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7화 〉8. 스승 (87/100)



〈 87화 〉8. 스승

보고서를 쥔 손끝이 바르르 작게 떨렸다.




유쾌함과 불쾌함. 흥미와 짜증. 양극에 위치한 감정을 입가에 매달고 오스카는 웃었다. 슬쩍 드러난 육식동물의 송곳니가 불빛에 흐리게 빛났다. 집무실 곳곳에 박힌 호화스런 램프가 단아하고 고급스러운 실내를 비췄다.



그는 다시  번 눈을 빛내며 손에 쥔 보고서를 훑었다. 새로운 장난감은 어떤 의미로 그의 기대이상이었다. 어떠한 방법을 썼는진 몰라도 추격자들을 따돌리고, 나아가선 돌연변이들을 무찌르고 광신도까지 사로잡지 않았던가!



오스카는 정말 유쾌하다는 듯이 쿡쿡 웃었다. 과연 그의 아비가 고르고 고른 이들 다웠다. 그 경력조차 화려하기 그지 없었다.  세기 이상을 전장에서 살아온 자동인형. 남부의 특부수대, 레인저에 소속되어있던 살쾡이 계통의 수인. 스스로의 힘으로 밑바닥에서 기어올라 의학과 고고학  분야를 손에 거머쥔 곤충형 수인.

그 쟁쟁한 경력들 가운데   사람만이 초라하기 그지 없었다. 동부의 끝에 위치한, 촌락이라 부를 수도 없는 조그마한 마을. 그곳에서 마을을 구하기 위해 뛰쳐나온 청년.

오스카는 그의 얼굴을 떠올리곤 입가에 미소를 지울 수 없었다.


그 보잘  없는 청년은 다른 누구보다도 특별했다. 그가 생각하기엔 이 세상에서 가장.

머리 윗부분을 제외하면 털이라 부를 수 있는 게 없는 맨질맨질한 얼굴. 코가 조금 튀어나와있는 걸 제외하면 밋밋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특별하다.



다른 수인의  부분 따윈 가지지않은, 순수한 인간이었으니까!



그처럼 완벽한 인간을, 오스카는 본 적이 없었다. 기껏 봤었던 것들은 어디  구석이 수인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으니까. 심지어 몇몇은 툭하면 쓰러질 정도로 병약하기도 했다.

그에 비해서 도로스라는 인간은 어떠한가!



먼 동부 끝에서 대도시인 이곳까지 올 정도로 출중한 체력, 어지간한 돌연변이라면 상대  수 있는 능력까지! 그야말로 그가 찾던 완벽한 인간의 상像에 가까웠다.




특별한 자와 뛰어난 동료들. 그리고 그들이 벌인 사건들.




그야말로 소설 속에서나 나올 듯한 영웅적인 행보였다.



그러나,
지나치게 유능했다.

설마 제가 꾸미던 일의 단초를 밝혀낼 줄은 어찌 알았겠는가. 아직은 드러나서는 안된다. 무한동력을 완전히 활성화시키기 전까진. 오스카가 느끼던 불쾌함의 근원이 바로 그것이었다. 제가 짜올린 모략의 끝자락을 도로스들이 잡아내었다. 그대로 내버려둔다면 그의 아버지인 게름하르트의 귀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를 상대하기엔 아직은 부족했다. 수백 년간 힘을 키워온 에메랄드 컴퍼니의 숨겨진 저력은 절대로 만만히   없다. 머릿수도 머릿수거니와 쌓아온 경험과 기술의 능력치가 다르다. 또한 폐쇄된 남부를 제외한 다른 지역에서도 무시하지 못할 만큼의 영향력을 발휘하니, 힘이 충분치 못한 지금 그를 적대한다는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애초에 게름하르트 또한 오스카가 무슨 일을 꾸미고 있다는 건 눈치채고 있을 것이다. 다만 그 자세한 내막을 모를 뿐이지. 그렇기 때문에 그를  런던의 시장 자리에 앉히지 않았던가. 에메랄드 컴퍼니의 후계자가 아니라. 물론 남에게 소개   게름하르트는 오스카를 자신의 후계자라 칭했지만, 그것이 말 뿐이란 사실을 오스카는 알고 있었다.

