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당신의 아이를 가졌대요2021.09.11.
“아버님도 곧 손주 보실 거예요.”
모두 놀라 쳐다보았다.
“뭐?”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말이 나와버려 은조도 흠칫 놀랐다. 어머, 방금 내가 뭐라고 그런 거야? 은조는 자신도 모르게 나와버린 말에 놀라 손으로 입을 가렸다.
“새아가, 좋은 소식 있냐?”
강 회장이 은조를 향해 목을 쭉 빼고 물었다. 저 기대하는 얼굴. 강 회장의 표정은 근래에 보았던 표정 중에 가장 밝았다. 저렇게나 아기를 바라고 계셨구나. 은조는 강 회장을 보며 속으로 말했다. 진짜 손주 보시게 됐어요. 아버님. 비록 제가 낳지는 않을 거지만요. 조만간 이혼하고 그 여자랑 결혼하면 정식 손주가 되는 거겠지? 나만 빠지면 모든 것이 완벽해질 예정이었다. 하지만 은조는 남편과 이혼 얘기도 나누지 않은 상황에서 남편에게 내연녀가 있고 혼외자가 생겼다는 얘기는 이 자리에서 하고 싶지 않았다. 왜 갑자기 그런 말이 툭 튀어나온 거야! 은조는 경솔한 자신의 입을 원망했다. 뭐라고 수습하지? 곧 손주 보실 수 있게 노력할게요, 라는 말이 잘못 나갔다고 할까? 이런 생각을 하는데 자신을 빤히 보는 예지와 눈이 마주쳤다. 기대에 찬 강 회장의 얼굴과 반대로 무척 불안한 얼굴이었다. 자신보다 먼저 임신했을까 봐 불안하고 초조한 얼굴. 자신에게 경쟁의식을 느끼며 얄밉게 굴던 예지의 표정을 보자 자신이 진짜 임신했더라면 얼마나 짜릿했을까, 하는 생각이 잠시 스쳤다. 그때 도우미 아주머니가 바닥에 떨어져 있던 은조의 핸드백을 주우며 말했다.
“작은 사모님, 가방 떨어졌어요.”
가방에서 아기 초음파 사진이 빠져나와 있었다. 도우미가 초음파 사진을 들어서 말했다.
“어머나! 초음파 사진이네. 축하드려요, 사모님.”
“뭐?”
예지가 벌떡 일어나 도우미 손에 있던 아기 초음파 사진을 낚아채듯이 가져갔다. 초음파 사진을 보는 예지는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예지가 은조를 째려보듯 쳐다보았다.
“진짜네. 진짜 태아 사진이네.”
예지의 눈빛이 시기와 질투로 불꽃이 일 듯 이글거렸다. 예지의 말에 강 회장이 얼굴에 함박꽃이 피듯 활짝 웃었다.
“그게 정말이냐? 진짜 아기를 가졌어?”
“아니, 그게…….”
“하하하. 새아가, 축하한다! 그리고 고맙구나.”
은조가 아니라고 대답할 새도 없이 강 회장은 임신으로 착각하고 호탕하게 웃었다. 상황이 왜 이렇게 돌아가지? 이게 아닌데. 당황한 은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버님, 그게 아니라…….”
은조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지만 강 회장의 큰 웃음소리에 묻혀버렸다.
“하하하, 나도 이제 할아버지가 되는구나.”
예지와 기현이 서로 눈을 마주치고 인상을 썼다. 먼저 손주를 안겨주는 아들에게 지주사의 지분 30%를 증여한다고 선포했으니 충격과 허탈감이 드는 건 당연했다. 은조는 상간녀의 아기 초음파 사진으로 인해 자신이 임신한 것으로 오해받는 상황이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은조가 먼저 임신했다고 믿고 충격받은 예지 얼굴을 보는 것은 뭔가 통쾌했다. 그동안 무시하고 괄시받았던 것을 한 번에 복수하는 기분이었다. 사실대로 말해야 하는데, 어떻게 말하지? 고민하고 있던 찰나.
“회장님, 전무님 오셨어요.”
그때 도우미가 민후가 도착했다고 알렸다. 첩첩산중이었다. 은조는 남편 민후의 등장에 심장이 쿵 떨어지며 곧바로 후회가 밀려왔다. 아직 민후와는 그 일에 관해 얘기하지도 않았는데 상황이 이상하게 꼬여버렸다. 그 여자 말로는 민후도 임신 사실을 아직 모른다고 했다.
“좀 늦었습니다.”
민후가 식당으로 들어와 강 회장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지각하면 항상 인상을 쓰며 잔소리하던 강 회장이 웃는 얼굴로 민후를 맞았다.
“강 전무! 하하하.”
강 회장은 다짜고짜 민후를 보며 호탕하게 웃었다.
