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화 〉8. 스승
멕도너와 프로바움, 말릭과 카지트.
넷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먼 거리였지만 카지트와 프로바움은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무표정했던 추격자들의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지는 게 똑똑히 보였다. 고릴라 계통 수인의 입이 천천히 크게 열렸을 때, 그들은 멕도너가 무슨 짓을 할 지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너어어!! 이 빌어먹을 자식!!"
저 멀리서 머리 끝까지 화가 오른 고릴라가 포효했다. 그 소리가 얼마나 컸는지, 주위의 소음이 일시적으로 멈췄다. 그의 근처에 있던 사람들은 귀를 잡고 주저앉았다. 대로를 오가던 사람들과 치안대 마저 무슨 일인가 하고 멕도너와 말릭을 쳐다봤다.
"이런 빌어쳐먹을.."
프로바움은 저도 모르는 새에 입에서 욕지거리를 흘렸다. 카지트 또한 헬쑥한 안색으로 추격자들을 노려보았다.
어쩌면 저들이 이미 하겐 안으로 들어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의 경우를 위해 전투의 스페셜리스트인 둘만 온 것이 아닌가. 그러나 하필이면 이 최악의 타이밍에 마주칠 줄이야!
"쯧, 이건 또 무슨 재수없는 경우인가."
운도 지지리도 없었다. 아니, 그나마 도로스와 닥터 윌슨이 이 자리에 없다는 사실이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다. 지금 당장 보이는 건 저 두 녀석 밖에 없다는 사실 또한.
프로바움과 카지트는 당장 뒤돌아 뛰었다. 재수가 없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고, 하필이면 하겐의 출입구는 말렉과 멕도너를 등지고 있다니! 그들을 피해 달리니 자연히 하겐의 안쪽으로 향하게 되었다.
달리는 와중 슬쩍 뒤를 돌아보자, 인파를 마구 헤치며 달려오는 둘의 모습에 프로바움은 질린다는 듯한 얼굴을 했다. 고릴라의 강한 힘에 나뒹구는 사람들이 내지르는 비명이 뒤에 가득했다.
치안대 몇 명이 멕도너를 만류하기 위해 달라붙었지만, 싸움이 되지 않았다. 고릴라의 거력에 민간인, 치안대 할 것 없이 전부 나가떨어졌다. 쓰러진 치안대원들 중 몇몇은 총을 꺼내들었으나 쏠 수 없었다. 저돌적인 멕도너의 돌진에 공황상태에 빠진 인파 때문이다.
프로바움과 카지트 역시 사람들 틈을 어떻게든 헤쳐나가고 있지만, 비명을 지르며 사방팔방으로 달려나가는 사람들의 물결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느라 속도가 그리 빠르지 않았다. 그에 반해 거슬리는 걸 전부 내동댕이치며 달려오는 추격자들의 속도는 그들의 상상 이상으로 빨랐다.
이 페이스대로라면 조만간 따라잡힐 게 분명했다.
"젠장! 카지트, 자네 뭐 좋은 생각 없나? 난 총을 쏘는 것 밖에 생각이 나지 않는군!"
황동빛 자동인형은 우글거리는 비명소리에 눈살을 찌푸리며 크게 외쳤다. 외치는 내내 텅텅, 하고 주위 사람들과 부딪혀 몸이 흔들렸다. 등에 맨 페퍼박스의 무게 때문에 중심을 잡기가 그리 쉽지 않았다. 기우뚱 쓰러질 뻔 하기를 몇 번, 프로바움은 애써 균형을 다잡았다. 이런 정신나간 군중들 사이에서 쓰러진다면 그걸로 끝이다.
갑작스런 멕도너의 폭력에 공황상태에 빠진 사람들에겐 쓰러진 이를 일으켜 줄 만한 여유나 생각따위가 일체 없었다. 제 아무리 단단한 자동인형의 몸이라고 해도 세 자리 쯤 되는 사람들의 발길질에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꺼져라아아!! 또다시 멕도너의 포효가 사람들의 비명소리를 내리눌렀다. 홀로 인파를 가르며 달려오는 모습은 사람이라기보단 숫제 괴물에 가깝다. 휘두르는 팔에 맞은 사람들은 잠시 허공에 붕 뜨더니, 그 주변의 다른 사람들과 부딪혀 떨어졌다. 그들은 곧 군중의 발로 뒤덮혔다.
카지트는 머리를 굴렸다.
프로바움은 그처럼 균형감각이 뛰어나지 않으니 몸을 추스리는 것만 해도 힘에 부치는 듯 했다. 등에 맨 무기의 무게 때문에 더 그럴 것이다. 지금 믿을 건 그의 머리 밖에 없었다.
치안대?
총도 쏘지 못하고 뒤섞인 인파 때문에 이도 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는 녀석들은 쓸모가 없어 보였다. 따로 지원이 오긴 하겠지만 아무래도 그전에 추격자들에게 따라잡힐 듯 했다. 또한 둘의 입장에서도 치안대의 증원은 곤란한 일이다.
상황이 조금 진정된다면 녀석들은 추격자들이 누구를 쫓고 있었는지 조사 할 것이 틀림없다. 그리곤 카지트와 프로바움을 찾아내겠지. 에메랄드 컴퍼니의 정보력을 생각해 볼 때 자연히 지부장의 귀에 들어갈 것이 틀림없었다. 승진 길이 막힌 지부장은 어떻게든 둘을 잡아내기 위해 무슨 짓이든 벌일 테니,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 될 것이다.
