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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사전키스 예고제 (8/100)

8. 사전키스 예고제2021.09.28.

남편의 팔짱을 끼고 걷는 건 처음이다. 아니다. 생각해보니 결혼식에서 한 번, 한주 그룹 창립기념일 행사에 갈 때 사람들 앞에서 한 번 꼈던 적이 있었다. 그때보다 지금이 가슴이 두근거리는 건 그에 대한 감정이 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걷는 속도는 여유가 있는 데 반해 은조의 심장은 평소보다 빠르게 뛰었다.

1655188032135.png“이 길을 이렇게 걷는 건 처음이야. 차 타고만 지나다녔지.”

16551880321356.png“난 직원들하고 점심 먹으러 나올 때 늘 걷긴 했어도 이렇게 걷는 건 처음이에요.”

유명한 돌담길을 처음 걸어본다는 민후의 말에 은조가 말했다. 이렇게 데이트 명목으로는 은조도 처음이었다. 늘 걷던 길이 처음 걷는 것처럼 새로워 마음이 들떴다. 은조는 우산이 자신에게 많이 기울어진 것을 발견했다. 보니 민후의 한쪽 어깨는 비에 제법 젖어 있었다. 자신에게 기울어진 우산을 보며, 그의 마음이 자신에게 기운 것 같아 설렜다. 단순 배려일지도 모르지만, 그의 따뜻한 마음에 가슴이 더 두근댔다. 은조가 기울어진 우산대를 바로 세웠다.

16551880321356.png“민후 씨도 써요. 비 맞잖아요.”

1655188032135.png“난 괜찮아. 당신 옷이 얇아서 비에 젖으면 감기 걸려.”

우산을 가지고 서로 양보하다가 민후가 우산을 다른 손으로 바꿔 들며 말했다.

1655188032135.png“그럼 안쪽으로 더 들어와.”

민후가 팔을 둘러 은조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어깨에 닿은 그의 손에 움찔 놀란 것도 잠시. 가볍게 감싼 그의 손이 조금 더 강하게 끌어당겼다. 그러자 은조의 어깨와 팔이 민후의 몸에 밀착되었다. 슈트가 벌어져 드러난 얇은 셔츠에 은조의 팔이 닿아 그의 따뜻한 체온이 몸에 느껴질 정도였다. 은조가 다소 놀라 비스듬히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지만, 민후는 앞만 보고 그녀의 어깨를 잡고 걸었다. 그에게 반쯤 안긴 상태로 돌담길을 말없이 걸었다. 투두둑. 투두둑. 우산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크게 들렸다. 두근대는 심장 소리와 함께 타악기를 연주하는 듯했다. 어깨에 닿은 그의 손이 무척 뜨거웠다. 비가 와 싸늘한 공기 때문인지 그의 체온이 더 뜨겁게 느껴졌다. 심장은 아까보다 두 배로 빨리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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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돌담길을 걷다가 민후가 예약한 레스토랑으로 갔다.

1655188032135.png“권 매니저에게 예약했습니다.”

입구에서 예약자 이름을 묻는 직원에게 말하자 바로 VVIP인 것을 알아채고 매니저가 부리나케 뛰어왔다.

16551880321384.jpg“어서 오십시오, 전무님.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쪽으로.”

매니저가 공손하게 허리를 굽히며 팔을 뻗었다. 안내받은 VIP룸에서 보이는 전망이 훌륭했다. 넓은 창으로 보이는 도심의 현란한 불빛들이 보석가루를 뿌려놓은 듯 빛이 났다. 앞에 앉은 민후와 그의 뒤로 펼쳐진 야경은 마치 하나의 그림처럼 잘 어울렸다.

1655188032135.png“메인은 송아지 안심으로 예약했고 주문은 내가 알아서 할까?”

16551880321356.png“네. 그렇게 해주세요.”

민후가 손을 슬쩍 들자 웨이터가 다가왔다.

1655188032135.png“애피타이저는 관자를 올린 프로슈토. 샐러드는 새우를 곁들인…….”

민후는 메뉴 북을 천천히 넘기며 하나씩 주문했고 웨이터가 메모지에 빠르게 적었다. 요즘은 웬만한 곳은 태블릿으로 주문하던데 이곳은 아직 아날로그 방식을 고수하는 것 같았다. 은조는 이런 아날로그 방식이 오히려 더 정감이 가서 좋았다.

16551880321384.jpg“와인은 어떤 거로 할까요?”

1655188032135.png“와인은 됐습니다.”

아내가 현재 임신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니 이런 것들도 조심해야 했다. 은조는 꼼꼼하게 주문하는 민후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의 말투 하나, 손짓 하나하나가 품위 있었다. 그가 걸치고 있는 명품 슈트나 금장의 커프스나 천만 원이 넘는 시계보다 그의 말투, 매너, 전체를 아우르는 분위기가 럭셔리했다.

16551880321356.png‘멋있다.’

