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남편과 첫 데이트2021.09.25.
잠결에 은조의 손이 민후의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잠이 설핏 들었던 민후가 눈을 번쩍 떴다. 아내가 자신의 맨몸을 더듬고 있었다. 당황해 잠이 확 달아났다. 습관대로 벗고 잔 것이 이런 결과를 낳을 줄은 몰랐다. 아내가 이런 잠버릇이 있는 걸 알았다면 불편하더라도 옷을 입고 잤을 텐데. 민후는 난감해하며 은조를 보았다. 안고 있던 인형을 놓치고 그것을 찾느라 손을 더듬는 것이었다. 아내가 민후의 몸을 더듬다가 이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안을 게 없으면 잠을 못 잔다더니. 아내는 자신을 인형으로 착각하고 안은 것 같았다. 은조는 민후의 허리를 끌어안고 다시 평온하게 잠들었다. 민후는 팔을 올린 채로 그대로 굳은 듯이 숨도 쉬지 못했다. 아내의 얼굴이 가슴 쪽에 닿아 그녀의 호흡이 느껴졌다. 움직이면 아내가 잠에서 깰까 봐 밤새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하지만 설레고 기분 좋은 밤이었다. * 은조는 오늘따라 오랜만에 숙면해 개운한 기분으로 잠에서 깼다.
“으으음.”
기지개를 켜려고 팔을 들어 올리는 순간. 은조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팔로 머리 뒤를 받치고 있는 남편과 눈이 딱 마주쳤다. 자신이 안고 있는 것은 인형이 아니라 남편의 몸이었다. 그것도 벗은 맨몸을.
어쩐지 평소보다 되게 따뜻하더라. 화들짝 놀란 은조가 남편에게서 확 떨어졌다.
“어머!”
내가 왜 남편을 안고 자는 거지? 은조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미안해요. 이, 인형이 어디 갔지?”
당황한 얼굴로 괜한 인형 핑계를 대며 이리저리 고개를 돌렸다.
“인형 바닥에 떨어졌어.”
민후의 말에 바닥을 보니 진짜 인형이 떨어져 있었다.
“어머, 잠결에 놓쳤나 봐요.”
은조가 바닥에 떨어져 있던 인형을 주우며 말했다. 인형이 없다고 남편 몸을 안고 자다니.
“미안해요.”
“뭐가 미안해.”
당황한 은조에 반해 민후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마치 늘 그렇게 안고 잤던 부부처럼.
“갑자기 안아서 당황했죠?”
민후가 은조를 가만히 보다가 대답했다.
“이제 그런 거에 익숙해져야지, 우리.”
민후가 이불을 걷고 일어나며 말을 이었다.
“곧 잠자리도 가져야 하는데.”
곧 잠자리도 가져야 하는데, 라는 말에 은조의 얼굴이 붉어졌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와 같은 침실을 사용하는 것조차 상상하지도 못했는데 그와 밤을 보낸다는 생각에 부끄러웠다. 민후가 욕실로 들어가고 은조는 손으로 가슴을 꾹 누르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가 던지고 간 말 한마디에 어제 그와 합의했던 것이 떠올랐다. 익숙해져야 한다는 말이 은조를 아침부터 두근거리게 했다. 조만간 크게 변화될 그와의 관계가 긴장되기도 하고 설레기도 했다. . . . 출근 준비를 끝낸 민후가 드레스룸에서 나왔다. 그의 몸을 감싸는 슈트핏이 완벽했다. 은조는 슈트 입은 남편 민후의 모습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노출 하나 없이 몸을 가렸는데도 불구하고 슈트를 입은 그의 모습이 무척 섹시하다고 느꼈다. 은조도 출근 준비를 끝내고 거울을 보며 귀걸이를 달고 있었다. 민후가 다가와 말했다.
“오늘 일찍 퇴근해?”
“네. 특별한 일은 없어요.”
“그럼 밖에서 식사도 좀 하고 시간을 보낼까?”
