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79화 〉7. 단서 (79/100)



〈 79화 〉7. 단서

카지트는 눈을 떴다.




방 안은 한 점의 빛없이 어두웠으나 그는 익숙하다는 듯한 태도로 거리낌없이 일어났다. 깊이 잠든 일행 사이를 거니는 그는 그 무엇보다고 고요했으며 그림자처럼 은밀했다. 커튼이 쳐져있는 창가로 다가간 그는 조심스럽게 커튼을 벌려 틈새를 만들었다.

가려진 커튼 틈 사이로 희미한 인공조명의 불빛이 어슴푸레하게 날아들었다. 그 희미한 광량으로 유추해 볼  자정을 넘긴 새벽일 것이다. 시계를 확인한 그는 그의 예상대로 지금이 아직 새벽 3시가 되지않았음을 알았다.



커튼  사이로 그의 눈길이 바깥을 어지러이 훑었다.

바깥엔 아무도 없었다. 마을은 마치 죽은 생물같았다. 그러나 가끔가다 집 안에서 흐느끼듯 새어나오는 기척이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알렸다. 그러나 그 고동은 너무 희미하다. 마치 고사하기 직전처럼.

그는 미끄러지는 듯한 움직임으로 문가에 다가가 조심스러운 손놀림으로 문을 열었다. 저를 깨운 손길에 놀란 문이 삐걱대며 항의했으나 그는 도로스들이 깨지않은 것을 확인하곤 벌려진 문틈 사이로 먼지처럼 스르르 빠져나갔다.


갑갑하게 조금씩 썩어가는 방 안의 묵은 공기와는 다른, 흙냄새와 사람냄새가 섞인 새벽의 텁텁한 공기가 그를 반겼다. 그러나 카지트는 약간의 관심조차 주지않은 채 건물들이 만들어낸 그늘과 그늘 사이를 반쯤 기어가는 듯 하며 이동했다.

마을의 이곳저곳을 은밀하게 휘젓고 다니던 그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이 밤 중에도 여전히 불이 켜져있는 집이었다. 다른 집보다 조금 화려한 외관을 하고 있었는데 집의 크기 또한 다른 곳들보다 조금 더 컸다. 그의 경험대로라면 분명  조그만 촌락에서 힘  깨나 쓴다는 사람이 기거하는 곳일 것이다. 집 안에서 나지막하게 들려오는 목소리들은 그의 예상이 맞다는 것을 확인해줬다.

"ㄷ...왜 이방ㅇ...ㅁ.."



"에메ㄹ...실ㄹ..."


희미하게 들리는 말소리에 그는 벽에 두 손 둥그렇게 말고 가져다대었다. 그리고 그 위에 귀를 대고 청각에 신경을 집중하자 조금씩 그 내용이 들리는 것 같았다.

"우리가 먹을 식량도 부족하단 거 알고 있기나 한거요!"



"그건 나도 충분히 알고 있수. 일단 그 치들은 자기네들 먹을  있다고 하니 하루이틀은 안줘도 괜찮지 않겄수? 그리고 돌연변이들을 잡기 시작한다면 식량문제는 알아서 풀리겄제."




"그건 그렇습니다. 돌연변이가  줄어들면 상인들도 다시 올지도 모르겠군요."

"아, 글쎄! 그렇게 돌연변이들을 들쑤시다가 큰 일이라도 나면 어떻게  거요? 안그래도 저 미친것들이 갑자기 떼로 몰려다니기 시작했는데. 멋대로 저것들 찔러보다가 저놈들이 눈까뒤집고 달려들면 어떻게  거란 말이요? 제 아무리 잘나신 에메랄드 컴퍼니라고 해도 숫자 앞에선 장사없는 법이지!"