“축하한다. 어서 이리 와 앉아라.”
난데없는 축하 인사에 민후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사람들을 보았다. 형 기현과 형수는 표정이 평소보다 굳어 있었다.
“축하라뇨. 무슨 말씀입니까?”
민후가 은조 옆자리 식탁 의자를 빼서 앉으며 물었다.
“이 녀석도 아직 모르는 모양이지?”
강 회장이 웃는 얼굴로 은조를 보며 물었다. 은조는 민후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대답도 하지 못했다. 강 회장이 기쁨이 만연한 얼굴로 말했다.
“너 곧 아빠가 된다는구나!”
“……예?”
민후가 놀란 눈으로 은조를 돌아보았다.
“너도 처음 들었으면 놀랄 만도 하지. 하하하”
강 회장의 웃음소리가 집 안에 크게 울렸다. 기현 부부는 기뻐하는 강 회장을 보며 더욱 얼굴이 일그러졌다. 지주사의 지분 30%가 민후에게 넘어가면 경영권을 쥔 것이나 다름없었다. 동생에게 경영권을 뺏기지 않기 위해 아버지 눈에 들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한순간에 역전당한 기분이었다. 은조를 바라보는 민후는 무척 놀란 표정이었다. 평소 표정에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민후여서 그가 지금 얼마나 놀라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었다. 다른 사람 눈에는 아내의 임신 소식에 기뻐하며 놀라는 것으로 보일 테지만 민후는 충격과 분노를 억누르고 있었다. 공식적인 자리가 아니고는 아내의 손을 잡은 적도, 어깨를 감싼 적도 없다. 그런데 임신이라고? 근무시간에 전화해서 할 얘기가 있다고 했던 게 이 일 때문이었어? 배신감과 분노로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기분이 들었다. 은조가 시선을 들어 민후를 응시했다. 눈이 커질 대로 커져 자신을 보고 있었다. 저렇게 동요한 그의 모습은 처음이다. 놀랐겠지, 당연히. 우리 사이에 아이가 생길 리 없으니. 은조는 자신을 보는 민후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지금 날 의심하고 있겠지? 은조는 꼬여버린 상황에 사실대로 다 밝히지도 못하고 난감했다. 일단은 남편과 먼저 대화를 한 다음에 상황을 수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강 회장은 이런 부부의 내막은 눈치채지 못하고 식사 내내 즐거워했다. 저렇게 기뻐하는 아버지 앞에서 민후는 내 아이가 아니라고 초 치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아내에게 남자가 있을 거라는 상상만으로도 괴로운데 임신이라는 말에 피가 바짝 마르는 기분이다. 분노, 배신감, 질투. 온갖 안 좋은 감정들이 민후를 잠식했다.
“허허, 녀석. 애 아빠가 된다는데도 저렇게 무뚝뚝하니, 원.”
강 회장은 평소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민후라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민후는 묵묵히 음식을 입안으로 쑤셔 넣어 씹는 행위만 반복했다.
“새아가. 조심, 또 조심해라.”
강 회장은 임신 소식을 접한 후 은조를 대하는 태도가 확 달라졌다. 편애하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라 첫째 며느리 예지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자신이 평소에 강 회장에게 얼마나 공을 들이고 있는데. 한 방에 강 회장의 사랑을 뺏긴 기분이었다. 분해서 손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였다.
. . . 평소보다 식사 모임은 일찍 끝났다. 민후는 도저히 평소처럼 식사하고 후식까지 먹으며 담소를 나눌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아버지, 아내가 좀 피곤한 모양입니다. 일찍 들어가겠습니다.”
“어어, 그래, 그래. 들어가거라.”
강 회장은 새아가 어서 쉬게 해주라며 집에 보냈다.
“새아가, 뭐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연락해라.”
강 회장은 간이라도 빼줄 것처럼 친절하게 은조를 배웅했고 민후는 내내 굳은 표정이었다. 차고로 내려가며 민후가 말했다.
“차 가지고 왔지? 키 줘.”
민후가 은조가 타고 온 차의 키를 달라고 했다.
“당신 차는 김 기사한테 가져오라고 하고 내 차 타고 가.”
민후는 같이 타고 가면서 대화를 좀 할 생각이었다. 기사에게 은조의 차 키를 건네주고 민후가 자신의 차 조수석 문을 열었다. 은조가 조수석에 타자 민후가 보닛을 돌아 운전석으로 갔다. 대외적인 행사에 함께 참여할 때 같이 차를 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럴 때는 함께 뒷좌석에 타고 가는 날이 많았다. 그가 직접 운전하는 차는 처음이었다. 차가 출발하고 한동안 두 사람은 말없이 앞만 주시했다. 운전하는 민후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차 안에는 서로를 의식하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먼저 입을 연 건 민후였다.
