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어차피 애정도 없는 계약 결혼2021.09.07.
“미안하지만 오늘은 시간 내기가 힘든데.”
민후가 의자에 깊이 등을 기대고 책상 위 서류들을 들추며 말했다.
“오늘이 입찰 기한이어서 말이야.”
[…….]
“급한 일이야?”
[아뇨. 그럼 나중에 얘기해요.]
“오늘 본가에 가는 날이지? 끝나고 바로 삼성동으로 갈게. 당신 혼자 갈 수 있지? 아니면 기사 보내 줘?”
[아뇨. 혼자 갈게요.]
민후는 아내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힘이 없는 것이 느껴졌다. 평소 근무시간에 전화도 잘 하지 않던 아내였던 탓에 뜬금없이 할 얘기가 있다고 회사까지 오겠다니 아내에게 무슨 일이 있나, 걱정되었다. 뭐 때문에 그러는지 궁금했지만, 오늘은 도저히 시간을 낼 수가 없었다.
[그럼 삼성동에서 봐요.]
“그래.”
전화를 끊은 민후는 심각한 얼굴로 꺼진 핸드폰 화면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문질렀다. 이렇게 진지하게 할 얘기가 있다고 먼저 얘기한 적이 없던 아내인데……. 안 좋은 일이 있는데 바쁘다고 너무 냉정하게 거절했나? 혹시 아내에게 상처가 되지 않았을지 민후는 후회가 되기도 했다. 아내가 회사 근처까지 온다면 웬만해서는 바쁘더라도 만났을 텐데 오늘은 마감 시간이 있는 입찰일이라 도저히 시간을 내기가 힘들었다. 근무시간에 생각지도 못했던 아내의 목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좋았는데. 무슨 일인지 신경 쓰였다.
*
“그럼 삼성동에서 봐요.”
민후가 바빠서 시간을 내지 못한다고 하니 은조는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끊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진짜 다 사실인지, 어떻게 감쪽같이 날 속이고 살아왔는지, 그에게 따져 묻고 해명이라도 듣고 싶었는데. 가슴에 돌덩이가 올라간 듯 답답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자신과는 3년간의 계약 결혼이고 남편에게는 여자가 있고 아이가 생겼다. 아이까지 생길 정도로 깊은 관계면 남편은 이혼을 원하겠지? 결국 나만 빠지면 되는 거다. 계약 기간은 다 채우지 못하겠다. 어차피 애정도 없는 계약 결혼, 계약을 빨리 끝내는 것뿐이다. 그냥 계약종료를 당기는 것뿐인데 마음이 왜 이렇게 무겁지? 남편에 대한 호감이 생각보다 깊었었나? 거리를 두면서 생활해왔지만 나도 모르게 남편에게 마음이 생겼던 건가? 은조는 사실 3년의 계약 기간이 끝나고도 이혼을 원하지 않았다. 이혼하면 다시 할머니에게로 돌아가야 하기에. 계약 결혼이었지만 3년간은 할머니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으로 흔쾌히 응했던 결혼이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했던 남편의 여자와 아이의 등장으로 1년 만에 다시 할머니에게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은조는 한숨을 내쉬며 제 손에 있는 초음파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넌 언제쯤 밖에서 굴러먹다 들어온 사생아 티를 벗을 거니!’
은조가 시도 때도 없이 듣던 할머니의 폭언이 환청처럼 들렸다. 초음파 사진을 다시 꺼내 본 은조는 이 아기도 자신과 같은 운명을 타고 태어날 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생아, 혼외자. 자신을 바라보던 싸늘한 할머니의 눈빛. 만약 남편과 자신이 진짜 부부였다면 이 아이도 사생아로 자신처럼 세상의 온갖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자라났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초음파 사진 속 아이가 안쓰러웠다. 임신 사실을 알면 남편은 나랑 이혼하고 그 여자와 결혼하겠지? 그러면 아이는 자신처럼 사생아라는 소리를 듣고 자라지는 않겠네. 은조는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매우 우스웠다. 내가 왜 그 여자가 밴 아이 운명을 걱정하고 있는 거야? 지지리도 못났다, 진짜. 은조는 크게 한숨 쉬며 자동차 시트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 민후는 모든 일정을 끝내고 삼성동 본가로 향하는 길이었다. 턱을 괴고 차창 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도심을 말없이 쳐다보았다. 차 안에서는 대부분 태블릿PC로 서류를 보거나 뉴스 기사를 보던 민후였다. 저렇게 멍하니 밖을 쳐다보고 가는 일이 별로 없었다. 민후는 낮에 아내의 전화를 그렇게 끊은 것이 신경 쓰였다. 