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처음 보는 남편의 몸2021.09.14.
그 여자가 했던 말이 모두 거짓이라는 말에 은조는 어둠이 걷히고 빛이 비추는 느낌이었다.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던 무언가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마음이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은조의 표정이 서서히 밝아졌다.
“정말이에요?”
그의 말이 진짜라면 여자의 일방적인 얘기만 듣고 혼자 오해하며 괴로워했다는 얘기다. 남편과 함께 찍은 사진 때문에 의심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아기 초음파 사진은 뭐예요?”
“그거야 나도 모르지. 진짜 임신한 게 맞는다면 다른 남자의 아이일 거고. 아니라면 어디서 구한 거겠지.”
민후가 짧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할 얘기 있다고 전화한 게 그것 때문이었어?”
은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망상증 환자의 얘기에 놀아난 기분도 들고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하지만 남편이 외도하지 않았다는 사실에는 깊은 안도감이 들었다.
“서로 오해가 풀어져서 다행이야.”
민후가 이어 말했다.
“나는 당신이 정말로 임신을 한 줄 알고 식사 내내 얼마나 마음을 졸였다고.”
민후는 아내가 다른 남자를 만나고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졌다는 끔찍한 일이 현실이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녀의 임신 소식에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모른다. 지옥과 천국을 급행으로 오간 기분이다. 그녀가 외도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이렇게나 안도하고 기쁜 게 믿어지지 않았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자신이 그녀를 마음에 얼마나 깊이 품고 있었는지 새삼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민후가 은조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아내의 얼굴은 아직 눈물 자국이 그대로였다. 눈화장이 번져 눈가가 귀여운 판다 곰처럼 되었다. 눈물의 의미가 뭘까?
‘그래도 임신은 좀 선을 넘은 것 같아요.’
이렇게 말하며 그녀는 울음을 터트렸다. 민후는 아내가 자신을 계약으로만 엮인 무늬만 남편이라고 생각하는 줄 알았다. 그동안 거리를 두며 생활했기에 형식적인 관계로 여긴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내도 자신처럼 우리 관계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 민후는 마음이 왠지 들떴다. 나처럼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어 눈물이 쏟아졌던 건가? 민후는 이번 해프닝으로 아내의 속마음을 엿본 것 같아 뭔가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녀도 자신처럼 저를 좋아하는 게 아닐까, 하는 설레는 의심까지 품게 되었다. 집으로 오면서 은조는 그제야 자신이 저지른 일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아버님이 제가 임신했다고 오해하시는데 어떡하죠?”
은조는 임신이 아니라고 어떻게 알려야 할지 막막했다. 민후는 자꾸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운전하면서 피식 웃는 민후를 보며 말했다.
“왜 웃어요. 지금 심각한데.”
근심 걱정 어린 은조의 표정과는 달리 민후는 가볍게 웃기까지 했다. 그저 아내가 외도한 게 아니라는 사실이 기쁘고 아내도 자신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설레기만 했다.
“그러게 왜 그 자리에서 사실대로 말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던 거야?”
은조가 표정을 굳히더니 갑자기 말이 없었다. 민후가 시선을 돌려 은조를 쳐다보았다. 평소 실없는 농담도 잘하지 않는 아내가 사람들이 오해하도록 가만히 있던 것이 조금 의아했다.
“화가 많이 났어요.”
은조는 시선을 반쯤 내려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생각할수록 자꾸 화가 나서 나도 모르게 말실수를 했어요. 그런데 수습할 새도 없이 아버님이 너무 기뻐하셔서 망설여졌어요. 당신이랑 대화도 하기도 전에 혼외자가 생겼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어요. 아이가 미리 사생아로 낙인찍히는 것도 원치 않았고요. 배 속에 아이가 있다면 이혼하는 게 맞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이혼할 생각을 했다는 말에 민후가 그녀를 쳐다보았다.
“나만 빠지면 그 여자랑 결혼해서 그 아이는 사생아가 아닌 한주 그룹 첫 손주가 되겠지. 그러면 나처럼 사생아로 태어나 위축되고 기죽으며 살아가지 않아도 되겠다.”
의외의 대답에 민후는 조금 놀랐다. 그녀가 명신제지의 혼외자였던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 부분에 대해 스스로 언급하며 얘기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런 생각 하면서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망설이는데 당신이 들어온 거예요.”