“얘기 좀 해야 하지 않을까.”
중저음의 목소리가 밀폐된 차 안에 낮게 깔렸다.
“네. 해야죠.”
이제 숨길 것도 없이 그 얘기를 할 때가 왔다.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
“무슨 생각으로 아버지 앞에서 뻔뻔하게 아이를 가졌다고 얘기한 거야?”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화를 내고 있었다.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아서 내 아이라고 아버지한테 안겨줄 생각이야?”
늘 침착하고 차분하던 그가 조금 흥분한 목소리를 냈다.
“당신의 아이예요.”
민후가 매서운 눈으로 은조를 쳐다보았다. 그게 무슨 개소리냐는 얼굴이었다.
“아버님 품에 안겨줄 아이는 당신이 만든 당신의 아이라고요.”
“무슨 소리야!”
민후가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은조가 민후를 쳐다보며 딱 한 마디만 했다.
“이선주.”
민후의 표정이 변했다.
“뭐?”
은조는 변하는 그의 표정을 살폈다. 자신이 바람피우는 상대 여자의 이름이 아내의 입에서 나왔을 때 남자의 표정이 어떻게 변하는지 궁금했다.
“그 여자가 당신의 아이를 가졌대요.”
민후의 눈이 커졌다. 그러고는 바로 운전대를 꺾어 차를 길옆에 세웠다.
“뭐라고? 당신이 그 여자를 어떻게 알아?”
묻는 민후의 목소리에 흥분감이 묻어났다.
“날 찾아와서 만났어요.”
그때의 충격이 되살아나 울컥 감정이 치밀었다.
“초음파 사진을 내밀면서 당신의 아이를 가졌다고 말했어요.”
은조는 최대한 침착해지려고 노력했다. 배신감에 화가 치밀었지만 애써 억누르고 차분하게 목소리를 내었다.
“1년 동안 만났다면서요?”
민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가 은조를 향하고 있던 몸을 돌려 차 시트에 등을 기댔다. 인상은 여전히 일그러진 채였다.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손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괜찮아요. 상관없어요. 당신 외도를 탓할 생각은 없어요.”
은조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어차피 우린 계약 관계니까요.”
“후우우.”
민후가 길게 숨을 내뱉더니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래도 임신은 좀…….”
은조의 말끝에 흐느낌이 섞였다.
“선을 넘은 것 같아요. 흐흑.”
결국,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은조가 울자 민후는 다소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가 어찌할 바를 모르는 얼굴로 그녀를 보다가 말했다.
“내 아이 아니야.”
은조는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다 거짓말이야.”
민후는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을 듣는 그는 화난 듯 미간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문 실장.”
긴 한숨과 함께 비서를 불렀다.
[예, 전무님.]
“이선주라는 여자, 안 되겠어. 그냥 무시했더니 날 너무 우습게 보네. 법무팀에 연락해서 허위사실 유포로 강력하게 법적 조치하라고 해.”
전화를 끊은 민후가 은조를 보았다. 그의 통화내용을 들은 은조가 눈물이 그렁한 채로 바라보았다, 울고 있는 아내의 얼굴은 처음 보았다. 생각보다 가슴이 아팠다. 아내를 마음 상하게 한 원인이 자신이라는 생각에 더욱 가슴이 욱신거렸다.
“그 여자가 하는 말, 다 거짓말이야.”
민후는 은조를 향해 몸을 틀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스토커라고.”
눈물이 가득 고인 은조의 눈이 커졌다. 고였던 눈물 한 방울이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회사 직원이었는데 내가 결혼하고부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며 연락하고 찾아오기까지 했어. 경찰에 입건된 적도 여러 번이야.”
“정말……이에요?”
“그래. 접근금지 명령 때문에 나한테는 못 찾아오니 당신한테까지 간 모양이네.”
은조는 손으로 눈물을 닦아내며 말했다.
“1년 동안 당신을 만났다고 했어요. 나한테 아기 초음파 사진도 보여줬고요.”
“만난 적 없어!”
민후는 다소 강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냥 부하직원이었을 뿐이야. 개인적으로 대화한 적도 없어. 모두 그 여자의 망상이라고.”
“당신이랑 같이 찍은 사진도 보여줬어요.”
민후가 짧게 한숨 쉬며 말했다.
“무슨 사진인지 알아. 워크샵 갔을 때 여직원들이 나랑 사진을 찍고 싶어 했어. 직원이 찍자는데 거절할 수도 없어 여직원들 한 명 한 명 다 찍은 거야!”
민후를 바라보는 은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남편의 절박한 눈빛, 말투에서 진심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남편이 외도한 게 아니라는 사실에 은조의 얼굴에 설핏 미소가 비쳤다. 자신을 배신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묘한 안도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