이런 감탄사가 속에서 절로 나왔다. 은조는 조금 전 그에게 반쯤 안긴 채로 돌담길을 걸었던 순간을 떠올렸다. 팔에 느껴지던 그의 체온을 생각하니 가슴이 간질거리며 두근댔다. 자신의 남편이 이렇게 완벽한 남자여서 그를 만난 것이 참 행운이란 생각이 들었다.

1655188032135.png“진작 이런 시간을 좀 가질 걸 그랬어.”

냅킨을 펼쳐 무릎에 깔면서 민후가 말했다.

1655188032135.png“계약서를 쓰고 한 결혼이라 하더라도 그렇게 남처럼 살 필요는 없었는데 말이야.”

민후는 지금이라도 아내와 더 가까워질 수 있게 된 것이 좋았다. 아내와 함께 지낼 미래를 생각하면 자꾸 마음이 들떴다.

1655188032135.png“지금부터라도 보통 부부처럼 지냈으면 해.”

16551880321356.png“네.”

은조가 바라던 이야기였다. 보통 부부처럼 지내자는 말에 은조는 기쁜 마음을 애써 감추며 대답했다.

1655188032135.png“그래서 말인데.”

민후가 머뭇거리다 말을 이었다.

1655188032135.png“별내동에 계시는 어머니도 찾아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데.”

은조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민후와 살면서 친모의 존재를 언급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16551880321356.png“어, 엄마요? 엄마를 어떻게 민후 씨가…….”

결혼 당시 윤 회장님은 은조가 혼외자라는 사실을 숨겼었다. 하지만 민후도 정보력은 꽤 있었기에 은조가 사생아였다는 정보를 입수했고 그 사실을 알고 결혼했다. 그녀는 살면서 자신의 과거를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었다. 그저 며칠 전 그녀가 혼외자로서 힘들었던 과거를 잠깐 얘기한 적이 있었다. 민후는 그 얘기를 들은 후 비서를 통해 은조의 친모에 대해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그 후, 그녀의 친모 최송화 씨는 꽃집을 운영하며 혼자 생활하고 있었고 형편이 그리 좋지 못하다는 것을 보고받았다.

1655188032135.png“당신 모르게 내가 좀 알아본 게 있었거든. 얘기 안 하고 알아봐서 미안해.”

그가 대기업의 임원이고 마음만 먹으면 뭐든 알아낼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사실을 잠시 망각했다. 속이는 것 같아 죄책감이 없지 않아 있었는데 그가 알고 있는 게 오히려 속 시원했다.

16551880321356.png“할머니가 싫어하세요. 저도 못 만나게 하는걸요.”

할머니가 엄마를 만나지 못하게 해 은조는 몇 년째 엄마를 보지 못했다. 고등학생 때 몰래 만나고 왔던 날에는 할머니에게 맞기까지 했다.

1655188032135.png“윤 회장님 몰래 가서 장모님 뵙고 인사라도 드려야 하지 않을까? 내가 사위라고?”

16551880321356.png“안 돼요.”

은조가 단호하게 말했다.

16551880321356.png“할머니가 아시면 노발대발하실 거예요. 민후 씨에게는 뭐라고 못 하겠지만 엄마한테 찾아가서 또 괴롭힐 거예요. 민후 씨가 찾아가서 장모님이라고 불렀다가는 어디서 장모행세냐고 엄마를 괴롭힐 거예요.”

은조는 할머니가 어떻게 나올지 뻔히 보였다.

16551880321356.png“민후 씨는 그냥 모른 척하세요. 그게 엄마도, 저도 편하게 사는 방법이에요.”

체념한 듯한 은조의 목소리에 민후는 가슴이 아팠다. 친모를 만나지도 못하고 있을 거라는 건 생각지도 못했다. 생각보다 윤 회장이 아내를 통제하고 억압하는 것이 심해서 내심 놀랐다. 그동안 겪었을 아내의 고통이 조금 짐작이 되자 분노가 차올랐다. 민후는 윤 회장으로부터 아내를 보호해야겠다는 결심이 더 굳어졌다. 띠링. 그때 테이블에 올려둔 은조의 핸드폰에 메시지가 와서 은조가 핸드폰을 보았다.

16551880383126.png[너 남편이랑 우산 쓰고 걷는 거 봤어. 되게 다정하더라. 데이트 잘해.]

친구 시은의 문자였다. 은조가 픽 웃으며 핸드폰을 내려놓자 민후가 물었다.

1655188032135.png“무슨 좋은 소식이야?”

16551880321356.png“아뇨. 친구가 보낸 메시지 보고 웃었어요. 아까 돌담길 걷는 거 봤다고 데이트 잘하라고요. 내일 가면 놀리겠다.”

1655188032135.png“친구가 봤다고?”

16551880321356.png“친구가 박물관 카페에서 일해요. 퇴근하면서 봤나 봐요.”

1655188032135.png“몰랐네. 친구가 박물관에서 일하는 줄은.”

16551880321356.png“제 절친이에요. 민시은이라고, 중학교 때부터 친구예요.”

민후가 의외라는 듯 눈썹을 들었다가 내렸다.

1655188032135.png“대국산업 둘째 딸이 절친인 줄 알았는데.”

