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당신 남편의 아이를 가졌어요2021.09.04.
[강민후 전무님 사모님 되시죠?]
“네, 그런데요.”
[좀 만나 뵙고 싶은데요. 할 얘기가 있어요.]
“누구세요?”
[강민후 전무님 관련해서 사모님께서 아셔야 하는 일이 있어요.]
“누구시냐고요?”
[만나보면 알아요.]
누구인지 밝히지도 않고 다짜고짜 만나보면 안다는 전화기 속 여자의 목소리는 어쩐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만날 장소와 시간을 정하고 전화를 끊은 은조는 벽에 걸린 결혼사진을 보았다. 계약 결혼을 한 지 1년이 지나가고 있었다. 남들에게는 평범한 부부처럼 보이기만 하면 되는 계약서를 쓰고 결혼했다. 집에서는 각자의 공간에서 남처럼 생활하며 공식 석상에서만 부부행세를 하고 있다. 남편은 차갑기는 해도 매너가 있었다. 매사에 신사적으로 행동했고 진중한 성격이었다. 평화로웠고 평탄했던 결혼생활에 파장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남편의 내연녀가 나타나면서.
* 은조는 가느다란 자신의 손목에 걸쳐진 시계를 보았다. 약속 시각으로부터 10분이 지나고 있는데 상대는 나타나지 않았다. 제시간에 상대가 나타나지 않자 은조는 누군가의 장난 전화에 놀아났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오늘은 본가에서 시댁 식구들과 다 함께 식사하는 날이라 저녁에 삼성동에도 가야 한다. 10분만 더 기다리다 오지 않으면 일어나야겠다. 아니, 5분만. 15분 기다리면 많이 기다린 거지. 이런 기본적인 것도 지키지 않는 부류의 사람은 정말 싫다. 핸드폰을 들고 쓸데없는 광고 메시지 따위를 지우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구두 소리가 나더니 바로 앞에서 빨간색 여자 구두가 멈추었다. 은조가 고개를 들었다.
“강민후 전무님 부인 되시나요?”
“네.”
여자는 선글라스를 쓴 채 은조 앞에 앉더니 선글라스를 벗었다. 다소 짙어 보이는 화장에 머리는 한껏 웨이브를 주어 풍성했다. 곧장 파티라도 갈 것 같은 여자를 보며 물었다.
“절 보자고 한 용건이 뭔가요?”
“이선주라고 해요. 1년 동안 강민후 전무님과 만났어요.”
돌직구에 은조의 얼굴이 바로 굳었다. 뭐? 잘못들은 게 아닐까 싶어 여자를 빤히 주시했다.
“못 믿으시겠어요? 자, 보세요.”
선주가 핸드폰 화면을 은조에게 보였다. 남편 민후와 여자가 함께 셀카를 찍은 사진이다. 사진을 보자 은조의 표정이 더욱 딱딱하게 굳어졌다. 아무리 계약 결혼이고 무늬만 부부 사이라지만 외도가 1년이나 되었다는 말에 배신감 같은 것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1년이나 만났다고? 자신과 결혼한 지도 1년이 조금 넘었다. 그렇다면 결혼하고 바로 여자를 만났다는 얘기다. 계약 결혼이었지만 그동안 매너 있고 신사적이던 남편에게 호감을 느꼈었다. 점잖고 차분한 성격과 예의가 몸에 밴 모습에 매력을 느꼈었다. 계약 기간 동안 서로에게 기본적인 예와 신의는 지켜줄 남자라고 생각했는데. 남편에 대한 우호적인 감정에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그래서요?”
은조는 덤덤한 얼굴로 여자에게 물었다.
“전무님이 제 연락을 안 받아요. 아무래도 수신 차단한 것 같아요.”
은조는 시선을 돌리며 웃음도, 한숨도 아닌 바람을 내보냈다.
“허.”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친구한테 연애 싸움 하소연하듯이 말하는 여자가 어이가 없었다. 유부남과 만나면서 유부남의 부인을 만나 어떻게 저렇게 뻔뻔하게 얘기를 할 수가 있지?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고요?”
선주가 은조를 빤히 보다가 피식 웃었다.
“별로 충격 안 받으시네. 이런 일이 많았나 봐요?”
은조는 매서운 시선으로 여자를 쏘아보았다. 선주는 가방에서 종이 하나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렸다. 그것은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아기 초음파 사진이었다.
“임신했어요. 4주래요.”