그녀의 얘기를 들은 민후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남편의 내연녀가 나타나 아이를 뱄다는 말에 배 속 아이를 생각하는 본처가 세상에 어디 있을까? 자신처럼 사생아로 힘든 삶을 살아갈 아이를 생각했다는 아내의 말이 민후는 가슴 아팠다.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아왔으면 이런 상황에 상간녀 배 속에 있는 아이를 생각할까? 할머니인 명신제지의 회장님 앞에서 위축되어 있던 아내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의 아픔이 느껴져 민후는 가슴이 찡하게 아팠다. 민후는 명신제지 회장님의 제안으로 계약 결혼했지만, 그녀와 진짜 부부가 되고 싶었다. 언젠가부터 그녀가 마음속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그녀가 원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거리를 두며 살았다. 애써 선을 지키며 살아왔을 뿐 그녀와 진짜 부부로 살아가며 가정을 꾸리고 싶었다. 그런 제 마음을 숨기며 살아왔는데 이제 아내에게 조금씩 다가가도 될 것 같다. 오늘 그녀와의 관계에서 희망이 보였다. 어쩌면 그녀도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죠? 아버님께 어떻게 얘기해요?”
은조는 걱정 가득한 한숨을 푹 쉬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는 수밖에. 오해한 일이 있었다고 얘기해야지.”
“그렇게 많이 좋아하셨는데, 어떻게 말씀드려요, 정말 죄송한 일이에요.”
“내가 말씀드릴게. 실망하실 아버지를 생각하면 많이 죄송스럽지만, 방법이 없잖아.”
운전대를 잡은 민후가 혼잣말하듯 말했다.
“임신이 아니라고 하면 형과 형수가 많이 좋아하겠네.”
민후가 밥 먹으면서 본 기현의 얼굴을 떠올리며 픽 웃었다.
“아까 형의 썩은 표정은 볼만했는데.”
민후는 형의 표정과 옆에 앉은 아내의 귀엽게 붉어진 눈가를 생각하며 아내가 진짜 임신을 했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 예지와 기현도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어휴, 분해!”
예지가 주먹을 불끈 쥐며 인상을 썼다.
“어떻게 내내 조용히 있다가 임신했다는 소리를 하지? 진짜일까, 여보?”
예지는 은조의 행동이 의심스러웠다. 자신에게 그런 경사스러운 소식이 있다면 본가에 도착하자마자 자랑하듯 얘기했을 텐데 은조는 지나가는 말처럼 슬쩍 흘렸기 때문이다.
“좀 이상하지 않아?”
“진짜겠지. 아기 초음파 사진 봤잖아.”
기현도 짜증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민후 자식, 아버지 앞에서 자기는 별 욕심 없다는 듯이 무표정한 얼굴로 일관하는 거 봤어?”
기현이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지주사 지분 떠올리면서 속으로 쾌재를 불렀을 텐데.”
기현이 혀를 쯧, 찼다.
“재수 없는 녀석.”
사실 사업수완에 관해서는 민후보다 기현이 한참 뒤처졌다. 그룹의 임원들도 민후가 차기 회장에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아직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지주사의 지분을 누가 확보하느냐에 따라 판가름 난다고 볼 수 있었다.
“여보, 아버님이 진짜 지분 넘기실까요? 그때 그냥 농담처럼 한 얘기일 수 있잖아요.”
예지는 남편이 후계자 자리에서 영영 멀어질까 불안했다.
“아버지는 그런 거로 농담하지 않아.”
기현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면 너무 불공정한 처사야. 우린 불임 치료를 받는 부부이고 저쪽은 이제 결혼 1년 된 신혼인데 우리가 임신에 불리한 건 뻔하잖아.”
“당연하죠, 여보.”
예지도 맞장구를 쳤다.
“출발선부터 다른 게임이라고요. 이런 거로 후계 구도에 중요한 지분을 주네, 마네 하는 건 아니라고 봐요. 당신이 아버님께 그 얘기 좀 해봐요.”
“그럴까?”
기현이 눈을 반짝이며 예지를 보았다.
“네. 지주사 지분은 절대 안 돼요!”
“아버지가 한 번 뱉은 말은 잘 주워 담지 않는데, 들어주실까?”
“우리가 불리한 조건인 건 맞잖아요. 이건 미리 서방님을 후계자로 내정해두고 하신 말씀인 거나 다름없죠. 불공평해요.”
“그래. 얘기해봐야겠어.”
기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당신은 병원에 다녀왔어? 뭐래?”
기현이 예지를 보며 물었다.
“이번 달에 다시 시험관아기 시도해 보자고 하더라고요. 당신도 같이 가야 해요.”
“알았어.”
기현이 짧은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예지는 은조의 임신 소식에 매우 기뻐하는 강 회장을 보며 시기가 나서 죽을 뻔했다.
“여보, 아직 실망은 일러요. 만약 시험관아기 성공해서 쌍둥이를 낳으면 아버님이 우리한테 두 배로 주실지 누가 알아요?”
