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9화 〉8. 스승 (89/100)



〈 89화 〉8. 스승

"것 참, 난감하군 그래. 마음같아선 당장이라도 발을 빼고 싶지만 이미 너무 멀리 왔네. 알아선 안될 사실들을 이미 너무많이 알아버렸어."



프로바움은 넌덜머리난다는 듯 머리를 거칠게 털었다. 그들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았다.

"지금 포기했다간 광신도와 에메랄드 컴퍼니 양쪽에 쫓기겠지."




"그럴 것 같아요.  생각엔 그냥 이대로 의뢰를 계속하는 게 나을  같아요. 광신도한테 무한동력 같은 걸 넘겨주느니 에메랄드 컴퍼니에 넘기는 편이 낫지않겠어요?"



"동감,입니다. 최악,보단 차악이 그나,마 나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최,소한 에메랄드 컴퍼니,는 대화,가 통하는 상대이니 말입,니다."

세 명이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카지트는 묵묵히 일행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다지 집중하고 있는 것 같진 않았다. 그러나 다른 일행들은 별 말 하지 않았다. 그의 심신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건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프로바움은 답답한 마음에 파이프의 연기에 몸을 맡겼다. 그러나 평소완 다르게 아무리 파이프를 펴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광신도냐 에메랄드 컴퍼니냐, 그것이 문제로다. 그러나 몇 번을 고민해봐도 답은 한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에메랄드 컴퍼니.

닥터 윌슨의 말마따나 최악보단 차악이다. 최소한 대화가 가능할 것 같은 쪽에 붙는 편이 좀 더 안전할 것 같았다. 혹시 알겠는가? 에메랄드 컴퍼니가 정말 1가구 1돌연변이같은 계획을 세워서 모든 사람들의 삶의 질을 높이려 할지?



말도 안되는 소리긴 하지만 그 속내를 읽을 수 없으니 아예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뭐, 그편이 제일 낫겠지."



광신도의 에메랄드 컴퍼니의 사이에 껴서 잠시 고민하던 이들은 이내 다시 마음을 다잡고 의뢰를 속행하기로 결정했다. 프로바움은 어쩐지 한 십 년은 더 낡아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무슨 놈의 의뢰가 이따위로 꼬이고 꼬인 건지.

"이보게, 카지트. 혹시  이야기 할 게 남아있나?"

"..한 가지  있어."



데우스 엑스 마키나시여! 도로스들은 충격적인 소식이 하나 더 있다는 것에 기겁을 했다. 이미 두 가지만으로 골이 땡겨오는데, 한 가지가 더 있다니! 프로바움은 진절머리 난다는 듯 손사래쳤다.



"젠장맞을. 혹시 그게 지금 당장 우리의 목숨을 위협하는 게 아니라면 나중에 말해줄 수 있는가? 정보들이 하도 머릿속에서 터져대니 골이 지끈지끈하구만."


프로바움은 인상을 찌푸리고 두 손가락으로 관자노리를 문질렀다. 도로스와 닥터 윌슨도 정보를 가장한 정신폭력에 피로해 보였다.


잠시 속으로 뭔가 생각하던 카지트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휴식을 취한 도로스들은 한시 빨리 하겐으로 향하고 싶은 마음 가득이었다. 광신도고 에메랄드 컴퍼니고 아주 잠깐이나마 전부 잊어버리고 푹신한 침대와 맛있는 요리를 먹고 싶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전에 할 일이 있다.

크리스탈의 작동원리를 알아보는 것. 외관상 조작가능한 버튼 따위가 달려있지 않기에, 어떠한 조건 하에 발동한다는 가정이 바로 그것이다. 가령 돌연변이가 가까이있을 때 작동한다던가 등의.




그걸 위해 그들은 주변의 돌연변이  마리를 사로잡았다. 돌연변이를 찾기야 쉬웠다. 파이프에 널린게 쓰레기 아니면 돌연변이니까. 도로스의 감은 돌연변이들이 없는 올바른 길을 가리키니, 감이 경고하는 곳으로 향해 돌연변이와 맞딱드릴 수 있었다.


그리고 전투의 스페셜리스트가 두 명이나 있으니 고작 네다섯 따윈 손쉽다. 눈 깜짝 할 사이에 돌연변이 한 마리만 남긴 도로스들은 돌연변이의 다리를 잘랐다. 악어의 몸에 사자의 머리가 붙어있는 돌연변이는 마구 발버둥 쳤으나 벗어나긴 역부족이었다.


