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화 〉7. 단서
"그래. 그렇기 때문에 도제를 만들 때 다른 무엇보다 심혈을 기울인다네. 만드는 시간의 거의 대부분을 동력기관에 소모한다고 볼 수도 있겠군. 어쨌든, 그렇기 때문에 자동인형들도 죽지. 그러니 도제를 만드는 것이야. 최초의 자동인형이 만들어진 이유이자 모든 자동인형들의 근본은 지식의 습득과 보존, 그리고 계승이니까."
"지식의 습득과 계승.."
도로스는 아리송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닥터 윌슨은 무언가를 깨달은 표정으로 프로바움의 말에 집중했다. 지식의 습득과 계승. 입 안에서 다시 한 번 그 말을 굴려본 닥터 윌슨은 기이한 흥분이 몸을 지배하는 것을 느꼈다.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한 가지 가정. 만약 그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맞다면, 아마 그는 고고학 역사의 가장 깊은 비밀을 알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닥터 윌슨은 떨리는 심정을 억누르며 힘겹게 말을 꺼냈다.
"..그렇다,면 700년 이전의 지,식 또한 있습니,까?"
닥터 윌슨이 프로바움을 말에서 잡아낸 것. 자동인형들의 행동원리인 지식의 습득과 계승이 계속해서 이어져왔다면, 분명 700년 이전의 지식 또한 있을 수 있다는 가정이다. 자칫 그냥 넘기기 쉽상일 테지만 학자로서 갈고 닦은 경험과 분석력은 그 조그마한 틈을 놓치지 않았다.
날아든 날카로운 질문에 프로바움은 쓴웃음을 지었다. 새로운 발견을 앞두고 잔뜩 긴장한 동료에게 그가 원하는 대답을 해주고 싶었지만, 세상 일이 어디 그렇게 쉽게 되던가. 그는 귀뚜라미의 열정적인 시선을 살짝 피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쉽게도 없다네."
다가온 일생일대의 기회가 눈 앞에서 사라진 것을 본 고고학자는 나지막히 안타까움을 토해내며 실망했다. 그는 매달리듯, 조그마한 여지라도 잡아보려는 듯 물었다. 그러나 프로바움은 그 여지마저 부정했다.
"어째서 입,니까?"
"최초의 자동인형이 만들어진 게 700년 전후이기 때문이지. 그 이전의 지식은 자동인형 중 그 누구도 이어받지 못한 걸로 아네."
확인사살같은 대답에 닥터 윌슨은 시무룩한 얼굴로 어깨를 추욱 늘어뜨렸다. 고고학자들의 최고의 소망은 당연하게도 700년 이전의 역사를 알아내는 것이다. 그 모든 고고학자들의 비원이 바로 코 앞까지와서 사라지다니. 닥터 윌슨은 들쭉날쭉하게 날뛰는 기분을 다독이며 마른 세수를 했다.
그래도 닥터 윌슨은 현재 가장 그 비원에 가까운 이 중 한 명에 포함될 것이다. 에메랄드 컴퍼니라는 거대한 회사의 수장과 대면하고, 그에게서 무한동력이란 키워드를 받았으니. 그리고 인류가 지상이라고 불리우는 저 흙더미 너머에서 왔다는 사실 또한 그는 알고 있다. 닥터 윌슨은 애써 자신을 달랬다.
프로바움도 쓴웃음을 지으며 닥터 윌슨을 다독였다. 인생경험이 제일 많은 연장자는 귀뚜라미 고고학자가 느끼고 있을 좌절감이 어떠할지 충분히 짐작 할 수 있었다.
"뭐, 그리 우울해하지 말게. 에메랄드 컴퍼니의 의뢰를 수행하다보면 자연히 자네가 원하는 걸 깨닫게 될 걸세. 느낌이 그렇거든. 길잡이들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늙은이의 감도 만만치 않다오."
"맞아요. 그..무한동력? 그게 700년 이전의 유물이라니까, 그걸 얻으면 분명 뭔가 알게 될 거에요. 에메랄드 컴퍼니도 아주 오랫동안 그걸 찾아온 것 같으니까요."
일행들의 따뜻한 응원에 귀뚜라미는 희미한 미소를 짓고는 프로바움에게 다시 이야기를 들려달다고 말했다.
"내가 어디까지 했더라? 그래, 지식의 습득과 계승. 그게 자동인형들의 존재이유이자 기본원리지. 한 자동인형이 죽으면 그 자동인형이 쌓아왔던 지식들이 잿더미가 되지않겠나? 그러니까 도제를 만드는 거지."
"단 한 명만 만,드는 겁니,까?"
"아니, 그건 각 개체마다 다르다오. 각자 곰곰히 따져보고 제일 이상적인 숫자의 도제를 만드는 거지."
프로바움은 파이프 담배를 깊게 들이마셨다. 마음같아선 취하고 싶었지만 자동인형은 취하지 않는다. 답답하고 착잡한 마음을 파이프로 달래면서, 그는 가끔은 피가 흐르는 것들이 부럽다고 생각했다. 깊은 한숨을 연기에 담아 내보내며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아무튼 자동인형들은 어떻게 해야 좀 더 지식을 습득하고 계승할 수 있을까 고민해 왔다오. 지식을 계승 할 때마다 조금씩 누락되거나 열화되는 경우가 종종 생겼거든. 덕분에 인격이나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이 차이가 나지. 어쨌든, 그래서 이런저런 방법으로 도제를 만들어왔는데 그게 보통 세대별로 나뉜다네. 그리고 거기서 지금같은 관계가 생겨났지."