익숙한 목소리가  개. 그리고 모르는 목소리가 하나. 익숙한 목소리는 뮐러와 너구리의 것이다. 그리고  한 사람. 지극히 평온하고 이성적인 말투는 어느 쪽도 편들지않고 중립적이었다. 셋은 도르스들과 돌연변이 사냥에 대해서 갑론을박을 펼치고 있었다. 듣자하니 뮐러는 사냥을 옹호하는 측이고, 너구리는 그에 반대하는 측, 그리고 제 3의 인물이 그 사이를 조율하고 있는  같았다.

카지트는 쓸데없는 반대만 내미는 너구리 수인 때문에 눈쌀을 찌푸렸다. 광신도의 단서든 뭐든 일단 돌연변이들과 접촉해야 뭐라도 알아낼텐데, 돌연변이 사냥에 연신 반대만 하는  수인이 달갑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음같아선 누구도 모르는 사이에 처리하고 싶었지만, 그것이 악수惡手가 될 것임이 자명했기에 그저 상황을 주시했다. 조금씩 높아지는 언성은 슬슬 집밖으로 새어나올 정도라, 마을을 순찰하고 있는 자경대의 이목을 끌 것 같았다.




그러든 말든 셋의 대화는 평행선을 그리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너구리 혼자 결사적으로 반대를 외치고 있었다. 언뜻 보기엔 제 3의 인물은 중립을 유지하고 있는 듯 했으나 카지트가 보기엔 뮐러 쪽으로 의견이 기운 모양새다.



"어느 쪽도 타당한 의견이군요.  분의 의견을 절충해서, 시험삼아 그나마 작은 무리의 돌연변이들을 공격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습니다. 일단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그분들을 만나서 이야기 해봅시다."


"촌장님. 하,하지만.."




반대의사를 표했던 너구리의 목소리엔 짙은 낭패감이 담겨있었다. 그러나 다른 둘은 그의 말을 듣고싶지 않았는지 빠르게 회의를 정리했다. 촌장님이라. 카지트는 나지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을 수뇌부의 대략적인 구조가 머릿속에서 차츰 정리되었다.

마을의 무력인 자경대를 이끄는 뮐러와 그완 반대로 아마 마을 내부의 일을 담당하는 너구리 수인. 그리고 그 사이에서 둘을 조율하는 촌장.

촌장은 이번엔 뮐러의 손을 들어준  같았다.  이상 대화하고 싶지않아하는 둘의 모습에 결국 너구리 수인은 한껏 인상을 찌푸리며 집 밖으로 나왔다. 카지트는 그늘에 녹아들어 그림자처럼 벽에  달라붙어 기척을 숨겼기에 들키진 않았다.



"빌어먹을 것들..괜히 무턱대고 싸웠다가 손실이라도 나면 어쩌자는 거지.."

너구리 수인은 주위를 둘러보며 짜증을 담아 뭐라뭐라 중얼거렸다. 작은 중얼거림이었지만 사위엔 적막이 흘렀기에 숨어있던 카지트는 그것을 들을 수 있었다. 딱히 이렇다 할 건덕지는 없었지만 그는 왠지 그의 발언이 신경쓰였다.

그는 품 안의 무언가를 만지작 거리더니 할 수 없다는  발걸음을 옮겼다. 아쉽게도 카지트는 그를 미행 할 수는 없었다. 집 안에선 뮐러가 바깥으로 나오려는 기색을 보였고 순찰을 돌고있던 자경대 또한 그가 숨어있는 집 근처로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카지트는 미끄러지는 듯한 움직임으로 다시 그림자와 그림자 사이를 이동했다. 그 은밀함은 희미한 새벽의 인공조명 불빛 아래서 그의 존재를 완벽하게 감췄다.

카지트가 다시 도로스들이 묵는 숙소로 돌아오는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않았다. 그는 나갔던 그대로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와 벽에 몸을 기댔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건대 내일 아침까진 아무런 일도 없을 듯 하다.