처음으로 진지하게 할 얘기가 있다고 했는데 거절한 모양새라서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을까, 걱정되었다. 계약 결혼이기 때문에 아내에게 부담 주지 않으려고 일부러 거리를 두고 배려하며 지내왔다. 민후는 아내를 선 자리에서 처음 만났다. 할머니의 강요로 계약 결혼을 해야만 하는 아내가 가련해 보였다. 이 결혼이 필요했던 건 그녀의 할머니인 명신제지 윤 회장님과 자신이었으니까. 명신제지 윤 회장님이 자신의 손녀와 3년간의 계약 결혼을 제안했다. 선 자리에서 그녀는 자신도 결혼을 원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민후는 그녀가 할머니 앞에서는 자기의 주장을 전혀 내세우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 할머니에게서 팔려가듯 제 부인이 된 그녀는 원치 않는 결혼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서로의 사생활에 일절 관여하지 않는다는 조항을 넣었고 그녀가 부담되지 않도록 선을 지켰다. 집에서는 서로 대화조차 잘 하지 않는 관계였지만 민후의 신경은 늘 아내에게로 쏠려있었다. 민후는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아내가 가슴속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가끔 집에서 마주칠 때마다 코에 스치는 그녀의 향기에 가슴이 뛰었다. 함께 식사하는 시간이 생기면 민후는 그 순간이 즐거웠다. 아내와 더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항상 아내의 선택을 존중했다. 아내가 먼저 대화를 걸어주면 짧게 대화했지만, 그녀는 더 긴 대화를 원하지 않는지 이내 입을 다물었다. 어느새 마음속에 그녀를 품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고 지내왔다. 그런 그녀가 진지하게 할 얘기라는 것이 뭘까? * 은조는 혼자 운전해 삼성동 본가에 도착했다. 집에 들어가니 첫째 강기현 부부 내외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현관에서 손위 동서 예지와 마주쳤다.
“동서, 이제 와?”
손위 동서 예지는 공교롭게도 은조와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결혼하기 전 상견례에서 서로를 보고 놀랐던 기억이 있다. 예지는 은조에게 과도한 경쟁의식을 느끼며 동갑인데도 손위 동서 행세를 톡톡히 했다.
“안녕하세요, 형님. 일찍 오셨네요.”
은조는 예지에게 항상 깍듯하게 윗사람 대접을 해줘야 했다.
“어떻게 막내가 제일 늦게 오네. 이럴 거면 상 다 차린 후에 오지 그랬어?”
예지는 턱을 들고 눈을 내리깐 거만한 모습으로 말했다. 오늘은 자신이 좀 일찍 왔다고 저렇게 유세를 떤다. 평소에는 은조가 먼저 도착해 도우미를 도운 적이 훨씬 많았는데도.
“죄송해요, 형님. 일찍 온다고 서둘렀는데.”
은조가 웃으며 말하자 예지가 말허리를 자르고 말했다.
“차 막혔다고 핑계라도 댈 생각이야? 아버님 그런 핑계 제일 싫어하시는 거 알지?”
은조는 벽에 걸린 시계를 흘끗 보았다. 약속 시각은 7시였고 지금은 6시 30분이었다. 약속 시각보다 일찍 왔는데도 자신이 먼저 도착했다고 지각생 취급을 했다. 안 그래도 오늘 충격받아 힘든데 얘까지 날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가 싶었다.
“일찍 다닐게요. 죄송해요.”
하지만 은조는 눈을 깔고 사과했다. 이렇게 고개 숙이며 한발 물러나야 조용하게 끝이 나는 걸 알기에 그랬다. 이제 이혼하면 얄미운 저 얼굴은 안 볼 수 있겠네.
“아버님께 인사나 드려.”
“네.”
은조는 응접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강 회장과 장남 기현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
“아버님, 저 왔어요. 그간 잘 지내셨어요?”
“어, 그래. 둘째 아가 왔니?”
고개를 돌려 은조를 보는 기현에게도 인사했다.
“아주버님 안녕하세요.”
“네. 제수씨. 잘 지내셨어요? 민후랑 같이 안 왔어요?”
“네. 일 끝내고 바로 이쪽으로 온다고 했어요. 늦을 수도 있다고 먼저 식사하시라고 했어요.”
“자식이, 이런 날은 부부동반으로 같이 일찍 일찍 다녀야지. 왜 아내 혼자 보내.”
“바빠서 그런 거죠.”
“제수씨, 난 뭐 한가해서 일찍 온줄 알아요? 지만 바빠, 아주.”
“…….”
“그만해라.”
강 회장이 한마디 하자 기현이 입을 다물었다.
“민후 늦게 온다면 먼저 먹자.”
“네, 아버님. 준비할게요.”
예지가 생글 웃는 얼굴로 강 회장에게 말하고 주방 쪽으로 갔다. 예지와 은조는 도우미와 함께 분주하게 식탁에 음식을 차렸다.
“동서는 들어가서 국 좀 퍼줘. 여기는 내가 할게.”
예지는 은조를 주방 안으로 들여보냈다. 강 회장 앞에서 분주하게 식사 준비하는 며느리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아버님, 참치회 좋아하시죠? 제가 새벽에 수산시장 가서 직접 떠온 거예요.”