지금같은 관계가 의미하는 건 프로바움과 파울로의 관계일 것이다. 드디어 정말로 궁금했었던 주제가 나오자, 닥터 윌슨은 우울함마저 슬쩍 덮어놓고 집중했다. 어느새 카지트마저 고개를 프로바움 쪽으로 고정하고 있었다.
프로바움은 모두를 한 번 둘러본 후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꺼냈다. 파이프 담배를 쓰다듬는 손길엔 제 치부를 드러낸다는 부끄러움과 자조감이 묻어나왔다.
"3세대까진 별 일 없었는데, 4세대에선 아예 지식을 계승하지 못했거든."
도로스와 닥터 윌슨은 서로 마주본 후 프로바움의 얼굴을 보았다. 이야기 맥락의 흐름대로라면 프로바움은 4세대가 된다. 그리고 어째서 그간 프로바움이 4라는 숫자를 그렇게 싫어했는지 깨달았다. 세월의 풍파에 깎인 자동인형은 그들의 짐작이 맞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들 짐작대로 내가 그 빌어먹을 4세대지."
난 그래서 4라는 숫자가 싫어. 재수가 없거든. 그는 아이들에게 비밀을 말해주는 할아버지처럼 인자하게 웃었다. 그러나 그 목소리에 깃든 좌절감과 갈곳없는 분노는 세월에 응어리져 한 없이 깊고 어두웠다.
"지식을 보존하고 계승하는게 행동원린데 그게 안돼봐, 무슨 일이 일어났겠나?"
그의 목소리기 점점 격양되기 시작했다. 프로바움 또한 제가 흥분하고 있는 걸 깨달은 듯 잠시 흠흠, 거리며 목을 가다듬었다. 그러나 말을 잇는 목소리엔 아직 미처 숨기지못한 분노가 묻어나왔으나 일행들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프로바움은 다시 한 번 파이프 담배를 깊게, 연기가 폐부를 가득 메울 때까지 들이마셨다. 담배 따윈 자동인형에게 아무런 영향이나 해를 끼치지 못했다. 그럼에도 어느순간부터 그는 파이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이미 습관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비합리적인 행동 자체가 그 자신이 다른 자동인형들과 동떨어진 존재라는 걸 상기시키는 것같았다. 그러나 이미 그의 인생의 한 귀퉁이가 되어버린 걸 끊을 수 없는 노릇이다. 그는 눈을 감고 몰려오는 서글픔을 달랬다.
그가 눈을 뜨고 다시 입을 연 것은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였다. 일행들은 그 때까지 조용히, 그러나 그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며 기다렸다.
"아주 난리가 났었다오. 또 빌어먹게도 그 다음인 5세대 놈들은 지식을 잘만 계승해서 더욱 천대받았으니.. 결국 4세대의 대부분이 북부에서 쫓겨나버렸소. 그리고 4세대는 바로 잊혀진 세대가 되었지."
쯧쯧. 그는 혀를 찼다. 잠시 눈을 감고 제 스스로를 달랜 덕분에 목소리는 평소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
"아무튼 그래서 북부의 자동인형 놈들은 다른 지역의 자동인형들을 깔본다오. 다른 지역에서 활동하는 자동인형들은 대부분 쫓겨난 4세대니까."
프로바움은 이만하면 되었다 싶어 입을 다물었다. 사실 더 이상 말할 것도 없었다. 끽해봤자 그 뒤로 제 스스로 북부를 박차고 나가서 온갖 고생을 했는데, 그 이야긴 그의 흑역사나 다름없었다.
멋모르고 앞뒤 잴 것 없이 달려들던 시절. 이것저것 하도 저지른 일이 많아서 별로 거론하고 싶지는 않았다. 때마침 시기적절하게 도로스가 질문을 던졌다.
"그..프로바움의 스승님은 엄청 유명한 사람이라고 하셨잖아요. 그럼 그 아들..도제인 프로바움을 다른 자동인형들도 알고 있는 거 아니에요?"
"흥, 다들 관심있어하긴 했지. 내 스승님이 워낙 유명하셔야 말이지. 하지만 스승님께선 끝까지 내 정체를 숨기셨소. 자신의 위명에 금이 갈 것 때문이 아니라, 그로 인해 상처 받을 나를 위해서. 내가 다른 자동인형들과 다르다는 걸 알고 계셨으니."
아무튼 여기까지하고 슬슬 자도록하지, 프로바움은 다른 질문이 날아오기 전에 재빨리 끝을 맺었다. 호기심많은 도로스나 학구열에 불타는 닥터 윌슨의 질문에 대답해주다간 날이 새도 부족할 판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일행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사실 프로바움은 거절 할 수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자신에 대해 많은 것을 털어놓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질문이나 궁금증을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파장 분위기에 일행들은 슬슬 자리를 잡고 누웠다. 꽤 거친 하루를 보냈고 내일 또한 돌연변이를 잡으러 나가야 하니 쉴 수 있을 때 푹 쉬어두는 편이 좋다는 걸 모두 알고 있었다.
방 안은 곧 조용한 숨소리로 가득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