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화 〉7. 단서
뭘러가 일행을 안내한 곳은 단촐한 단층집이었다. 아마 뮐러의 집으로 짐작되는 집은 낡고 오래되었으나 유지보수를 잘해놓은 탓에 더럽다는 인상은 없었다. 가구라곤 침대와 기다란 소파가 전부인 집 안으로 들어선 일행은 제각기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거 미안한데. 먹거리라도 내놓고 싶지만 마을 사정이 좀 궁해서 말이우."
"아니, 됐소."
뮐러는 머쓱한 듯 뒷머리를 긁었다. 그러나 뮐러를 따라 들어오면서 촌락의 상황이 어떤지 대략적으로 파악한 일행은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다. 이런 빈궁한 곳에서 뭔가 얻어먹기를 기대 할 정도로 염치없는 이들은 아니었다.
대충 바닥에 주저앉은 뮐러는 어디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 지 망설이다가 이내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겹겹이 쌓인 문제들은 도저히 자경대의 힘으론 어쩔 수 없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실낱같은 희망을 담아 닥터 윌슨에게 물었다.
"요즘 망가진 파이프가 많아진 것 같은데 뭐라도 건진건 있수..있습니까?"
그는 닥터 윌슨이 높은 자리에 위치한 사람이란 것을 상기하고 재빨리 존칭을 붙였다. 그러나 닥터 윌슨은 그리 신경쓰지 않았다. 그것보다 그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하는지 고민하는 까닭이다.
반쯤 떠보는 질문. 뮐러는 아직 그들이 정말로 에메랄드 컴퍼니 소속인지 의심하고 있는 듯 했다. 아마 반쯤 시체썩은 물에 담근 듯한 몰골 때문이리라. 카지트는 그에 관해서 이런저런 정보를 짜집기하며 설명했다. 천만다행으로 그는 정말로 손상된 파이프에 관한 의뢰를 맡은 적이 있었다.
망가진 파이프의 규모와 숫자 등 의외로 자세한 내용에 뮐러는 한쪽 눈썹을 삐뚜름하게 올렸다.
"그래서..원인이 뭔지는 파악했수..습니까?"
파이프가 손상되는 이유가 광신도와 그들이 부리는 돌연변이때문이지만, 곧이곧대로 대답해 줄 수는 없었다. 기밀이기도 하거니와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이들에겐 말도 안되는 헛소리에 불과하기 때문이었다.
자신에게 향한 뮐러의 시선에 닥터 윌슨은 당황했다. 그는 애써 침착하게 보이도록 가다듬으면서 그를 이렇게 만들어버린 카지트를 흘겨봤다. 그러나 그들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뮐러에겐 알아낸 내용을 발설해도 될지 상의하는 것으로 보였나 보다. 그는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정 이야기 해줄 수 없다면 상관없수...없습니다. 나도 괜히 복잡한 일에 끼어드는 건 사양이니까. 지금은 마을 일로 충분히 골치아프다고."
뮐러는 순순히 물러났다. 의외로 꽤 구체적인 정보에 이미 그들에 정체에 대한 의심을 거둔 것 같았다.
"뭐, 그렇다면 되었네. 근데 대체 무슨 일인가? 마을 상황이 그리 좋아보이진 않은데."
"최근들어 파이프가 끊어지고 있수. 그리고 돌연변이들도 미친듯이 나오고. 아마 이 주변은 죄다 그놈들 영역이 된 거 같은데 그것때문에 골치아파 죽겠다우."
프로바움의 질문에 답한 뮐러는 어깨를 늘어뜨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두손으로 마른 세수를 한 얼굴은 어째선지 한층 더 늙어보이고 피로해 보였다. 그는 반쯤 한탄과 푸념을 섞으며 말을 이었다.
"원래 이곳까지 오던 상인들이 몇명 있었는데 이젠 오지도 않는다우. 덕분에 우리도 이 모양 이 꼴이지. 돌연변이가 한 두 마리라면 사냥해서 먹으면 되니 최소한 배를 곯지는 않을텐데. 근데 지들끼리도 서로 싸우고 죽이던 놈들이 마치 약이라도 빤 것처럼 우글우글 몰려다니니 어디 사냥이고 뭐고 할 수가 있어야 말이지. 사냥하러 나갔다가 사냥당하지나 않으면.."
"흠..이상하군. 원래 놈들끼리도 서로 잡아먹고 싸우는 녀석들인데."
"그러게 말이오."
에잉 쯧쯔, 그는 골치아프다는 듯 혀를 찼다. 돌연변이들의 행동변화. 그것은 명백하게 이상했다. 그러나 그것 뿐만이 아니다.
"거기다가 돌연변이들이 어떻게 침입한 건지 마을 사람들 한 두 명씩 계속 실종되고 있으니 미칠 일이라우."
실종이라는 심상치않은 단어에 일행의 눈이 뮐러의 입으로 모였다. 이 마을에서 무언가 뒤숭숭한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러한 일들 사이엔 모종의 연관이 있을 터. 도로스들은 본능적으로 그것이 그들이 맡은 임무와 어떤 식으로든 관련이 있음을 눈치챘다. 닥터 윌슨은 떨떠름한 어조로 물었다.
"실종,되고 있단, 말입니,까?"