그러나 그는 잠들 수 없었다. 잠이 들면 한층 더 선명하게 다가오는 악몽이 그를 괴롭혔기 때문이다. 카지트는 그저 눈을 감고 온 신경을 바깥의 움직임에 기울였다. 다른 일행들이 깨어날 때까지.








그가 감았던 눈을 뜬 것은 프로바움이 일어났을 때였다. 다른 일행 중 가장 먼저 일어난 자동인형은 벽에 기대어 있는 카지트를 바라보면서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번 카이저 수염을 쓰다듬어 대충 정리하더니 떨떠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밤새 그러고 있었나?"




"..조금 자긴 했어."




"쯧쯔, 멍청한 자식. 잠도 제대로 자지않고 밤새 뭐하는 거냐. 그러다가 쓰러지면 그게 더 민폐라는 거 모르나?"

그러나 그의 타박에도 카지트는 다시 시선을 창밖에 고정시킨 채 입을 다물었다. 프로바움은 다시 혀를 찼다. 그의 마음같아선 기절이라도 시켜서 재우고 싶지만 그런 것에 호락호락 당할 녀석이 아니다. 그는 애꿏은 수염만 거칠게 매만졌다.

"..조금 있다가 아마 촌장을 만나게 될 거야."

갑자기 딴소리를 하는 카지트를 프로바움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쳐다보았다.


"그리고 우린 시험삼아 소규모 무리를 소탕하겠지."




확신에 찬 카지트의 발언에 프로바움은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는지 궁금해했다. 그러나 카지트는 밤에 나갔다왔다는 사실을 숨겼다. 굳이 걱정을 끼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기위해선 촌장이니 뭐니 아예 언급하지 않는 것이 제일이었지만, 그래도 이런 정보는 알고있는 편이 나았다.

"..자네, 밤새 대체 뭘했나?"



프로바움은 샐쭉한 시선으로 침묵으로 일관하는 그를 응시했다. 그러나 카지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결국 프로바움은 탄식인지 한숨인지 모를 것을 흘렸다. 그리고 뭐라고 타박하는 대신 앞으로 있을 일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했다. 적어도 그가 아는 카지트는 이런 상황에서 허언을  사내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잠시후 모든 일행이 깨어났을 때, 뮐러가 그들을 방문했다.


용건은 카지트의 말 그대로 사냥을 나가기 전에 촌장이 그들을 보고 싶다는 것이다. 프로바움은 잠시 카지트를 응시했으나, 얻을  있는 것은 없었다.  상황에서 그 요청에 응하는 것 외에 어떤 대답이 있겠는가? 그리고 카지트가 물어온 정보대로라면 소규모 무리를 소탕하는 것일테니, 딱히 해가  일도 없을 것이다. 도로스와 닥터 윌슨 또한 그의 의견에 동의했다.



결국 촌장의 요청을 받아들여 그를 만나러 간 도로스들은, 촌장의 모습을 보고 눈에 이채를 띄었다. 과연 자동인형들의 고향인 북부 아니랄까봐 마을을 대표하는 촌장이란 사람은 자동인형이었기 때문이다. 도로스에겐 프로바움을 제외하고 처음 제대로 대면하는 자동인형일 것이다. 그간의 빠듯한 일정엔 그다지 기회가 없었던 까닭이다.

촌장의 외형을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빼빼마른 자동인형, 이것 외에 적절한 표현은 없을 것이다. 허름하지만 단정한 셔츠 아래로 보이는 피부는 프로바움의 황동색 그것과 다른 둔탁한 은빛이었다.



덩치는 왜소했다. 근육이라곤 하나도 없는 듯한 일자형 팔과 다리. 얼굴 또한 프로바움처럼 노회한 전사의 모습이라기보단 여리여리한 학자의 그것을 닮았다. 전체적으로 어느 도서관에서나 볼법한 흐릿한 인상의 사서같은 모습이다. 그는 고저가 거의 없는 목소리로 제 이름을 파울로라고 밝혔다.