* 집으로 돌아온 민후와 은조는 익숙한 듯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화장대 앞에서 화장을 지우며 은조는 상기된 자신의 얼굴을 발견했다.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마음이 한결 가볍고 콧노래가 나올 것만 같다. 남편이 외도하지 않았다는 걸 알고 난 후 은조는 안도감이 들었다. 그동안 가슴을 옥죄던 답답한 감정이 싹 사라졌다. 경솔하게 오해했던 것이 창피했지만 어쨌든 남편이 자신을 배신하지 않았다는 거다. 은조는 방에 딸린 욕실에 들어가 샤워기 아래에 섰다.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물을 맞으며 그간 감정의 소용돌이가 쳤던 시간을 상기했다. 남편이 다른 여자를 안고 있는 상상을 잠깐 했는데 가슴이 쿵쿵 뛰면서 몹시 불쾌했다. 이 일을 계기로 은조는 남편에 대한 자신의 감정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다. 호감 정도 있다고 생각했던 남편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그리 가볍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도 모르게 좋아하고 있었던 걸까? 은조는 남편의 모습을 떠올렸다. 187cm의 훤칠한 키에 헬스나 수영, 스쿼트, 골프 등 운동으로 다져진 날렵한 몸매. 짙은 눈썹에 깊은 눈매와 날카로운 턱선은 가끔 숨이 막힐 듯이 멋있어 보였다. 무뚝뚝하기는 해도 언제나 예의 있게 행동하던 그를 보며 무척 매력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계약 결혼이기는 해도 저런 남자가 자신의 남편이란 사실이 감사했다. 아침 출근 전에 셔츠 차림의 그는 단추가 금방이라도 튕겨 나갈 것처럼 셔츠 앞이 팽팽했다. 가슴 근육이 얼마나 발달했으면 그럴까? 이런 상념에 빠졌다가 은조는 화들짝 놀랐다. 어머,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남편의 몸을 생각하다니. 갑자기 얼굴에 열이 오르는 느낌이었다. 은조는 샤워기에서 찬물로 머리를 식혔다. 샤워를 끝내고 은조는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젖은 머리는 수건으로 감싼 채 음료를 꺼내려고 주방으로 갔다. 주방 옆에 있는 욕실 문이 딸깍 열렸다. 은조는 안방의 욕실을 사용하고 민후는 거실 쪽의 욕실을 사용했다. 욕실 문이 열리고 더운 수증기와 함께 민후가 나왔다. 그가 허리에 수건만 두른 모습으로 욕실에서 나온 것이다.
“헉! 깜짝이야.”
“놀랐어? 미안.”
갑자기 나와서 놀란 게 아니라 벗은 남편의 모습을 처음 봐서 놀란 것이다. 가슴이 쿵 내려앉더니 심장이 빨리 뛰었다. 얼굴도 화르르 달아올랐다. 얼른 고개를 딴 데로 돌리는 은조의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처음 본 남편의 벗은 몸에 사춘기 소녀처럼 얼굴이 붉어진 것이 창피했다. 한집에 살아도 생활 공간이 따로여서 한 번도 벗은 몸을 본 적이 없다는 것도 사실 신기했다. 그만큼 그가 철저하게 선을 지키며 계약 관계를 유지했다는 얘기다. 당황하는 은조와 달리 민후는 별로 놀라지 않는 눈치다.
“음료수 좀 마시려고요.”
당황한 은조는 괜히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하면서 냉장고로 가서 음료수를 한 병 꺼냈다. 온 신경은 수건만 두르고 있는 민후에게로 쏠렸다. 왜 빨리 방에 안 들어가고 서 있는 거야? 음료수를 컵에 따르는 지극히 일상적인 행동이 괜히 긴장되고 손이 다 떨렸다. 방금까지 남편 생각을 하고 나온 탓에 떨리는 손을 보며, 제 마음을 들킨 것만 같아 더 긴장되었다. 그런데 방으로 들어갈 줄 알았던 민후가 은조 뒤로 따라와 정수기에서 물을 받아 마셨다. 그가 가까이 오자 은조는 심장이 더 두근두근했다. 평소 같았으면 이렇게 마주쳤을 때 남편은 거리를 지키며 방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왜 오늘은 저렇게 벗은 채로 마주쳤는데도 태연하게 더 가까이 다가오는 걸까? 꿀꺽꿀꺽, 냉수를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등 뒤에 벗은 몸의 남편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은조는 심장이 진정되지 않았다.
‘나라도 빨리 들어가야겠다.’
주방을 나가려고 뒤돌아선 은조의 눈앞에 살 색이 가득했다. 남편의 맨몸과 마주쳤다.
“아. 미안해요.”
하마터면 그의 맨몸과 부딪힐 뻔해 옆으로 비켜 가려고 하는데. 민후도 하필 같은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콩. 얼굴에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이 닿았다.
‘앗! 이를 어째.’
그의 가슴과 어깨 근처에 입술이 닿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