예지가 아이스박스에서 회가 담긴 접시를 꺼내어 보여주었다. 주방으로 들어가려던 은조가 돌아보았다. 예지가 은조를 힐끔 보고는 얄미운 표정을 지었다. 분명 며칠 전 예지가 전화해 이렇게 말했다.
‘동서, 이번에는 아무것도 가져오지 마. 도우미 아주머니가 성심성의껏 음식 준비하는데 동서가 그렇게 파는 음식 가져오면 어떡해? 그런 음식에 뭐가 들어갔을 줄 알고?’
지난번 은조가 강 회장이 좋아한다던 닭발을 포장해온 적이 있었다. 강 회장이 언젠가 옛날 포장마차 닭발이 그립다고 했던 말을 기억했다가 포장해가니 무척 반가워하며 좋아했었다.
‘아버님 눈에 들려고 별짓을 다 하네.’
그때 예지는 은조에게 눈을 흘기며 이런 말을 했었다. 그럴 땐 언제고 자기에게는 아무것도 가져오지 못하게 하고는 자신이 회를 떠 온 것이다. 저렇게 자신을 견제하면서 아버님에게 귀염을 받고 싶을까. 예지는 전부터 은조에게 과도하게 경쟁의식을 느꼈다. 맏며느리로서 강 회장에게 인정받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남편이 경영권 승계를 받게 하기 위한 내조의 일환이었다. 은조는 그런 예지와 경쟁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어차피 자신은 계약 기간이 지나면 남이 되어 안 보고 살 텐데 그럴 필요성이 없었다.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가 이어졌다.
“한림 씨앤씨 쪽하고 접촉은 했어?”
“시도하고 있습니다.”
“경쟁사보다 먼저 손 써놓아야 해.”
강 회장과 기현이 일 얘기로 한참 대화를 나누는데 예지가 끼어들었다.
“대륙기업 셋째 아들 이번에 아기 낳았더라고요. 제가 아버님 이름으로 선물은 보내드렸어요.”
“아, 그랬어?”
“지인분 집안의 소소한 경사는 제가 챙길 테니 아버님은 신경 안 쓰셔도 돼요.”
“그래, 고맙구나.”
“뭘요. 당연히 제가 해야죠. 기업 하시는 분께서 어떻게 이런 것까지 신경 쓰시겠어요?”
강 회장이 흡족해하자 예지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각 기업 사모님이나 며느님들하고 친분도 잘 유지해오고 있어요. 이런 게 나중에 도움이 되었으면 되었지, 해가 되지는 않을 거로 생각해요.”
“그럼, 인맥 관리도 사업에 중요한 부분이지.”
“아버님이나 남편 사업을 위해서는 제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예지는 강 회장을 보며 포부 있게 말했다.
“그나저나, 대륙 셋째가 애를 낳았어? 대륙 박 회장은 지금 손자가 대체 몇이야? 참, 부러운 양반일세.”
강 회장이 국을 후루룩 먹으며 말했다. 예지는 곧바로 얼굴이 굳었다. 수년 전부터 강 회장이 손주를 원하고 있었지만, 예지 부부는 불임 치료를 받고 있었다. 강 회장에게 손주를 안겨 주는 것이 가장 점수를 많이 딸 상황인데 아기가 생기지 않아 조바심이 나 미칠 지경이었다.
‘먼저 손주 안겨주는 자식한테 지주사 지분 30%를 증여하마!’
심지어 손주를 빨리 보고 싶었던 강 회장은 지분을 미끼로 던지기도 했다. 지주사의 지분은 경영권을 손에 쥐는 데 있어 핵심적이었다. 이에 예지는 더 초조해졌다. 행여 은조 부부가 먼저 아이를 가질까 봐 늘 애를 태우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 예지를 보며 은조는 생각했었다.
‘형님, 걱정하지 말아요, 우리 부부에게 아이가 생길 일은 없을 거니까요.’
고개를 숙이고 밥을 입에 욱여넣던 은조는 남편이 아이를 먼저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면 형님 부부 얼굴 볼만하겠다 생각했다. 그 생각을 하니 오늘 내연녀 만났던 것이 다시 떠올라 화가 솟구치려고 했다. 밥을 씹는지 돌을 씹는지 모르겠다.
“대체 너희들은 언제 나한테 손주를 안겨줄 거냐?”
강 회장이 며느리들을 보며 말했다.
“기현이는 그렇다 치고 너희는 왜 애가 안 생겨?”
각방을 사용하는 계약 부부인 사실을 모르니 강 회장이 저렇게 물었다. 멍하니 기계적으로 음식물을 씹던 은조가 말했다.
“아버님도 곧 손주 보실 거예요.”
머릿속으로 생각만 한다는 것이 은조 입 밖으로 나와버렸다. 강 회장이 놀라며 쳐다보았다.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