어떻게든 여기서 추격자들을 끊어내지 않으면 안된다. 카지트는 몰려오는 초조함에 입술을 질끈질끈 씹었다. 또다시 결단의 공포가 그를 잠식했다. 눈이 침침해지고 호흡이 흐려진다. 차가워지는 손끝과 조금씩 떨리기 시작하는 손발. 카지트는 그것을 생생하게 느꼈다.
불안한 가정들. 실패에 대한 공포.
카지트를 뒤덮은 음울한 그림자를 뚫고 손 하나가 불쑥 그의 어깨에 닿았다. 신기하게도 차가웠어야 할 금속의 손길은 따뜻한 느낌이었다. 흐린 시선을 옆으로 돌리자, 어떻게든 인파를 헤치고 카지트 근처로 다가온 프로바움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에게 부딪혀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럼에도, 카지트의 귀엔 그의 말이 똑똑히 들렸다.
"정신차려 이 친구야! 언제까지 피할 건가! 지금 믿을 건 자네 밖에 없어!"
그래, 피하기만 할 수는 없지. 프로바움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카지트는 고개를 숙였다. 어지러운 마음 속, 수많은 상념과 두려움이 스쳐지나갔다. 정말 가능할까? 할 수 있을까?
"내가..할 수 있을까?"
"아 글쎄, 할 수 있다고 몇 번이나 말하나! 난 길잡이가 아니라네. 자네가 왜 그렇게 바뀌었는지, 어떤 기분인지 난 잘 모르지. 그래도, 우리 길잡이를 걷어차는 것 정도는 할 수 있다네."
프로바움은 동물 계통의 수인처럼 으르렁 거렸다. 카지트는 난폭한 프로바움의 말에 흐리게 웃었다. 조금 더 질질 끌었다간 열 받은 영감한테 정말로 걷어차일 것만 같았다. 천성이 용병이라, 상냥한 위로보단 이런 폭언이 좀 더 효과적이었다.
카지트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불안감을 애써 삼켰다. 할 수 있는가 어쩐가 따위가 아니라, 해야한다. 하지않으면 안된다. 그는 힘껏 호흡을 다스렸다. 후들거리는 다리에 애써 힘을 불어넣었다. 신기하게도 전보다 몸에 활기가 도는 듯 했다. 어쩌면 프로바움의 강요 때문일지도 모른다.
프로바움의 팔을 잡아챈 그는 방금 전까지 시간을 보냈던 주점으로 달려갔다. 인파는 대로에 집중되어 있었던 까닭에 샛길을 이용하자 한층 더 속도가 붙었다. 그러나 그것은 상대도 마찬가지다. 슬쩍 뒤를 바라보자, 분노한 고릴라와 고양이가 쫓아오는 것이 보였다. 그 거리는 전보다 가깝다.
주점의 문을 발로 걷어차고 들어가자, 모든 이들의 이목에 그에게 쏠렸다. 험상궃은 얼굴들이 이건 또 무슨 참신한 시빈가 하는 눈길로 그를 바라봤다. 그러나 그는 주눅드는 일 없이 큰 소리로 목청을 높였다. 목소리가 떨리지않게, 최대한 배에 힘을 주면서.
"에메랄드 컴퍼니의 수배자가 밖에 있다! 고양이 녀석과 고릴라! 총 이 십만!"
그 말에 잠시 침묵으로 물들었던 주점 내부는 이내 흥분의 도가니로 달아올랐다.
"어디 어디?"
"내가 먼저다!"
"두당 십 만! 이십 만!"
카지트는 프로바움을 데리고 주점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돈에 눈이 먼 용병들이 모조리 주점을 뛰쳐나갔다. 프로바움은 카지트의 생각을 깨닫고 씨익 웃었다. 인파에서 벗어나자 한층 거동이 편해진 자동인형은 살았다는 듯 큰 한숨을 내쉬곤, 입을 열었다.
"봐봐, 자네도 할 수 있잖은가?"
프로바움의 말에 카지트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불안과 초조, 걱정이 그의 미소에 묻어났다. 무엇이든 처음이 어려운 법이지, 자동인형은 피식 웃었다. 순간, 프로바움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번쩍였다.
"그러고보면 우리도 둘, 저쪽도 둘, 합쳐서 넷이군. 어쩐지.."
프로바움이 욕설을 내뱉고 있는 사이에, 그들을 따라잡은 멕도너와 말릭의 모습이 보였다. 카지트는 손가락으로 멕도너와 말릭을 가리키며, 여전히 주위를 두리번 거리고 있는 용병들에게 외쳤다.
"수배자들이 저기있다!"
용병들의 눈길이 추격자에게 쏠렸다. 방금 전까지 수배자들의 인상착의에 대해 떠들던 이들은 눈을 빛냈다.
"고양이 계통의 수인이랑 원숭이 계통의 수인..고릴라도 원숭이 잖아? 맞네!"
"방독면은 어디갔어?"
"벗었겠지, 멍청아!"
서로 아웅다웅 입으로 다투며 두 자릿 수의 용병들이 떼거지로 달려들었다.
전세역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