은조가 민후를 쳐다보았다.
“아직은 어색한 게 남은 것 같아서 말이야.”
민후가 말을 이었다.
“일종의 부부데이트 같은 거지.”
데이트……? 선을 보고 결혼할 당시도 데이트라 할 만한 시간을 보낸 기억이 없었다. 할머니가 결혼하래서 했고 할머니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아 한 결혼이었다. 그와 데이트라니. 단어만으로 설렜다.
“좀 더 친해져야 하지 않겠어?”
그는 데이트를 임신을 위한 준비 단계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은조는 좋았다.
“네. 그래요.”
“퇴근하고 박물관으로 데리러 갈게. 같이 외식해. 예약은 내가 할게.”
현관으로 향하며 그가 덧붙였다.
“특별히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메시지 보내. 취향은 당신한테 다 맞출 테니까.”
“특별히 먹고 싶은 건 없어요. 알아서 예약해주세요.”
“그러지.”
* 은조가 운전하며 출근하는 길이었다. 은조는 박물관에서 전시를 기획하는 학예사로 일하고 있었다. 오늘 퇴근하고 그와 밖에서 따로 만난다는 약속 때문에 그런지 출근하는 길이 왠지 기분이 좋았다. Rrrrrr. 전화벨 소리에 핸드폰 화면을 본 은조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화면에는 ‘할머니’라고 찍혀 있었다. 은조가 굳어진 얼굴로 전화를 받았다.
“네. 할머니.”
[어디니?]
“출근하는 길이에요. 운전 중이에요.”
운전 중이라 길게 통화 못 한다는 말을 둘러서 했다. 그런 이유 따위 신경 쓰지 않는 할머니란 것을 뻔히 알지만.
[너 정신이 있는 애야?]
“네?”
[사돈한테 얘기 들었다. 임신했다며!]
아…… 아버님이 할머니에게까지 자랑하셨나 보다. 은조는 난감한 듯이 이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너 미쳤어? 임신이라니! 2년만 더 살다가 이혼할 애가 무슨 임신이야!]
카랑카랑한 할머니 목소리에 은조는 인상을 썼다.
[그리고 그런 소식을 내가 사돈한테 들어야겠니? 내가 얼마나 창피했는지 알아?]
화가 나면 늘 저렇게 흥분한 목소리로 소리를 질러댄다.
[친정 할머니인 내가 다른 사람보다 소식을 늦게 들어서 되겠어? 너 왜 나한테 얘기 안 했어?]
사실은 그게 진짜가 아니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거짓임신을 진짜로 만들기로 어제 민후와 합의했기 때문이다.
“죄송해요. 어떻게 될지 몰라서. 확실해지거든 말씀드리려고 했어요.”
은조는 아직 조심스러워 말 못 했다고 둘러댔다.
[너 참 맹랑한 애구나? 너, 무슨 생각으로 강 전무랑 잔 거야? 네가 덤벼들어 유혹했지?]
할머니가 손녀딸에게 할 거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말을 했다. 진짜 임신은 아니지만 임신한 손녀에게 저렇게 버럭 소리를 지르는 사람이 할머니라고 할 수 있나?
[강 전무가 그럴 사람은 아니야. 강 전무는 결혼도 여자도 관심이 없었어. 너지? 네가 덤볐지? 여자가 덤비는데 안 넘어갈 남자가 있겠어?]
여과 없는 막말에 은조는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진짜 잠자리를 가진 적도 없고 지금 임신한 것도 아니니.
[헤픈 년 같으니. 내가 너 때문에 창피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잖아!]
일방적인 막말을 쏟아붓고 전화는 끊어졌다. 대체 뭐가 그렇게 창피하다는 건가? 뭐든 할머니가 시키는 대로 다 했는데? 할머니가 하지 말라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친구도 사귀지 말라고 한 친구들과는 멀어지고 할머니가 사귀라는 친구들로 새로 사귀었다. 처음엔 제가 어려서 그렇겠지 생각했다. 하지만 은조가 성인이 되어서도 할머니의 간섭은 끝이 없었다. 어릴 때는 왜 할머니가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강요했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할머니가 화내는 게 무서웠다.