일행을 천천히 살피던 그의 시선은 프로바움에게 좀 더 길게 머물렀다.

"흐음..놀랍군요. 정말로 용병을 하고 있는 자동인형이 있다니."



말은 그랬지만 그는 그다지 놀라워하는 것 같지 않았다. 아주 약간의 의외라는 표정 이외엔 어디에서도 감탄이나 놀라움같은 감정은 없었기 때문이다. 파울로는 그저 순수하게 놀랍다는 뜻으로 한 말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프로바움은 그렇게 받아들인 것 같지 않았다. 파울로를 바라보는 프로바움의 표정이 심상찮게 변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도로스는 그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만약 점점 일그러지는 프로바움의 표정을 본다면 분명 질문  생각이 들진 않았을 것이다.

"그..자동인형이 용병인  흔하진 않나요?"



도로스의 물음에 파울로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는 프로바움의 일그러지는 얼굴엔 그다지 관심이 없는 듯 했다. 점점 구겨져가는 그의 얼굴과는 반대로 파울로는 평안한 얼굴로 태평하게 입을 열였다.



"다른 곳에선 모르겠지만 이 북부에선 그리 흔한 것은 아닙니다. 스승에게서 지식을 계승한 대부분의 자동인형들은 무언가를 탐구하는 직업을 고르니까요. 오로지.."




"...필요없는 이야긴 거기까지하고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지."



돌연 프로바움은 파울로의 말을 잘랐다. 파이프를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도로스는 그제야 프로바움의 흉신악살같은 표정을 보고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 그를 자극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끔찍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언가 질문을 하려던 닥터 윌슨 역시 불편함을 내비치는 프로바움의 태도에 입을 다물었다.



자동인형은 다른 자동인형에게 다소 거친 어조로 빠르게 쏘아냈다. 당장 이 자리를 피하고 싶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그완 반대로 파울로는 페이스를 잃지않고 천천히 응대했다.



"돌연변이들이 쳐들어오진 않았나?"




"아직은 없습니다. 몇 번 다가온 적은 있었지만 총을 몇 번 쏴주니 물러나더군요."



서로 완벽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다른 기질을 갖고 있는 두 자동인형. 도로스들은 둘을 가만히 놔둬선 안된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알아챘다. 그들은 뮐러와 너구리를 보았으나 그들은 그다지 말릴 생각이 없는  했다. 재빨리 서로 눈길을 교환한 일행 중, 결국 닥터 윌슨이 총대를 메고 나섰다.

"그건 좀 이상,합니다. 돌연변이들,의 공격성이라,면 오히려 자극받아서 달려,들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만."




"저희도 그 점을 이상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돌연변이의 행동을 보면 마치 누군가가 그들을 조종하고 있는 듯한 느낌마저 받습니다. 조금 말도 안되는 이야기지만요."



태평하리만큼 평온한 어조로 조곤조곤 말하는 파울로의 모습은 어딘가 기계적인 구석이 있었다. 그다지 감정을 드러내지않아서 그럴지도 모른다.



"뭐, 일단은 시험해보면 알겠지."

프로바움은 더 이상 상대  가치도 못느끼겠다는 듯 몸을 홱 돌려 걸어갔다. 어차피 무엇을 할 건지는 카지트가 물어온 정보로 대략적으로 알고 있으니 거리낄 것은 없었다. 도로스들은 먼저 성큼성큼 가버리는 프로바움의 모습에 어어, 거리며 주춤거리다가 빨리 그의 뒤에 따라붙었다.



덩그러니 남겨진 뮐러는 프로바움의 태도에 성을 냈지만 파울로의 명령에 벌써 저만치 가있는 도로스들을 따라잡기 위해서 달음박질 쳤다. 그 광경을 멍하니 주시하던 파울로와 너구리는 각기  할 일을 찾아 나섰다.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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