아…… 이건 좀. 선을 넘는데? 은조는 굳은 얼굴로 초음파 사진을 내려다보았다. 서로의 생활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계약 조항 때문에 집에서도 거리를 두며 생활해왔다. 서로에 대해 선을 지켰지만 남편은 신사적이었고 좋은 사람이었다. 야근한다면 하는 줄 알았고 출장을 간다고 하면 그런 줄 알았다. 그동안 매너 있던 남편의 행동 뒤에 은조가 모르는 사생활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되니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남편에게 호감이 가도 계약 조항 때문에 그동안 다가가기 힘들었다. 그래도 계약 기간 동안은 내 남편인 것은 변함이 없기에 그와의 결혼 생활에 불만은 없었다. 그런데 서로의 생활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그 조항이 이렇게 돌아올 줄이야. 은조는 초음파 사진에서 시선을 떼고 여자를 보았다. 계약한 위장 부부가 아니라 진짜 부부 사이라면 이 상황에 어떻게 해야 할까? 드라마에서 보던 것처럼 상간녀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흔들어야 정상이지? 저 상간녀는 남편과 내가 계약 부부인 건 아마 모를 테고. 그런데 참 이상했다. 계약 부부이지만 이 상황이 무척 화가 난다는 것이다. 진짜 저 상간녀의 머리채를 휘어잡아 상모 돌리듯이 우로 세 번, 좌로 세 번 돌리고 싶었다. 하지만 품위 떨어지니까 그런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은조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내게 원하는 게 뭔가요? 상간녀 소송이라도 하라고 나한테 알려주는 거예요?”
“전무님이 날 안 만나주고 내 연락도 안 받으니까요. 대신 이거 좀 보여주세요.”
허, 뭐? 은조는 눈살을 찌푸리며 여자를 보았다.
“전무님은 저 임신한 거 아직 몰라요.”
은조는 기가 차서 코웃음을 흘렸다.
“나 임신한 거 알면 전무님이 나한테 돌아올 거예요.”
여자의 뻔뻔함에 은조는 입이 벌어졌다.
“사랑한다고 했다고요. 사랑한다고 속삭여줬다고요. 으흐흑.”
선주는 손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사실 헤어졌어요. 헤어지고 임신한 거 알았거든요.”
선주가 초음파 사진을 은조 손에 쥐여주며 애원하듯 말했다.
“제발 전무님한테 말해줘요. 우리의 아이가 생겼다고.”
은조가 선주의 손을 강하게 뿌리쳤다.
“이봐요. 지금 누구보고 임신 사실을 알려주라 말라 그러는 거예요?”
참았던 분노가 터졌다.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어야지. 난 당신이 만나는 유부남의 아내라고!”
사람을 우습게 봐도 너무 우습게 봤다. 은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은조가 테이블 위에 있던 초음파 사진을 힐끔 보고 초음파 사진을 들고 커피숍을 나왔다. . . . 또각또각. 성난 구두 굽 소리가 지하주차장에 울렸다. 탕! 차에 올라타 문을 세게 닫고 심호흡을 했다. 요가 명상 시간에 배웠던 호흡법으로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화를 다스리는 호흡법이라고 배웠는데 도저히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 순 엉터리 요가 명상법. 은조는 자신이 왜 이토록 화가 치미는지 생각해 보았다. 계약서가 존재하는 애정없는 계약 결혼이었다. 은조는 할머니의 강요에 정략결혼 해야 했고, 남편 민후도 사업상 필요해서 한 결혼이었다. 각자 생활을 존중하며 간섭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대외적으로만 사이좋은 부부처럼 보이면 되는 조건이었다. 서로 다른 이성을 만나도 상관 안 하겠다는 조항이 딱히 있었던 건 아니다. 그래도 부부의 기본 신의는 지켜야 하지 않나!
“허.”
은조는 기가 차고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아무리 계약 부부이지만 임신한 내연녀까지 등장하는 건 명백한 계약 위반 아닌가? 애정없는 부부라지만 법적으로 아내이다. 배신감은 드는 건 당연하다. 이렇게 화가 치미는 건 배신감 때문이겠지? 은조는 단전에서부터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의 원인을 배신감이라 단정했다. 질투 같은 게 있을 리 없으니까. 그런데 남편과 그 여자가 안는 장면이 왜 머릿속으로 자꾸 그려지는 걸까? 그게 떠오르면 왜 더 분노가 치미는 걸까? 거리를 두며 생활했지만, 남편에게 어느 정도 호감이 있었던 건 사실이다. 이렇게 화가 나는 건 생각보다 남편에 대한 감정이 깊었던 걸까? 은조는 혼란스러운 자신의 감정에 깊게 한숨 쉬며 시트에 머리를 기댔다. 팔을 들어 손목시계를 보았다. 일단 삼성동 가기 전에 남편을 만나 이 얘기를 좀 해봐야겠다. 은조가 핸드폰을 들어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
“나가세요, 여기서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이거 놔요! 나 강민후 전무님 만나러 왔다고요.”
