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화 〉7. 단서
카지트의 눈길은 한동안 파울로의 시체에 머물렀다.
이제는 금속쪼가리가 되어버린 그 모습 위로 일순간 프로바움의 모습이 겹쳐보였다. 카지트는 거칠어지는 호흡을 애써 다스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피해망상도 가지가지군. 약해빠진 제 모습이 짜증났다.
"너, 너어..!"
계속 파울로의 시체를 응시하고 있다간 미쳐버릴 것 같아서 너구리 수인이 그에게 말을 걸었을 때 카지트는 안도감마저 느꼈다. 고철더미가 된 자동인형을 바라보다가 정신이 나가는 것 보단 정신나간 놈과 대화하는 편이 나았으니까.
너구리 수인은 한 손을 품에 넣은 채, 다른 한 손으로 군데군데 녹슨 리볼버를 쥐고 그를 겨눴다. 그러나 쉴 새 없이 흔들리는 총구나 불안정한 사격자세를 보아하니, 총이라곤 쏴본적 없는 애송이다. 그는 너구리 수인과 총구끝을 시야에 담아두며 천천히 주위를 훑었다.
광기와 혼란이 소용돌이치는 밖과 동떨어진 것처럼 이곳만은 조용했다. 카지트는 그것이
몹시 불쾌하다 느꼈다. 그가 제일 싫어하는 부류. 저가 뭐라도 된 것처럼 뒤에 앉아 명령을 내리고 구경하는 놈들. 카지트는 자신에 대한 자괴감과 짜증을 전부 너구리에 대한 분노로 돌렸다.
차가운 분노. 그의 샛노란 눈동자에 넘실대는 그것에 너구리는 겁을 집어먹었다. 안그래도 흔들리던 총구는 이제 제대로 그를 겨누고 있지도 못했다. 사방팔방으로 난리를 치는 총구를 카지트는 얼음장처럼 서늘한 눈으로 응시했다.
"무,뭘 원하,하나?"
잔뜩 겁을 집어먹어서 갈라지고 탁해진 목소리로 너구리 수인이 입을 열였다. 동정심이 일 정도의 태도였지만, 카지트는 무덤덤했다. 저런 부류의 놈들을 이미 수없이 봐왔던 까닭이다.
"..그건 어디있지?"
"그,그게 뭔데?"
녀석의 눈이 뒤룩뒤룩 움직이며 사방을 훑었다. 무언가 숨기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켕기는 게 있는 듯 했다. 그리고 카지트는 그 켕기는 것의 정체를 입에 담았다.
"돌연변이들을 조종하는 장치."
너구리 수인의 얼굴에 경악이 퍼졌다. 당황과 경악으로 얼룩진 얼굴로 그는 입을 달싹이기를 반복했다. 크게 뜨인 동공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어, 어떻게 그걸?! 설마, 네놈들, 아니, 여러분도 선택을 받으신 겁니까?"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 태도를 바꿨다. 마치 자기보다 높은 사람을 대하는 듯한 공손함과 영문모를 자랑스러움. 그의 안에서 무언가 생각의 변화가 있다는 게 확실했지만, 어째서인지 알 수 없었다.
선택?
카지트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좀 더 떠보기 위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나중에 술술 불게되겠지만, 굳이 수고를 들일 필요없이 알려준다니 마다할 리가 없었다.
그게 정답이었는지, 너구리 수인은 크흐흐, 하고 기분나쁜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조아렸다.
"역시! 크흐흐, 제가 미쳐 몰라뵈었습니다. 조종장치를 아는 건 그분의 선택을 받은 저희들 뿐인데 말이죠. 크흐흐, 그 위용을 보니 저보다 좀 더 그분께 가까운 분들이겠군요. 아아, 그분의 은총은 성스럽고 감미롭지 않습니까?"
그는 존경과 기대가 담긴 눈초리로 카지트를 올려다보았다. 어째서 너구리 수인이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꾼 것인지 카지트는 눈치챘다. 아무래도 녀석은 돌연변이를 조종 할 수 있는 장치를 알고있다는 사실만으로 카지트를 같은 편으로 생각한 듯 하다.
어떻게 그런 논리가 성립 할 수 있는지 잠깐 생각해봤으나, 답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돌연변이를 조종하는 장치를 가지고 있다는 기밀 중의 기밀을 아는 이들은 녀석과 같은 광신도들 뿐인 것이다. 카지트들 또한 게름하르트에게서 들은 게 없었다면 애초에 단서조차 발견 할 수 없었으리라.
돌연변이를 조종하다니. 그저 코웃음치며 어린애들의 공상쯤으로 치부하고 넘어갔겠지. 그리고 광신도 중에서도 간부 쯤에 해당되는 녀석들이 아니라면 에메랄드 컴퍼니의 사장이 그들의 가장 깊은 비밀과 맞닿아있다는 것을 모를 터다. 모름지기 비밀은 아는 자가 적을수록 좋은 법이니까.
그렇다면 저 너구리가 언급하는 '그분'은 도대체 누구일까?
광신도들이 목을 매는 신? 아니면 교주? 그러나 알 수 있는 건 없었다. 좀처럼 녀석은 '그분'의 이름을 언급하길 꺼려하는 듯 했다. 마치 저따위가 거룩한 그 이름을 입에 담을 수 없다는 것처럼.
"그분껜 정말 죄송한 마음뿐입니다. 크으, 그분께서 내려주신 노예들을 희생시키다니..그분을 뵐 면목이 없군요. 최대한 그분의 노예들을 희생시키지 않으려했지만.."
