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94화 〉8. 스승 (94/100)



〈 94화 〉8. 스승

고대의 궁궐을 떠올리게하는 거대한 건물이었다.




옛스런 멋이 남아있는 석조를 기반으로 군데군데 금속을 섞어넣은 기둥들과 아치는 거주하는 이의 위엄과 영향력을 보여주듯 거대했다. 사람만한 기둥과 그 위에 놓인 아치, 그 너머엔 뽀죡하게 서있는 첨탑같은 지붕이 제 모습을 흘낏 드러냈다. 에메랄드 컴퍼니완 다르게 별다른 조각이나 무늬는 없었지만 어디 한 군데 모난 곳 없이 균일하게 매끄러운 표면은 이 건물에 얼마만큼의 노력이 들어갔는지 여실히 보여주었다.



고대의 지배자들이나 기거했을 듯한 건물. 다만 고대의 그것과 다른 것이 있다면 석조와 금속으로 이루어진 벽을 타고 오르는 파이프와 톱니바퀴이다. 마치 건물을 껴안듯 사방을 타고 기어오르는 황동색 파이프와 톱니바퀴는 예술적으로 배치되어있어, 고색창연한 건물을 좀 더 돋보이게 해줬다. 옛스런 고아함과 시대별로 뒤섞인 단아함.


로브를 뒤집어쓴 도로스와 닥터 윌슨은 입을 벌렸다. 어지간한 건물 두 세 채를 합친 듯한 규모도 규모였지만, 그 외형 또한 압도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도로스는 이런 건물에 사는 이의 위치가 얼마나 높을지 생각해보곤 긴장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와...정말 대단한 사람을 만난다는 게 이제야 좀 실감이 나네요."



"동감,입니다. 이런 훌륭한 건축,물이라니! 지어진지,는 대략 700년 이,전  인듯 합니,다만, 온갖 양식,이 뒤섞인  보면 지금,까지 계속 개보수,를 해온 것 같습,니다. 보관,상태도 최상입,니다!"


닥터 윌슨은 벽이라도 핥을 것같은 기세로 기둥과 벽을 쓸어내렸다. 벽에  발로 바짝붙은 모습은 어쩐지 기이한 생리적인 혐오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나마 로브로 전신을 가려서 그렇지,  몸이었다면 당장이라도 도망쳤을 지도 모른다.




저대로 내버려두면 하루종일 벽과 기둥만 만져대고 있을  틀림없어, 프로바움은 그를 제지했다.

"그쯤하고 가세. 아무리 새벽이라 사람이 없다고 해도 눈에 띄는 행동은 자제하게나."



말을 마친 프로바움은 로브 깃을 여몄다. 주위를 훑는 눈엔 텅 빈 거리만이 들어왔다. 새벽이라 인적이 드물었으나 눈은 어디에나 있는 법이다.


닥터 윌슨은 열망 담긴 눈으로 벽을 바라보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곤 조금 떨어졌다.

도로스 또한 익숙치않은 로브를 만지작 거렸다. 치렁치렁한 로브 때문에 걸을 때마다 방해되는 게, 한시 빨리 벗고 싶은 마음 가득이었다.


"그나저나 생각 외로 편하게 들어와서 다행이네요."

"모두 스승님 덕분일세."

자랑스러움이 미약하게나마 섞인 그의 말에 도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턱대고 하겐의 입구로 향했을 땐, 심장이 철렁하고 내려앉는 줄 알았다. 정말로 정면대결로 모두 뚫고 지나가는 건가 싶었던 까닭이다.


물론 사전에 이야기가 다 되어있다고 했으니 그럴리는 없었다. 그러나 프로바움의 언질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입구를 지키는 치안대와의 거리가 좁혀질 수록 자꾸만 무기로 향하는 손을 제지하기 힘들었다.