닥터 윌슨은 크리스탈을 돌연변이에게 가까이 가져다대고 주먹을  쥐었다. 그러나 주먹 쥔 손 안의 크리스탈은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크리스탈을 두드려보고 휘둘러보길  차례, 결국 얻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닥터 윌슨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돌연변이를 크리스탈로 후려쳤다.



쿠억, 하고 돌연변이가 짧게 울부짖었으나 그뿐이었다. 크리스탈은 묵묵부답이었다.

"정말 모,르겠습니다. 으으, 알고싶,은  바로  앞,에 있는데 그게 불,가능 할 때, 이런 때,가 제일 싫습니,다!"




닥터 윌슨은 애처럼 방방 뛰었다. 커다란 귀뚜라미가 네 발을 휘두르며 방방 뛰는 건 그다지 좋은 광경은 아니었기에 일행들은 재빠르게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음, 너구리가 쥐었을 땐 빛이 들어왔고, 우리가 쥐면 묵묵부답..음, 무슨 주인을 가리는 것도 아니고. 어렵네요."



도로스의 혼잣말에 프로바움과 닥터 윌슨은 무서운 속도로 고개를 틀어 그를 바라봤다. 둘의 머릿속에선 거대한 폭죽이 연이어 펑펑 터지고 있었다. 학자의 감이 도로스가 옳다고 팡파레를 울리고 있었다.

정장을 입은 황동빛 자동인형과 왕방울만한 눈을 한층 더 크게  귀뚜라미의 시선에 도로스는 뭔가 실언을 했나 싶어 와들와들 떨었다. 지식인들이 발산하는 무형의 기세는 어지간한 돌연변이보다 난폭하고 흉험하며 무서웠다. 그는 재빨리 누이와 그의 마을사람들에게 작별인사를 올렸다. 누나, 미안. 먼저 갈 것 같아.



프로바움은 천천히 다가와 두 손으로 그의 어깨를 꽉 쥐었다. 도로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후욱, 하고 한층 거세진 숨소리가 방독면의 필터를 통해 새어나왔다. 바이스처럼 어깨를 부숴져라 쥔 두 금속 손에 도로스는 잔뜩 얼었다.


"도로스!"




"어,예,옛!"


"자넨 천재인가!"




"예,예? 예?!"


닥터 윌슨과 프로바움은 도로스를 둘러싸고 그를 칭송했다. 도로스는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없었다. 잔뜩 고조된 어조로 보건대 헹가래라도 할 것만 같아 도로스는 재빨리 카지트 뒤로 숨었다. 그러건 말건 둘은 도로스에게 관심을 거두고 서로 마주보며 토론을 시작했다.




"그래! 바로 그거였어! 어째서 그런 가정을 간과한 거지?"


"그,러게 말입니다. 아,마 그다지 흔,하지 않아서 그런,게 아닐까 싶습니,다. 주인을 가,리는 물건같은 건 옛날 이야기에,서나 나오는 거 아닙,니까?"


"그래, 자네 말이 맞소. 어린애들 이야기에서나 나오는 거지. 그런데 그게 설마 실존 할 줄은! 그게 아니면 말이 안돼!"


닥터 윌슨은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지식인들의 열의가 모닥불보다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다. 알듯모를듯 지식인들의 신경을 찔끔찔끔 자극하던 주제에 대한 대략적인 해답이 나오자, 대화는 물꼬를 트고 범람하기 시작했다.


"모,종의 수단으로 너,구리는 이 크리스탈에 자신,을 주인으로 각인,시킨 겁니다. 그러,니 주인이 아닌 저,희들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바로 그렇소! 그리고 주인으로 각인시킨 방법은 무한동력의 무언가를 이용했다고 생각하네만, 자네 생각은 어떤가?"


반쯤 무한동력을 만능의 성배 비슷하게 생각하는 프로바움의 의견에 닥터 윌슨도 그럴 듯 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비,슷한 의견,입니다. 무한동력 그 자,체에 분명 저희,가 알지 못하,는 힘이 숨,겨져 있는 게 분명합니,다. 애초에 돌연,변이를 조종한다는 말,도 안되는 일이 가,능하니, 그런  쯤,이야 불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도로스는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방독면이 그의 표정을 숨긴 탓에 그 누구도 그의 혼란을 눈치채지 못했다. 물론 방독면을 벗고 있었다고 해도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았으리라.



