아섰다. 약혼식이 시작되고 축하하기 위해 각자의 자리에 샴페인이 놓였다.
<모두 잔을 들고 건배를 해주세요.>
사회자 말에 은조는 현재 임신 연기 중인 걸 깜빡 잊고 샴페인을 잡으려고 했다. 그때 예지가 말했다.
“동서 술 마시면 안 되는 거 아니야?”
“아, 참. 깜빡했네. 큰일 날뻔했네요.”
은조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물 잔을 대신 들었다. 옆에 있던 민후가 은조 앞에 있던 샴페인 잔을 옆으로 치우며 말했다.
“나도 깜빡했어. 못 챙겨줘서 미안해.”
은조는 최대한 태연한 척하며 물 잔을 들고 건배했다. 예지가 눈을 가늘게 흘기며 생각했다.
‘괜히 얘기했나? 그냥 깜빡하고 술 마시게 놔둘걸.’
예지는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임신 초기에 술 마시면 아주 치명적이겠지?’
음험한 표정을 짓던 예지가 은조에게 다정한 척 말했다.
“동서, 그러면 내가 저쪽 가서 무알코올 칵테일 만들어달라고 할게. 물만 마시기 좀 그렇잖아.”
“정말요? 감사해요, 형님.”
“응. 잠깐 기다려.”
예지는 바텐더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은조는 웬일로 예지가 자발적으로 칵테일을 만들어 가져다주나 생각했다. 예지는 바에 도착해 바텐더에게 말했다.
“상그리아, 무알코올도 되고 알코올도 가능하죠?”
“네. 그렇습니다. 상그리아로 만들어드릴까요?”
“네. 알코올 조금 섞어주시겠어요? 최대한 티 안 나게 달콤하게 만들어 주세요.”
“단 와인 조금 넣어 만들어드리겠습니다.”
예지는 고개를 돌려 은조를 힐끔 보고는 비릿한 미소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