다행스럽게도 프로바움의 말마따나 이야기가 되어 있어서 망정이지, 도로스는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서늘했다. 치안대와 한바탕 붙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생각해보면 그는 도리질을 쳤다. 도저히 밝고 긍정적인 미래는 보이지않았다.



"이런 로,브 하나로 편하게 돌아,다닐 수 있다니, 새로운 발견입니,다. 사람의 인지능력은 의,외로 간단히 무용지물,이   있다고 배웠습,니다만, 실제로 해,보니 기대이상의 결과입니,다."



프로바움이 입구를 지키던 치안대에게 받은 게 그들이 걸치고 있는 로브였다. 로브를 뒤집어쓰고 대로가 아닌 골목을 경유하니, 도착 할 때까지 어떠한 잡음도 없었다. 도로스는 닥터 윌슨이 말하는 것 대부분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러려니 했다. 그다지 중요한 것처럼 들리진 않았기 때문이다.



"도시에선 다들 제 한 몸 챙기기 바쁘니 말이오. 남에게 관심을 가질 오지랖 넒은 녀석들은 드물지. 그리고 이곳은 북부니 말일세."

자동인형이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북부. 합리성을 따지는 자동인형들이 그리 쉽게 남에게 흥미나 관심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속뜻을 알아들은 닥터 윌슨은 그 의견에 동의했다.


"그리고 이미 스승님께서 전부 손을 써두셨다네. 용병들이라면 지금쯤 다들 거하게 취해서 잠들었겠지."

주점마다 누군가가 공짜 술을 돌렸다오, 프로바움은 덧붙였다. 용병이란 놈들치고 술을 싫어하는 놈은 없으니 대부분 주점에 머물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약간의 잡담은 웅장한 건물의 문이 열리자 자연스레 사그라들었다.



 너머로 언뜻 불빛같은 것이 보였으나 원체 어두컴컴해서 자세히 볼 수 없었다. 새벽이라 최저로 낮아진 인공조명의 광량 때문에 더욱.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눈짓으로 대화를 나눈 도로스들은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이곳까지 온 이상, 물러나봤자 갈 곳은 없었다.




흘낏 프로바움을 곁눈질한 도로스는 잔뜩 긴장한 그의 얼굴을   있었다. 지금까지 보여줬던 관록과 여유는 다 어디에 내팽겨쳤는지, 갓 사회에 나온 새내기마냥 안절부절못하는 꼴이다. 카지트 또한 그것을 알아봤는지, 그를 툭툭 건드렸다.




프로바움은 그제야 자기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깨닫곤, 표정을 바로했다. 어린 녀석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프로바움을 앞세워 도로스들은 문 안으로 발을 들이밀었다.

건물 안은 생각보다 어둡지 않았다. 군데군데 정체모를 푸르스름한 빛들이 어스름히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빛에 의지해, 모두는 건물 안의 풍경을 대략적이나마 파악 할  있었다.



"흥미,롭습니다."


닥터 윌슨의 말에 모두는 무언으로 동의를 표했다. 건물 안은 온갖 잡동사니로 가득했다. 딱히 층수의 구분이 없이 천장은 외형 그대로 높았으며 방의 구분도 없이, 그들이 들어온 입구부터 건물의 끝까지 전부 하나의 공간이었다.

그 뻥 뚫린 공간은 셀 수도 없이 많은 잡동사니들로 가득했다. 무언가의 금속 파편, 톱니바퀴, 파이프 쪼가리. 조그마한 기계부품부터 용도를   없는 기계들까지. 크기도 제각기, 부피도 제각기였다. 다만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 무언가의 부품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중간중간 보이는 푸르스름한 불빛들은 직사각형의 기계에서 새어나왔다. 아무렇게나 널부러진 그것들의 용도는 도저히 알 수 없어 보였다. 도로스는 어쩐지 기계들이 잠든 묘지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으엇!"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그는 무언가에 발이 걸려 넘어질 뻔 했다. 몸을 바로하고 바닥을 쳐다보자, 알 수 없는 검은 선들이 얽히고 설켜 바닥을 기고 있었다. 그것들은 벽을 타고 사방으로 퍼져, 그들이 들어온 입구 정반대편으로 모여있었다.




