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8화 〉8. 스승 (88/100)



〈 88화 〉8. 스승
프로바움과 닥터 윌슨의 입에서 한 단어가 동시에 뛰쳐나왔다.



"남부."



카지트를 바라보는 프로바움의 시선엔 옅은 애잔함이 묻어있었다. 어째서 생각을 정리  시간을 달라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대략이나마 카지트와 남부의 관계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최대한 내색하지 않기 위해 파이프에 제 얼굴을 묻었다. 어째 오늘따라 몸 구석구석을 누비는 파이프의 연기가 진득하게 달라붙는 느낌이다.


"남부,라면 분명..십 년 전에 쿠,데타가 일어,났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 후,에 어떻게  영문,인지 다른 지방과 맞닿는 경,계를 전부 봉쇄했다고 들,었습니다."

대략  여년 전쯤부터 그림자 아래에서 사방으로 손을 뻗기시작한 광신도, 그리고 십 여전 전에 일어난 쿠데타. 어딘가 미묘하게 맞물리는 구석이 있었다. 등골을 훑어내리는 소름끼치는 감각. 거대한 흐름에 휘말리고 있는 것 같았다.

광신도들이 사방으로 퍼져있다면, 혹시 마을에도 있는  아닐까?




문득 도로스는 자신이 끔찍한 상상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역겨운 가정에서 올라오는 메스꺼움.




도로스는 애써 그 느낌을 부정하고 분위기를 끌어올리기 위해 입을 열었다. 더 이상 축 쳐진 분위기는 사양이었다.


"으음..그러고보면 그런 이야기를 전에 들은  같네요. 그런데..그..쿠데타가 뭔가요?"

어리숙한 청년의 질문에 닥터 윌슨은 아끼는 제자를 보는 선생님처럼 웃었다.  또한 도로스와 비슷한 심경이었다. 그는 처참한 마을의 기억을 잊기위해 애쓰려는 듯 일부로 밝게 행동했다.


"쿠데타,라는  무력,으로 정권을 무너뜨리,거나 빼앗는 일을 뜻합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정권이란 건.."


이어지는 설명에 과연, 하고 도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닥터 윌슨의 맞춤 교육은 효과가 뛰어났다. 단점이라면 가르침에 불이 붙은 닥터 윌슨이 그 어원과 파생어 등등을 장황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는  문제지만. 뒤에 갈 수록 도로스는 머리를 비우고 고개만 끄덕이기 시작했다.




아무튼 사이좋은 둘의 모습에 일행의 분위기는 많이 풀어졌다. 이런 밝은 분위기는 꽤나 오래간만이었다. 그동안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면서 고생만 잔뜩했던 터라 여유가 없었던 까닭이고. 거기에 맛이간 카지트의 모습도 한 몫 했다.



"것 참, 저렇게 죽이 맞기도 힘든데 말이지."




프로바움은 완전히 달라져버린 분위기에 황동빛 뺨을 긁적였다. 그래도 바뀐 분위기는 나쁘진 않았다. 하겐 근처까지 왔으니 숨을 돌릴 필요도 있고, 지금 당장 어쩔  없는 문제로 고민해봤자 느는 건 스트레스와 짜증 뿐이니, 차라리 잠시 잊고 있는 편이 나을 터다.




추격자들을 따돌리기 위해 빙 둘러왔으니, 혹여나 일행이 하겐으로 향할 것이라 예측한 추격자들은 유적과 거리가 제일 짧은 파이프를 감시하고 있을 것이다.



남은 문제는 북부 유적지의 전멸한 발굴대인데, 게름하르트와 독대를 청해서 추격자의 존재와 그동안 얻은 정보를 건넨다면 혐의를 벗을 수 있을 거라고 도로스들은 예상하고 있었다. 앞으로의 행보를 낙관하고 있으니 분위기가 좋을 수 밖에 없었다.




그와중에 프로바움은 조심스럽게 카지트의 안색을 살폈다. 조금 안정된 일행의 분위기와 동떨어진 그의 얼굴은 미세하게 일그러져있었다. 연륜의 힘으로 프로바움은 수척한 살쾡이의 얼굴에 옅게 깔린 고통과 자책을 읽을 수 있었다.


"그렇군요. 그런데 어째서 갑자기 국경을 닫아버린 걸까요?"




"글쎄..그거야 잘나신 윗분들께서 아시겠지. 광신도들이 남부에서 왔고 전역에 퍼져있다는  경악할만한 일이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네. 이보게, 카지트. 슬슬 그 너구리놈이 어떻게 돌연변이들을 조종했는지 들려주지 않겠나?"



프로바움은 은근슬쩍 대화 주제를 바꿨다. 사실 광신도의 본거지와 광범위한 조직력은 정말로 귀중한 정보였지만 다른 주제 또한 워낙 흥미를 자극하는 덕에 도로스와 닥터 윌슨은 군말없이 새로운 주제에 눈을 반짝거렸다. 귀뚜라미의 툭 튀어나온 눈이 부담스러울 법도 한데, 카지트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그는 품 안에서 예의 그것을 꺼냈다.



그 특이하지만 익숙한 외형을 본 일행 사이에 침음성이 흘렀다.



"끄으응, 이거 미치겠군. 내 눈이 맛이 갔나? 하긴 몇  년은 족히 되었으니 슬슬 갈아치울 때도 되었지."