뱀처럼 서류 더미 사이를 누비던 자칼의 시선이 이내 한 서류에 멈췄다.



도로스. 인간.



무한동력의 진정한 힘을 일깨울  있을거라 짐작되는 특별한 자. 그를 얻어야 한다. 그를 얻어야만 무한동력을 일깨울 수 있다.



오스카는 다른 서류 몇 개를 살폈다.



도로스가 살던 마을의 인적사항이 빼곡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그 중 그의 눈길이 도로스의 가족 항목에 닿았다.

"누나가..한 명 있습니까."



도로스와 같은 인간이란 점에서 그의 눈이 잠시 이채를 발했으나  뿐이었다. 언제죽어도 이상할 것 없는 병약한 상태는 선천적인 것 같았다.



불완전하군요, 오스카는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도로스와 같이 외모는 완전한 인간이었으나 그 속은 헝겊쪼가리처럼 너덜너덜한 것 같았다. 불완전한  써먹을 수 없다. 이미 몇 번이나 시도해본 끝에 내린 결론이다.



도로스처럼 외부와 내부가 완전했다면 도로스 대신 써먹을 수 있었을텐데. 그는 아쉽다는 입맛을 다셨다. 어차피 이런 불완전한 인간을 '사용'해봤자 얻을  있는 건 그리 많지 않았다. 차라리 도로스의 가족이란 점을 이용해서 그를 끌어들이는 쪽으로 써먹는 편이 낫겠지.


오스카는 대략적인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한 가지 문제에 봉착했다. 게름하르트의 눈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에메랄드 컴퍼니의 정보력을 얕보지 않았다. 파이프 속에서라면 몰라도 도시나 마을에서라면 어떻게든 도로스에게 접근을 해봐도 게름하르트의 귀에 들어가게 된다. 조그마한 단서도 주고 싶지않은그에게 있어선 골치아픈 일이다.



"그리고 문제는..이미 그들이 단서를 잡아냈다는 점이죠."



회백색 털의 자칼은 피곤한 듯 눈가를 쓸어내리며 기지개를 켰다. 곧게 뻗은 팔이 책상 위에 쌓인 서류 더미를  건드리자, 아슬아슬하게 쌓여있던 서류들이 주루룩 흘러내렸다. 잠시 눈썹을 살짝 일그러트리던 그는 한숨을 내쉬고 바닥에 펼쳐진 서류더미를 줍기 위해 상체를 숙였다.




그의 손끝이 서류에 맞닿았을 때, 그는 감전된 듯 몸을  차례 퍼뜩였다.  이상 서류 따윈 그가   아니었다. 천천히 드러나는 그의 눈엔 짙은 영감의 향기가 풍겼다. 재미와 흥미를 입가에 매걸고 그는 삐에로같은 웃음을 지었다.



"하하! 어째서 이제야 이런 걸 떠올린 거지? 판이 좋지않으면 아예 판 자체를 엎어버리는 되는데 말야!"

오스카는 재미있는 생각을 떠올렸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나 거기엔 대외적으로 알려진 온화함따윈 먼지  톨 만큼도 들어있지 않았다.






괴물의 뱃속같은 어둠. 구불구불하게 이어진 파이프통로는 마치 괴물의 창자를 닮아있었다.



그 거대한 창자 속  구석에, 작은 모닥불이 엉겨붙는 그을음을 떨쳐내고 있었다. 그 주위를 둘러앉은 이는 넷. 도로스 일행이다. 그들의 뒤로 기괴하게 뻗은 그림자가 거대한 대형 파이프의 한 켠을 메웠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런 것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모두 피곤에 절어있어 자잘한 것따위엔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북부의 대도시 하겐을 향해서 강행군을 펼친 도로스들은 이미 녹초가 되어 반쯤 뻗기 직전이었다. 체력의 한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강행군에 누구 하나 불만을 제기할 만도 했지만, 어떠한 불만도 심지어 휴식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 이유는 추격자들이나 에메랄드 컴퍼니 하겐 지부의 오해 등 다양하겠지만, 그들이 가진 일말의 죄책감또한 거기에 기여할 지도 모른다. 거의 망해버린 마을을 나온 뒤로 거의 도망치듯 속도를 올렸다는  그 증거이리라. 제 코가 석자라 남에게 신경 쓸 깜냥이 되지 않지만, 머리로는 이해해도 가슴은 좀 다르게 느끼는 것이다.