‘너는 이제 최 씨가 아니야! 한 씨 집에 들어왔으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해!’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해서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나중에 알게 되었다. 할머니는 은조를 하나밖에 없던 죽은 손녀딸처럼 만들고 싶었던 거였다. 그녀는 은조를 죽은 손녀딸의 대용품으로 생각했다. 하나밖에 없던 손녀딸이 아들 내외와 함께 사고로 죽고 난 뒤 유일하게 남아 있던 핏줄이 혼외자였던 은조였다. 은조 친모가 은조를 가졌을 당시, 윤 회장은 매몰차게 그녀를 내쳤었다. 은조의 엄마는 상처만 가득 안고 혼자서 은조를 낳고 키웠다. 15년이 지나고 은조의 친부인 명신제지 사장 내외와 무남독녀 딸이 사고로 같은 날 죽었다. 할머니는 그제야 은조를 찾았고 유전자 검사를 통해 한 씨 집안 핏줄인 것을 확인했다. 할머니는 당장 은조를 저택으로 데리고 갔다. 은조의 친모는 형편이 어려워 남들 다 다니는 학원도 못 보냈기에 제대로 교육해 유학까지 보내주겠다는 윤 회장의 말에 은조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를 따라간 은조는 할머니의 교육방식대로 키워졌고 할머니의 과한 간섭 속에서 할머니가 원하는 것만 할 수 있는 아이로 컸다. 말을 잘 들어야 나중에 엄마와 함께 살 수 있다는 회유와 협박에 은조는 반항 한 번 하지 못했다. 학예사 일도 은조가 원해서 하는 일은 아니다. 시간이 흘러 알게 되었다. 죽은 배다른 언니의 전공이 역사학이었고 언니의 꿈이 박물관 학예사가 되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은조가 죽은 언니 대신 학예사가 되기를 원했다. 은조는 할머니의 꼭두각시처럼 살아왔다. 점점 할머니에게 정신적으로 지배되고 할머니와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두려울 정도까지 되었다. 그래서 강요로 하게 된 정략결혼은 은조의 숨통을 트여줄 유일한 탈출구였다. 그렇게 만나게 된 남편은 할머니와 달리 매너 있고 신사다웠다. 은조가 호감을 느끼게 된 건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이제 할머니에게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 계약이 끝나도 이혼하고 싶지 않다. 할머니가 원하는 죽은 언니의 삶을 대신 살아가는 것이 아닌,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인생을 스스로 선택해보고 싶었다. . . . 출근한 은조는 박물관 내 카페에 들렀다. 매일 아침 카페에 들러 커피를 한잔 사서 사무실로 들어가는 것이 루틴이었다.
“좋은 아침.”
카페 주인 시은이 웃으며 인사했다. 카페 주인은 은조의 절친 중학교 동창 친구였다. 박물관 내 카페 입점 입찰 때 은조가 넣어보라 권해서 운 좋게도 친구가 입찰 되었다. 물론 할머니 몰래 유지하는 유일한 찐친이었다. 일하는 공간에 친한 친구가 있어 은조는 그나마 숨통이 트였었다. 친구가 커피를 내리면서 말했다.
“오늘 신작 영화 개봉 많이 하던데 같이 영화 볼래?”
친구 말에 은조는 오늘 저녁 민후와의 약속을 떠올렸다.
“미안. 오늘 선약 있어.”
“약속? 누구랑?”
“남편이랑 같이 외식하기로 했어.”
“응?”
친구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은조가 남편과 따로 밖에서 만나는 것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웬일로? 오늘 무슨 날이야? 결혼기념일?”
“아니.”
고개를 저은 은조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냥 데이트.”