도로스는 자동인형이 부품을 바꾸는 모습이 보고 싶었음으로 나중에 프로바움에게 부탁하기로 했다. 도로스와 닥터 윌슨은 카지트가 꺼낸 그것에게 집중했다. 일행의 흥미를 자극하는 그것은 손바닥 안에 들어올 크기의 크리스탈 직사각형이었다.



"저건 분명..유적 안에서 본 것 같은데요?"



"그,러게 말입,니다. 대체 저게 어,째서 여기에 있,습니까?"


정말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어조로 닥터 윌슨은 물었다. 카지트를 제외한 모두의 공통된 의문. 그러나 그것은 이내 하나의 추측으로 변했다. 소리없는 경악이 금속 파이프를 말없이 두들겼다.

"설마 저걸로 돌연변이를 조종하는 건가요? 그게 가능해요?"

"진짜 미치겠군. 생긴게 좀 다르긴 하지만 저건 유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유물인데..그럼 우린 지금까지 돌연변이를 조종 할  있는 물건을 주워왔다고? 끔찍한 농담일세."

"동,감입니다. 지난 번,에 탐사했던 서,부의 유적에서도 찾,을 수 있었습니,다만, 그 땐 분명 작동,하지 않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프로바움은 골치아프다는 듯 눈가를 쓸었다. 유물을 카지트에게서 건네받은 그는 유물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러나 나오는 건 없었다. 아무리 들여다봐도 끝이 깔끔하게 마감질 된 크리스탈 덩어리일 뿐.


닥터 윌슨 역시 구동원리나 특이한 점을 찾아낼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넘쳐나는 탐구열을 주체하지 못하고 여전히 살짝 흥분한 모습이었다.



"대체 이게 어떻,게 작동하는 겁,니까? 겉보기엔 어떤 트,릭도 담기지않은 수정,처럼 보입니다,만."


"나도 그게 의문이라오. 내 지금까지 본 숫자만 못해도 수 십 개는 될 거요. 그런데 저게 돌연변이를 조종한다는 이야기는 금시초문이오. 뭐, 혹시나 저게 정말로 작동한다면 그 원인은 뻔하겠지."


"무한동력 말인가요?"



도로스의 말에 프로바움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아니라면 뭐겠나? 광신도 놈들이 무한동력의 힘을 일부분이나 이끌어냈다는  확실하니, 저게 그 증거겠지. 카지트, 혹시 지금도 작동하는가?"

프로바움은 옅은 기대를 담아 물었으나, 돌아오는 답은 시원찮았다.

"아니. 더 이상 빛나지 않아."




빛이 어쩌구 운운하는 소리에 일행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게 무슨 소린가? 빛이난다고? 혼자서 발광한다 이 말인가?"



카지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곤, 그가 봤던 광경을 말했다. 무언가 조그마한 단서라도 얻기 위해 한 단어 한 단어에 주의를 기울이던 도로스들은 푸욱 한숨을 내쉬며 백기를 들었다.




"후우, 당최 알아먹을  없겠구만. 닥터, 자넨 뭐라도 알 것 같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발광했,다는 건, 이 수정,이 어떠한 에너지,를 품고 있다는 것,인데 그것을 공급  만,한 장치가 보이지않,습니다. 아마 무한동력,의 힘이 아닌가 싶,습니다만, 그 외엔 모,르겠습니다."



두 지식인이 모른다면 일행 가운데 누구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곰곰히 고민하던 프로바움은 문득 저 크리스탈 또한 사각형 모양이라는 것을 깨닫곤 4라는 숫자가 미치는 영향을 진지하게 고려했다. 어째 4라는 숫자는 정말 그와 악연이 깊은  했다.

"모르겠군. 답이 안나와. 이 건도 에메랄드 컴퍼니에 맡겨두는 편이 낫겠구먼. 날고긴다는 학자들이 머리를 맞댄다면 뭐라도 알아내겠지."


"그런데 에메랄드 컴퍼니는 이 유물들의 사용법을 알고 있었을까요? 사실은 유물들의 사용법을 알고있어서 마구잡이로 모은 게 아닐까요?"




가끔은 지식이 눈을 가릴 때가 있다. 아무런 지식이 없기에 오히려 사고가 자유로운 도로스. 허를 찌르는그의 의견에 모두는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물을 마구잡이로 모은 건 그 사이에 있을지도 모르는 무한동력을 손에 넣기 위해서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만..그렇게 볼 수도 있겠습니다."


"음, 그것도 일리가 있소. 만약 에메랄드 컴퍼니가 무한동력을 손에 얻는다면, 지금까지 모은 어마어마한 양의 유물들을 사용  수 있겠지. 지금까지 모은 양을 생각한다면.. 1가구 1돌연변이 같은 말도 안되는 짓도 가능하겠군."



허허, 하고 프로바움은 해탈한 것처럼 웃었다. 물론 말이 그렇다는 거지 정말로 그런 일이 일어날 리는 없었다. 그 수가 얼마나 되는지 조차 파악 할 수 없는 돌연변이. 그 강력하고 엄청난 물량은 대적 할 수 없는 절대권력을 줄 것이다.


무한동력의 주인이 광신도가 되든 에메랄드 컴퍼니가 되든, 그리 좋은 결과가 보이지 않았다.



"정말이지 빌어먹게도 끝내주는 상황이군."


프로바움은 속으로 온갖 욕을 퍼부어댔다. 4라는 숫자를 연신 곁들여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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