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93화 〉8. 스승 (93/100)



〈 93화 〉8. 스승

"한 가지 방법이 있네."


그의 얼굴엔 굳은 결심이 어렸다.



"..어떤 방법이죠?"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도로스는 질문했다. 관록인듯 자동인형이라면 어쩌면 그들이 놓치고 있던 길을 제시해 줄 지도 모른다.



그러나 프로바움은  방법이 무엇인지 일행에게 말해주지 않았다. 나중에 알려주겠단  마디를 남긴 그는 홀로 하겐으로 향했다. 도로스들이 적극만류했으나, 한  마음먹은 고집불통 영감을 말릴  있는 위인은 아쉽게도 일행 가운데 없었다.


"프로바움은 어떤 방법을 쓸까요? 전 도저히 생각나는게 없는데.."


"저도 비슷합,니다."


둘은 카지트를 바라봤다.

"글쎄..혼자서 전쟁이라도 벌이러 간 건 아닐까."



물론 그럴 리는 없지만, 덧붙이는 카지트의 말은 두 사람 귀에 들리지않았다. 둘은 사색이 된 표정으로 서로 마주보았다.



"설마.."

"아니, 그래도.."


그동안 봐온 프로바움이라면 그럴 것같진 않았지만, 욱하는 다혈질을 생각하면  다르게 느껴졌다. 왠지 수틀리면 무기부터 겨누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영감을 믿자."



좌불안석이었지만 둘은 카지트의 말에 수긍했다.



"그런데 혼자서 잘 도착 할 수 있을까요? 그리 멀지 않은 거리긴 해도 길잡이도 없는데."


"아마 어찌 도착 할 수 있긴 할 거야. 도착하는데까지가 어렵지."



"프로바움이,라면 길을 헤멘,다고 하더라도 그리 쉽,게 돌연변이들에게 당하,진 않을 것 같,습니다. 다만 걱정,되는 건 어떻게 검문을 통과,할 지..입니다."


큰 소란이 있었으니 하겐의 검문이 한층 강화될 것은 자명했다. 그것만으로도 까다로운데, 최악의 경우엔 에메랄드 컴퍼니 하겐 지부에서 대대적으로 수배지를 배포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아니, 승진길이 막혀 눈이 뒤집힌 지부장이라면 이미 행동에 들어갔을 게 틀림없다.

그렇다면 하겐으로 들어가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검문이고 뭐고 사람들의 눈에 띄는 이상 곤경에 처할 테니.


"떼를 써서라도 따라갈 걸 그랬나.."

도로스는 침울하게 중얼거렸다. 물론 프로바움의 굳은 표정을 보았기 때문에 떼를 쓰건 뭐건   없었다. 그래도 지금 이렇게 걱정만 하느니 그렇게라도 했어야 했다며 도로스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도로스들의 기다림과 걱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깊어져만 갔다. 만약 프로바움이 반나절이나 지나서도 나타나지않았다면, 도로스는 그를 찾아나섰을 것이다.

잔뜩 지친 얼굴의 프로바움은 어딘가 몇 십 년은 더 늙어보이는 듯 했다. 고뇌섞인 지친 한숨을 내뱉은 그는 모닥불 근처에 대충 털썩 주저앉았다. 도로스들은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낯선 그의 모습에 차마 물을 수 없었다.




한동안 침묵을 유지하던 그는 대뜸 입을 열었다.


"오늘은 이곳에서 묵도록 하세. 내일 새벽쯤엔 하겐에 들어갈 수 있을 거라오."

도로스는 시간을 체크했다. 저녁 아홉시를 조금 넘긴 시간. 프로바움이 말하는 새벽이 정확히  시인지는 모르겠지만, 못해도 서너 시간은 족히 지나야 할 터다.

"..어떻게 된 건지 물어봐도 될까요?"

"..생각을 정리 할 시간을 주게나. 자세한 건 나중에 말해주겠네."

피곤한  얼굴을 쓸어내린 그는 옆으로 돌아누웠다. 뭔가 피치못할 사정이 있는 것 같았다. 도로스는 닥터 윌슨과 시선을 교환하고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도 나중에 말해주겠다고 하는 것을 보니, 말 못할 일은 아닌 듯 했다.



돌아누운 프로바움은 말이 없었다. 생각을 정리하느라 정말로 들리지않는 건지, 아니면 못들은 척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걱정 반 궁금함 반인 마음으로 닥터 윌슨과 도로스는 힘겹게 불침번을 섰다.

빈번하게 시간을 확인하던 둘은 새벽 한 시를 넘어 두 시에 가까워지자 아예 프로바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카지트또한 어떤 방법을 썼는지 궁금했는지 은근하게 프로바움을 곁눈질했다.




프로바움이 어떻게 하겐으로 들어갈 방법을 마련했을지 온갖 음험하고 무서운 상상이 연기처럼 퍼졌으나 프로바움이 몸을 일으키자 흩어졌다. 어딘가에 숨겨져있는 그의 콜렉션 하우스 -보통은 이런 걸 무기고라고 칭한다. -에서 무기를 털어와 치안대와 전면전을 벌일 거라는 둥 이런저런 추측을 늘어놓던 인간과 귀뚜라미는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물었다.



도로스들을  번 둘러본 자동인형은 짧은 한숨과 함께 피식 헛웃음을 흘렸다.  나름 호기심을 숨긴다고 숨겼지만 다 티가 나는 까닭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일행들이 나누던 허무맹랑한 추측들을 고스란히 듣고 있었다.