그 말에 친구의 눈이 더 커졌다. 부부가 데이트하는 것이 이상할 것은 아니지만, 은조에게는 저런 일이 한 번도 없었던 것을 안다. 거의 할머니에 의해 반강제로 한 정략결혼이라는 것을 친구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은조에게서는 남편에 관한 얘기나 일화들을 거의 들은 적이 없었다.
“데이트?”
친구가 놀리듯이 일부러 톤을 높여 말했다. 은조는 테이크아웃 커피를 들고 배시시 웃으며 돌아섰다. 친구에게 이런 말을 하는 순간이 신기하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남들 보기에 평범해 보이는 일상이 자신에게는 특별한 이벤트처럼 처음이었기에. * 퇴근 시간이 거의 다 되어 남편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지금 출발했어. 폐관시간에 맞춰 도착할 거야.]
문자를 받고 은조는 콤팩트를 꺼내 화장을 점검했다. 박물관을 나가니 비가 오고 있었다. 일기 예보엔 비 소식은 없었는데, 생각하며 사무실로 돌아가 우산을 챙겨올까 잠시 고민했다. 그때 박물관 앞에 남편의 차가 보였다. 눈에 안 띄려야 안 띨 수 없는 슈퍼카여서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은조를 본 민후가 운전석에서 내렸다. 데이트라고 직접 운전해 온 모양이었다. 민후가 우산을 펼쳐서 은조에게로 걸어왔다. 우산이 없는 은조를 보고 직접 데리러 오고 있었다. 남편이 딱 벌어진 어깨와 균형 잡힌 몸매로 런웨이를 걷는 모델처럼 걸어왔다. 그의 몸을 감싼 고급 슈트는 황금비율의 그의 보디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힐끔거리는 주변의 시선은 아랑곳없이 그는 은조만을 주시하며 다가왔다. 앞까지 다가온 민후를 보고 은조가 그의 우산 밑으로 들어갔다. 은조는 순간 당황했다. 우산 아래 함께 서 있는 것이 생각보다 그와 가까웠기 때문이다. 시선이 마주치자 서로의 얼굴과 얼굴 사이 거리가 20cm 정도밖에 안 되는 느낌이었다. 당황해서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들어와. 비 맞아.”
그러자 민후가 우산을 그녀에게 기울이며 자신이 한 발짝 다가갔다. 단지 우산 하나 같이 썼을 뿐인데 그와 밀폐된 좁은 공간에 있는 느낌이었다. 민후가 비 오는 풍경을 보며 말했다.
“저기 돌담길이 데이트 코스로 유명하지?”
은조가 일하는 박물관 옆에 고궁이 있었다. 고궁의 돌담길은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의 클래식 같은 거였다.
“같이 걸어볼까?”
돌담길을 걸어보자는 말에 은조는 희미하게 웃었다.
“네.”
두 사람은 우산 하나를 같이 쓰고 비 오는 돌담길을 걸었다. 점심 먹으러 나오면서 수없이 걷던 길을 그와 함께 걸으니 새로웠다. 지금 이 순간이 그와의 첫 데이트이기 때문이다.
“비가 오니 더 운치 있네.”
천천히 걷던 민후가 말했다. 돌담 위 기와에 맺힌 빗방울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그가 말했다. 은조는 동조한다는 듯이 말없이 그와 속도를 맞추며 걸었다. 그냥 말없이 걷고만 있는데도 이상하게 긴장되었다. 좁은 우산 속에서 걸을 때마다 그와 팔이 닿았다. 반소매 원피스 차림인 은조는 팔에 그의 슈트가 닿을 때마다 움찔거리며 놀랐다. 그럴 때마다 은조가 옆으로 비켜 걸으니 민후가 우산을 은조 쪽으로 기울였다.
“내 팔을 잡는 게 어때?”
은조가 불편해하는 것을 눈치챈 민후가 말했다. 은조가 우산 든 그의 팔을 잡았다. 우산 속에서 팔짱을 낀 연인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