자동인형과 귀뚜라미는 서로의 의견에 살을 덧붙이기에 여념이 없었으며, 카지트 또한 우울한 태도를 고수한 채 상념에 잠겨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둘의 토론이 끝난 건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크, 좋구만. 대충 가설이나마 궁금한  풀리니 말이야."

"그러,게 말입니,다. 자꾸 신,경을 건드렸,던 걸 풀어,내니 속이  시,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정찰은 카지트와 내가 갔다오겠네."




"ㅇ,예?"


이야기를 따라가지 못한 도로스가 반문했다. 프로바움은 앓던 이가 빠진  같은 - 애초에 금속으로 된 이가 썩을 리 만무하지만 - 평온한 얼굴로 대견하다는 듯 도로스를 바라보며 설명했다.


"혹시나 추격자들이 하겐 안에서 우릴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잖은가. 에메랄드 컴퍼니 쪽도 조금 걱정되고. 카지트와 나라면 어지간한 일은 무사히 헤쳐나올 수 있다네. 그렇잖은가?"

프로바움은 주먹으로 카지트의 어깨를 툭 쳤다.

한참 상념에 잠겨있던 카지트는 깜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쯧. 자네, 너무 생각에만 빠져있지 말게나."



프로바움은 하겐으로 같이 잠입, 정찰하러 갈 것을 제안했다. 일행을 위해서 무엇이든지 할 준비가 된 카지트는 한치의 망설임없이 수락했다. 프로바움은 카지트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그를 끌고 나갔다. 둘의 사이로 스치듯 지나가는 자동인형의 목소리는 카지트 밖에 들을  없을 정도로 작았다.



"너무 과거에만 매여있으면 좋지않아. 아래나 뒤만 보고 걷는다면 금방 장애물에 부딪힐 걸세. 가끔은 아무 생각없이 움직이면서 어깨에 힘을 좀 빼줘야지."

자동인형은 비쩍 마른 살쾡이의 등을 두들겼다. 그 나름의 배려였다. 카지트는 그제야 프로바움이 도로스와 닥터 윌슨을 상대로 조금 과장되게 행동했다는  눈치챘다. 어쩌면 그를 데려가기 위해 밑밥을 깔았을지도 모르겠다.




"자, 그럼 다녀오겠소."

카지트를 데리고 다른 두 명과 거리를 벌린 프로바움은 카지트에게 넌지시 말했다.




"저쪽엔 도로스가 있으니 괜찮겠고, 하겐까진 자네가 길을 정해주게."




"..나,난.."


카지트는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곳에서 일렁이는 모닥불과  곁의 조그마한 그림자  개. 그의 눈에 갈등과 망설임이 가득했다. 그러나 프로바움은 생각 할 시간을 주지않고 몰아붙였다. 그의 경험상 이런 부류를 어떻게 다뤄야하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친구야, 자네가 갑자기 변해버린 이유는 대강 짐작이 가네. 감에 먹힌다, 였나?"

카지트는 눈을 크게 떴다. 프로바움은 카지트의 놀란 얼굴을 보고 훗, 코웃음을 쳤다.

"내 살아온 세월만 한 세기에 가깝네. 그동안 다양한 군상들을 봐왔지. 자네같은 이가 한둘이었는  아는가? 자네가 그렇게 피폐해진 걸 보면 어지간한 일은 아니었겠지."




카지트는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달싹였으나 이내 다물었다. 잠시  모습을 지켜보던 프로바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도 말일세, 지금 모습은  꼴보기 사납다네. 촐싹대긴 했지만 전의 모습이 더 보기 좋았다오. 그러니 자네를 다시 예전 모습으로 되돌리기 위해선 다시 자네가 길을 이끌게 해야지."



카지트는 복잡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를 믿어주는 프로바움에 대한 고마움, 그리고 약한 자신에 대한 실망. 복잡무비한 감정들이 그의 속에서 교차했다. 그러나 아직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한 번의 실패에 대한 대가가 무엇이었는지 이제 그는  알기 때문이다.




카지트는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하,하지만 실패한다면..더 이상 내 동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싶지않아.."


"그러니까 둘만 따로온게 아니겠는가. 나는 자동인형이니 그리 쉽게 당하진 않을걸세. 총탄 한  발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니."




옷이 상하는 건 좀 그렇지만 말일세, 프로바움은 덧붙였다. 노련함과 강인함을 갖춘 노장 앞에서 살쾡이는 고개를 숙이고 앞서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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