물론 거기엔 카지트의 침묵 또한 적지않은 영향을 끼쳤다.

끔찍한 비명과 함께 이어진 고문. 그는 분명 무언가 결정적인 단서를 얻었다. 그러나 카지트는 차일피일 대답을 미루었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단 이유와 함께 얼굴을 쓸어내리는 그의 모습에선, 차가운 파이프 속의 음울하고 끔찍한 냄새가 묻어났다 .




도로스들은 대체 카지트가 무엇을 알아낸 건지 알  없었다. 다만 분명한 건, 그가 얻어낸 것은  어떤 것보다 무겁고 거대하단 것이다. 그의 얼굴은 무섭도록 잔뜩 굳어있었기 때문이다.

카지트가 생각을 정리하고 입을 열 때 쯤은, 일행들이 하겐 근처까지 도달했을 쯤이었다.


"광신도는..녀석들은, 전 도시와 마을에 퍼져있다는  같아."



둘러앉은 모닥불을 멍하니 바라보며, 그는 느닷없이 폭탄을 터뜨렸다. 잠시 그게 무슨 말인지 고민하던 도로스들은 이내 눈을 크게 뜨고 소리없는 경악을 내질렀다.

"그게 무슨?!"



"대체 무슨 소린가?"

"..말 그대로야. 그 자식이 그러더군. 자기들은 모든 지역에 퍼져있을 거라고. 왜냐하면 그 전부터 조금씩 다른 지역으로 정착해왔으니."



프로바움과 닥터 윌슨은 침음성을 흘렸다. 상황은 생각한 것 보다 더욱 좋지않은 듯 했다. 광신도들이 사람들 틈바구니에 섞여 몸을 숨기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모든 지역에 걸쳐 퍼져있다니!




끔찍한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사람들에게 알릴 수도 없다. 대부분은 허무맹랑한 이야기다 생각하고 믿어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믿는다고 해도 곤란하다. 누가 광신도인지 알 수 없어, 서로가 서로를 감시할 테니까.



"그나마 다행히 돌연변이를 조종할 수 있는 녀석은 아직 소수인 것 같아. 그것도 대부분 이런 외곽지역인 것 같고. 아직 도시 안에서 돌연변이가 나타났다는 소린 듣지 못했으니까."


"글쎄, 사람들이 실종되고 있다는 풍문은 들은 적 있지."


카지트는 프로바움과 눈을 맞췄다. 이유모를 불길함이 그들의 등골을 내달렸다. 프로바움은 애써 모른척 화제를 돌렸다. 카지트는 그를 나무라지 않았다. 그런 최악의 가정은 떠올리기도 싫었다. 어차피 소수이자 개인인 그들이  수 있는 건 달리 없었다. 그저 최대한 빨리 에메랄드 컴퍼니에게 이 끔찍하고 소름돋는 가정을 전달하고 최악의 사태에 대비해주길 바라야지.

"이보게, 카지트. 그 너구리 자식은 그 마을에 언제 왔다고 하던가?"

"대략 십 년 이전."



카이저 수염을 매만지며 혀 끝에서  년이란 단어를 굴리던 자동인형은 일부러 과장된 어조로 말했다.

"십 년 이전이면, 허이구, 대충 견적이 나오는군."

도로스는 알  없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년 이전.  짧은 문장을 입속에서 되뇌이던 닥터 윌슨 또한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더듬이를 파르르 떨었다. 커다란 갈색 눈에 이채가 스쳐지나갔다. 프로바움과 닥터 윌슨의 입에서  단어가 동시에 뛰쳐나왔다.



"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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