16551880321356.png“아, 그 언니도 친하긴 한데 진짜 절친은 이 친구예요.”

1655188032135.png“그 친구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 같네.”

16551880321356.png“그럴 거예요. 파티에 오는 친구가 아니니까.”

재벌 2, 3세 자제들이 모이는 바자회나 파티에서 종종 서로의 지인을 소개받기는 했었다. 하지만 그런 재벌 집 자제들은 할머니가 사귀어두라고 해서 알고 지내는 지인일 뿐이고 진짜 친구는 시은이 뿐이었다. 민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1655188032135.png“당신에 대해 모르는 게 많아. 좀 더 알고 싶어, 당신에 대해.”

은조가 시선을 들어 민후를 보며 속으로 말했다.

16551880321356.png‘나도 알고 싶어요. 당신에 관한 모든 것이 궁금해요.’

1655188032135.png“이제 천천히 알아가자.”

은조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남편과의 미래가 어떻게 변할지 기대되었다. * 식사를 끝내고 집으로 향했다. 민후가 직접 운전했고 은조는 조수석에 앉아서 갔다.

16551880321356.png“덕분에 저녁 맛있게 먹었어요.”

1655188032135.png“앞으로 종종 외식도 하고 그러자.”

처음으로 했던 아내와의 데이트는 즐거웠다. 마주 앉아 식사한 게 다지만 그냥 같이 시간을 가진 것 자체가 행복했다. 민후는 이제야 진짜 부부처럼 지내는 것 같아서 좋았다. 민후의 핸드폰이 울려서 보니 발신자는 회장님이었다. 운전 중이었기에 민후는 차내 스피커로 연결해 통화했다.

1655188032135.png“네. 아버지.”

16551880321384.jpg[오늘 일찍 퇴근했던데, 집이냐?]

1655188032135.png“아뇨. 아내와 밖에서 외식하고 집에 들어가는 길입니다.”

16551880321384.jpg[그래? 새아가가 뭐가 먹고 싶다고 했어? 뭐 먹었는데?]

강 회장은 임신부인 은조가 먹고 싶은 음식이 생겨 외식했다고 생각했다.

1655188032135.png“스테이크 먹었습니다.”

16551880321384.jpg[고기가 땅긴대? 아들이려나? 하하.]

차내 스피커로 강 회장의 웃음소리가 크게 울렸다. 여전히 손주 볼 생각에 저렇게 들떠 있는 회장님 목소리를 들으니 은조는 다시 마음이 무거워졌다.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죄책감의 무게가 이렇게 클 줄 몰랐다.

16551880321384.jpg[임신했을 때 먹고 싶다는 거 안 사다주면 그 서운함이 평생 간다더라. 네 엄마도 그랬어. 겨울에 수박이 먹고 싶다는 거 못 사줬더니 그 잔소리를 네 엄마 돌아가실 때까지 평생 들었다. 너는 그러지 말고 새아가 먹고 싶다는 거 다 구해다 줘.]

회장님의 며느리를 위하는 마음을 직접 들으니 은조는 더욱 죄책감이 들었다. 절로 고개가 숙어졌다. 민후가 그런 은조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16551880321384.jpg[알아들었어? 왜 대답이 없어?]

1655188032135.png“예. 알겠습니다.”

16551880321384.jpg[그래. 새아가 늘 조심하라고 이르고 혹시 필요한 거 있으면 얘기하고.]

1655188032135.png“예.”

16551880321384.jpg[그래. 들어가라.]

전화가 끊어지고 적막이 흘렀다. 회장님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빠른 임신이 불가피했다. 은조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둘 다 그 생각을 하니 부담감이 밀려왔다. 한참을 말없이 운전하던 민후가 말했다.

1655188032135.png“남녀 관계에서 그…… 진도라는 거 있잖아.”

은조가 고개를 돌려 민후를 보았다.

1655188032135.png“좀 빨리 나가는 게 좋겠어.”

진도를 빨리 나가는 게 좋겠다는 말에 민후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이를 가지려면 스킨십의 진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1655188032135.png“보통 손잡고, 포옹, 키스. 순차적으로 하지 않나?”

그는 잠을 자기 위해서는 단계별로 진도를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스킨십이 없던 부부이다 보니 갑자기 잠자리를 갖는 것은 아내에게 부담이 될 거로 생각했다.

1655188032135.png“우린 아직 키스도 못 해봤으니까.”

은조는 이런 대화가 너무 민망했다. 창밖만 쳐다보는 은조를 민후가 힐끔 쳐다보았다.

1655188032135.png“오늘은.”

민후가 말을 잠시 끊었다가 이었다.

1655188032135.png“키스까지 해보자.”

순간 은조는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키스라는 단어에 온몸이 경직된 느낌이다. 그와 키스라니. 그것도 사전키스 예고제. 민망하고 어색한 정적이 차 안을 가득 메웠다. 도저히 고개를 남편 쪽으로 돌릴 수가 없었다. 가슴도 미칠 듯이 쿵쿵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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