한주 그룹 본사 로비가 소란스러웠다. 보안요원이 막무가내로 들어가려는 여자를 붙잡고 실랑이 중이었다. 강민후 전무를 만나러 왔다는 여자는 은조를 만났던 그 여자였다.
“저 이선주가 왔다고 전해주세요. 네?”
“네, 비서실에 물어보니까 당신 스토커라고 쫓아내라고 했습니다.”
“스토커라뇨. 아니에요! 비서실 사람들이 뭘 몰라서 그런 거라고요.”
“자꾸 이러면 경찰 부릅니다.”
경찰이라는 말에 여자의 얼굴이 싹 굳어졌다. 겁을 먹은 얼굴이었다.
“당신 우리 전무님 접근 금지 가처분 명령받았다면서요?”
선주는 민후를 쫓아다니던 스토커였다. 이미 여러 번 신고당해 벌금을 물었고 계속 찾아와서 만나 달라고 해 접근금지 가처분 신청을 했다.
“100m 내 접근 금지 명령이잖아요. 어기면 바로 현행범으로 잡혀갑니다.”
보안요원이 무서운 말투로 말하자 선주는 곧바로 표정이 변했다.
“알았어요. 가면 될 것 아니에요, 가면!”
선주는 보안요원의 팔을 뿌리치고 탁탁 옷을 털면서 보안요원을 노려보았다.
“당신, 언젠가 후회할 거야. 내가 누군지 알아? 난 전무님의 여자라고.”
선주는 원래 계약직 직원이었다. 민후가 전략실 본부장 시절, 민후에게 반해 혼자 몇 년간 짝사랑했다. 그러다 민후가 결혼하고 나서는 이상한 망상에 빠져 스토킹을 시작했다. 민후가 자신과 만나다가 자신을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했다고 주장했다. 계약은 더 연장되지 못했고 회사를 나가게 되자 집착은 더 심해졌다. 점점 스토킹 횟수가 잦아졌고 경찰에 신고도 했지만, 벌금을 무는 것에 그쳤다. 법원에 접근 금지 처분 신청도 했지만 저렇게 다짜고짜 찾아오기도 했다. 보안실이나 비서실에서 미리 차단하므로 민후는 가처분 이후로는 스토커에게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게 더 선주를 자극하게 되었고 민후와 만나지 못하자 급기야 그의 아내에게까지 찾아간 것이다. . . .
“이선주 씨가 또 찾아왔나 봅니다.”
비서 문 실장이 민후에게 말했다. 민후는 서류를 보면서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다음에 또 오면 바로 경찰 부르라고 했습니다.”
민후는 크게 관심 없다는 듯 보던 서류에만 집중했다.
“요즘 점점 심해지는 게 정신적인 질환이 있는 게 아닌가 의심스럽습니다.”
“일일이 나한테 보고할 필요 없습니다. 알아서 처리하세요.”
민후가 결재서류에 사인하고 서류를 건네주며 말했다.
“입찰 신청 마감은 몇 시입니까?”
“6시입니다.”
민후가 슈트 소매를 살짝 걷어 시계를 보았다.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
“입찰 신청하고 바로 삼성동으로 이동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5시에 출발하죠.”
“네. 준비하겠습니다.”
Rrrrrr. 그때 민후의 핸드폰이 울렸다. 은조라는 이름 옆에 하트. 계약 결혼이지만 아내인데 단순히 이름만 저장하기는 그래서 하트 하나를 옆에 붙였다. 아내의 이름을 보자 민후의 눈썹이 움찔했다. 좀처럼 근무시간에는 전화하지 않는 아내였다. 생각지도 못했던 선물을 받은 기분에 민후는 가슴이 두근댔다. 반가움에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설레는 마음으로 민후는 전화를 받았다.
“음. 웬일이야.”
반가운 마음과는 달리 전화 받는 목소리는 무뚝뚝했다.
[바빠요? 혹시 시간 좀 내줄 수 있어요?]
“뭐 때문에?”
[할 얘기가 있어서요.]
“무슨 얘기.”
[…….]
머뭇거리듯 은조가 말이 없다가 대답했다.
[전화로 얘기하기는 좀 그래서요. 삼성동 가기 전에 먼저 잠깐 만날 수 있어요? 제가 회사 근처로 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