천천히 선을 따라 움직이던 시선은 이내, 한 곳에서 멈췄다. 입구의 정반대편, 모든 선들이 모이는 곳. 그곳엔 무언가의 형체가 있었다. 도로스는 프로바움을 바라보곤 깨달았다. 발을 들일 때부터, 그의 시선은 그곳을 향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분명했다.




"후후, 왔구나."

무언가의 형체로부터 목소리가 나왔다. 낮고 무거운, 그러면서도 따뜻한, 깊이있는 목소리였다. 도로스들은 홀린   형체를 향해 걸었다. 어느샌가 형체의 앞에 선 프로바움은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스승님, 감사합니다. 덕분에 무사히 도착 할 수 있었습니다."



어느정도 거리가 가까워지자, 도로스들은 프로바움의 스승이라는 자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의자에 앉아있는 그 모습은 거대했다. 일행 가운데 가장 큰 카지트보다도 팔 하나만큼 더  키. 덩치 또한 키에 걸맞게 무게감이 있었다. 황동빛과 강철의 둔탁한 은빛이 뒤섞인 몸체는 흐릿한 조명에 비쳐 기이한 색으로 물들었다.



달그락. 달그락.


치이익.




그의 몸에 달린 파이프와 톱니바퀴는 일정한 소음을 만들었다. 마치 도시 한 가운데 우뚝  시계탑같다.  시계탑의 뿌리는 검은 선들에 칭칭 휘감겨 있었다. 그러나 구속되어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으음, 조금 어둡구나."


작게 읊조린 스승은 거대한 손으로 무언가 손짓했다. 그러자 사방이 천천히 밝아지기 시작했다.


당황한 도로스들은 갑작스런 빛에 눈을 찌푸리며 재빨리 광원을 찾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프로바움의 스승의 머리보다 한  더 높은 곳에 위치한 램프들이 곳곳에서 빛을 밝히고 있었다. 그러나 무언가 이상했다. 무언가 달랐다. 기존의 가스식 램프는 이렇게 천천히 불을 밝힐  있도록 조절 할 수 있을 만한 게 아니다. 그 광량은 또 어떤가. 기존의 램프따위완 비교도  수 없을 만큼 밝다.




마치 천장의 인공조명의 일부를 떼어온 것 같다고, 도로스는 생각했다.


빛이 들어오자 그들은 좀 더 자세히 스승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들보다 키도 덩치도  푸근한 인상의 할아버지가 몸을 앞으로 수그린 채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가에 쓴 안경을 닮은 기계장치 너머로 금속 눈이 말갛게 그들을 응시했다.



합리성을 대표하는 자동인형과 푸근한 인상이란 단어는 서로 양극단에 위치해 있지만, 어째서인지  앞의 자동인형의 모습엔 상반되는 두 단어 사이에 괴리감이 느껴지지않았다. 기이하고 신비한 인물. 마치 손자를 돌보는 할아버지같은 눈엔 따뜻한 감정이 가득했다.



"모두 잘 왔구나. 나는 프리드리히라고 한단다. 프로바움의 스승이지. 우리 프로바움과 잘 지내주어서 고맙구나."


우리 프로바움?


마치 어른이 아이를 다루는 듯한 말투다.



도로스, 카지트, 그리고 닥터 윌슨은 서로 못들을 걸 들었다는 듯 서로를 바라봤다. 방금 대체 뭘 들었냐는 시선. 그리고 대충 같은 걸 들었다고 확인하자, 도대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 지 그들은  수 없었다.



도로스는 자신이 방독면을 쓰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닥터 윌슨과 카지트의 표정은 정말로 괴상했기 때문이다.




세 사람의 눈길이 프로바움에게 향하자, 프로바움은 어째선지 원인모를 수치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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