프로바움은 어쩐지 지금까지 진지하게 고민했던 제 모습이 바보같다고 느꼈다.



"허 참, 내가 어떻게 하겐 안으로 들어갈 방법을 마련했는지, 그게 그렇게 궁금한가?"


프로바움의 질문에 도로스들은 딴청을 피웠다. 프로바움은 한 손으로 얼굴을 덥고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못말리겠군. 알겠네. 말해주지."


한숨을 내쉬고 거칠게 머리를 헝클어뜨리는 그의 모습에 도로스는 미안하다는 얼굴을 했다. 물론 방독면에 가려서 보이진 않았다.




"그, 뭐냐, 말하기 힘들면 안알려주셔도 괜찮아요."


"허이구, 자네들이 궁금한 걸 잘도 참겠소. 옛 속담에 호기심은 고양이를 죽인다던데, 순 거짓말이군 그래. 고양인 가만히 있는데 다른 녀석들이 궁금해서 죽겠소."

얌체스런 고양이따위를 좋아하지않는 카지트는 저를 고양이에 비유한 프로바움에게 눈을 부라렸다.



"난 고양이가 아니라 살쾡이야."

물론 프로바움은 카지트의 항의를 가볍게 묵살하고 설명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흠, 어디서 시작해야 할까. 좀 중구난방이겠지만 그냥 듣게. 설명하는   못하니."


흠흠, 하고 목을 가다듬던 그는 조금 생각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일전에 내가 말한 적 있는  같은데, 내 스승님은 정말로 대단하신 분이네."


프로바움은 분명 전에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 도로스와 닥터 윌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불퉁한 카지트 또한 아닌 듯 하지만 귀를 기울이고 있는 듯 했다.



"그래,  분은 정말 대단하신 분이지..현존하는 3세대 자동인형 중 한 분이시니까."



3세대 자동인형.



프로바움은 이전에 자신이 4세대라고 했다. 도로스는 문득 궁금증이 이는 것을 느꼈다. 프로바움의 나이가 근 세자릿 수인데, 그렇다면 가장 젊은 세대는  세대 일까?

"그런데 가장 최신? 젊은? 세대는 몇 세대인가요?"

"아마 7세대인가 그 쯤일 걸세. 나도 관심이 없어서 그리 자세히는 모르겠구만."




"현,존하는 3세대라고 하,셨는데, 3세대는 현,재 총  분입,니까?"




"총 세 분이라네. 내 스승께선 그 세 분 중 한 분이지. 1세대에 가장 근접한 만큼 지식의 열화가 거의 없고, 가장 오래되었기 때문에 쌓아올린 지식 또한 감히 우리완 비교할 수 없으시지. 그렇기에 모든 자동인형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분이시라오."




스승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는 부모를 자랑하는 아이마냥 순수하고 긍정으로 가득  있었다. 제 나이와 맞지않는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꽤 보기 좋았다. 스승의 위대함에 대해 일장연설을 펼치던 프로바움은 일행들이 그를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을 깨닫곤 흠흠, 헛기침을 했다.



타오르는 불꽃 때문인지 모닥불에 비친 황동색 얼굴엔 조금 붉는 기가 도는 듯 보였다.



"아무튼,  그런 스승님께 폐를 끼칠까봐 북부를 떠났네. 나같은 4세대 결함품이 그분의 도제로 있어봤자 그 명성에 누가   아니겠는가."



눈을 내리까는 모습에선 복잡한 상념이 매몰아쳤다. 모두 뒤섞여 거뭇거뭇하게 변한 그의 감정 속에서, 일행들은 아쉬움과 미안함의 파편을 잡아챘다. 하지만 스승님께선 아직 다른 도제를 만들지않으신 듯 하군, 나지막하게 말을 흘리는 프로바움의 얼굴에선 일말의 기대와 불안함이 얼핏 보였다.

그는 재빨리 표정을 고치고 다시 말을 이었다.

"스승님이라면 하겐에서, 아니, 북부에선 거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하신다네. 그 에메랄드 컴퍼니라도 북부에서만큼은  수 접어줘야 할 테지."



도로스들은 어째서 프로바움이 스승의 이야기를 꺼냈는지 슬슬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스승님을 찾아가신 건가요?"


"그래, 자네 말대로라네. 나는 스승님을 찾아갔지."




도로스의 물음에 프로바움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에겐 정말로 힘겹고도 무서운 결정이었다네. 일언반구도 없이 도망친 나를 어떻게 생각하실까. 70년이 넘도록 나를 찾지 않으셨는데,  이미 잊으신 건 아닐까. 정말, 불안했지."

프로바움은 먹먹해진 가슴을 부여잡고 눈을 감았다. 그제야 일행은 북부에 올 때부터 프로바움이 보여준 고뇌의 편린을 이해  수 있었다. 감수성이 풍부한 닥터 윌슨은 벌써부터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있었다.

"그래서, 만나셨어요?"



"그래, 아주 잠깐 뵈었지. 그분은 여전하시더구나. 그리고..다행히도 날 잊지않으셨어."

프로바움은 속에서 뭔가 북받쳐 오르는 것을 느끼곤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는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제 일행들 앞에서 추한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이다. 프로바움은 다른 일행들이 뭐라고 입을 열새라 대화를 마무리지었다.

"어쨌든, 그분덕분에 하겐에 들어갈 수 있을 거라오. 아마 지금쯤이면 슬슬 준비가 되었겠지."

슬슬 가세. 프로바움의 말에 도로스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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