카지트가 속으로 조용히 단서들을 짜맞추고 있을 때, 한참을 주절대던 너구리는 말을 하던 도중, 무언가를 깨닫고 눈을 크게 떴다. 묵묵히 그에게서 냉막한 눈길을 떼지않는 카지트의 눈치를 보는게 뭔가 제가 잘못을 저질렀다고 느낀 듯 했다.
"그, 그래도 그분과 좀 더 가까운, 고귀하신 분의 손에 죽었으니 이 하찮은 놈들에겐 과분할 따름입죠. 헤헤.."
녀석 혼자 주저리 떠들었지만 덕분에 카지트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저 정도의 전력이 있었으면서도 진작에 마을을 치러 오지 않았는가에 대한 의문. 마을사람들과 카지트들에겐 정말 다행스럽게도, 순전히 너구리 수인이 멍청한 덕분이다.
이런 작은 촌락 쯤이야 손쉽게 쓸어버릴 수 있을 전력을 그대로 내버려둔 이유가 고작 돌연변이들을 아끼느라 그렇다니. 이쯤되면 허탈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어째서 녀석이 카지트일행에게 끈적한 증오를 내비쳤는지 알 법 했다. 돌연변이들의 손실 대부분은 그들 때문이니까.
이번만큼은 카지트도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었다. 하긴 저런 녀석에게 무슨 전략이나 전술을 기대하겠냐만은.
카지트는 자꾸 그분그분 거리며 자신의 신실함을 증명해보이려는 그를 멈춰세우고 입을 열였다.
"..돌연변이들을 정지시켜라."
"ㅇ,어..예?"
"다시 한 번 말하지. 정지시켜."
너구리 수인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분께서 주신 노예들의 아까운 목숨을 낭비해가면서도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대체 그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그러나 그는 순순히 카지트의 명령을 따랐다. 저보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의 비위를 거슬러봤자 좋을 게 없다는 판단이다.
그는 품에서 헝겊으로 감싼 무언가를 소중하게, 도저히 값어치를 매길 수 없는 물건을 대하는 것처럼 극진한 태도로 그것을 꺼냈다. 그 광경을 보는 카지트의 눈이 이채가 어렸다. 가끔 녀석이 품에 손을 넣는 행동을 보였기 때문에, 그 품 안에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 짐작은 했었다. 그것이 드디어 정체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윽고 조심스러운 손놀림으로 너구리 수인이 그것을 꺼내자, 카지트는 목구멍을 기어오르는 경악과 당황을 애써 집어삼키며 눈을 크게 떴다. 그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것은 투명하고 작았다.
한 손에 들어오는 직사각형 모양의 크리스탈. 끝은 다듬어져있어 날카롭지않고, 황금 비슷한 색의 선이 손가락 한 마디보다도 얇은 옆면 중앙에 박혀서 띠처럼 둘러져 있었다.
그 낯설지 않은 외형에 카지트는 얼굴을 굳혔다. 그는 전에 그것을 본적이 있다. 바로 오래된 유적 속에서! 그렇다. 그것은 바로 700년 정도 된 유적에서 종종 발견되는 유물이기 때문이다!
너구리는 그것을 한 번 꽉 쥐었다. 그러자, 마치 시동이라도 걸린 것처럼 은은한 불빛이 크리스탈 속에서 빛났다. 녀석은 익숙한 동작으로 그것을 만지작 거렸다. 손가락을 몇 번 놀리자 은은한 하얀빛은 푸르딩딩한 색으로 변했다. 그리고 너구리 수인은 카지트에게 돌연변이들이 정지했다고 고했다.
말없이 그 광경을 지켜보던 카지트는 바깥의 상황에 귀를 기울였다. 확실히, 조금 전까지 메아리처럼 들리던 비명과 단말마가 사그라든 것 같기도 했다. 그는 복잡한 심정으로 그 조작기를 응시했다.
도대체 저 물건은 무엇이길래 돌연변이들을 조종하고 있단 말인가.
돌연변이는 대체 무엇인가. '그분'은 도대체 누구지? 어떻게 저런 물건을 사용하고 있을까. 저것 또한 무한동력의 부산물일까?
온갖 질문들이 거품처럼 맺혔다 터져나갔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카지트는 입을 열지 않았다.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하다. 이 이상 시간을 끌어봤자 득을 보는 건 너구리 뿐.
그는 샷건을 집어넣음과 동시에 기압식 리볼버를 꺼내 재빠르게 장전하고, 너구리 수인의 어깨에 쐈다. 거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수 초 남짓. 숙련된 달인의 영역이다. 전개를 따라가지 못한 너구리 수인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곧 밀려오는 고통이 그의 얼굴에서 다른 표정들을 지워냈다.
카지트는 너구리 수인에게 다가가 수정을 빼앗았다. 흐아악! 하고 비명을 지르며 총에 맞은 어깨를 감싼 터라 그는 반항다운 반항조차 하지 못했다. 카지트는 녀석을 기절시키기 전에, 마지막으로 물었다.
"흐,흐으윽. 대, 대체 저에게 왜 이러십니까? 크윽.."
"그래서, 그 '그분'이란 놈은 뭐하는 놈이지?"
"..그게 무슨?"
너구리 수인은 고통을 참는 와중에 알 수 없다는 듯이 반문했으나, 돌아오는 것은 주먹이었다.
카지트는 기절한 그를 끌고 혼란의 한 가운데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