뮐러는 닥터 윌슨의 눈치를 봤지만 그의 반말에도 별다른 반응이 없다는 걸 깨닫고 말을 놓았다.
"그렇소. 미치고 환장 할 일이지. 안 그래도 반쯤 고립된 마을인데 사람들까지 하나 둘 씩 없어진다니까. 덕분에 돌연변이가 마을 안에 들어왔다고 우리 자경단만 된통 깨지고 있지. 근데 마을 안에 돌연변이는 무슨? 그 그림자도 찾지 못했는데 말이우."
"탐색했는데도 아무런 단서도 찾을 수 없었다?"
허 참, 귀신이 곡할 노릇이겠군. 프로바움의 말에 뮐러는 격하게 동의하며 맞장구 쳤다.
"그렇소. 그러니까 더욱 모르겠단거요."
뮐러의 한탄을 한 귀로 흘리며 프로바움은 일행과 의미심장한 눈길을 교환했다. 고립된 마을. 갑자스레 출현한 대량의 돌연변이들. 사라지는 마을 사람들. 뭔가 냄새가 났다. 그들은 도시에서 들었던 소문을 떠올렸다. 광신도들이 사람들을 납치한다는 것.
그리고 그들은 알고 있었다. 광신도, 돌연변이, 그리고 무한동력. 그 세 가지에 얽힌 일을. 그리고 이번 일 또한 분명 광신도들과 관련이 있을 터이다. 어쩌면 광신도에 관한 단서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프로바움은 한층 진중한 표정으로 뮐러에게 물었다.
"혹시 이 근방에서 수상한 녀석을 본 적 없소?"
"글쎄? 잘 모르겠수. 근래들어 온 건 자네들이 처음이니 내 입장에선 자네들이 제일 의심스러울 수 밖에 없지."
그는 말을 꺼내놓고 아차하는 표정을 지었다. 높으신 분이 그의 말투를 신경쓰지 않는다고 해서 그 내용까지 신경쓰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었으니까. 그는 재빨리 덧붙이며 해명했다.
"그..물론 에메랄드 컴퍼니에서 나오신 분들이니 믿음직스럽지만 말입니다. 그, 저기, 제 입장에선 이것저것 따져봐야하니까.."
"괜,찮습니,다."
뮐러는 닥터 윌슨의 눈치를 보다가 그가 정말로 방금 전의 발언에 관심을 두지않는다는 것을 알아채고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에 닥터 윌슨은 무심코 쓴웃음을 지었다.
그때였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낯선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뛰어들어왔다. 혹시라도 뮐러가 마음을 바꾸고 습격한 것인가 싶어, 일행은 일제히 무기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러나 문을 박차고 들어온 이가 단 한 명이라는 것을 깨닫고 긴장을 풀었다. 무엇보다 정체모를 습격자의 질문과 뮐러의 당황한 표정이 이 습격(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것)은 전혀 계획에 없는, 우발적인 것임을 나타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이, 대장! 외부인이 들어왔다면 서요? 제정신인거요?"
갈색 털에 군데군데 난 검은색 줄무늬를 가진 너구리 수인 이었다. 그 또한 제대로 손질하지 않아 꾀죄죄한 몰골을 하고 있었지만 뮐러처럼 다른 마을사람들보단 조금 덜한 모습이었다. 그는 앵앵거리는 목소리로 뭐라뭐라 쏘아붙였는데, 하나같이 '외부인은 위험하다' 라거나 '먹을 것도 없어보이는 외부인을 들이다니' 등등 하나같이 도로스들에게 불쾌한 내용이었다.
자연히 듣는 입장에서 기분이 좋아질 리는 없었다.
"..저 자는?"
차갑게 가라앉은 카지트의 목소리에 일순간 정적이 돌아왔다. 잘 벼린 칼처럼 날 선 그의 기도와 목소리에 너구리 수인마저 움찔하며 입을 다문 것이다. 뮐러 또한 당황한 얼굴로 카지트를 쳐다보았으나 이내 다시 고개를 너구리 수인에게 돌리며 말했다.
"마을 지도부 중 한 명인데..어이, 자네. 잠깐 나 좀 보지."
뮐러는 들어왔던 자를 질질 끌고 밖으로 나갔다. 마지막에 가선 거의 으르렁거림에 가까운 어조를 보아하니 너구리 수인에겐 그리 좋지않은 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그리고 물론 도로스들은 그런 사소한 것엔 관심없었다.
"영감, 어떻게 생각해?"
카지트의 서늘한 눈동자가 빛났다. 이미 어딘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짐작하고 있는 눈이다. 프로바움 또한 파이프담배를 한모금 뻐억 피우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의 경험에 따르면 저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명약관화했다.
"딱 봐도 우리한테 부탁할 작정이군. 그렇지않으면 저렇게 하소연 할 리가 없지."
밖에선 뭐라뭐라 언성을 높이고 있었지만 집 안은 어느 때보다도 조용했다. 도로스들은 일언반구없었지만 그들의 머릿속은 아마 저 바깥보다 시끄러울 것이다. 저들이 부탁 할 내용을 알고 있으니, 그에 대한 대답을 위해 이런저런 추론과 판단들이 마구잡이로 그들의 머리를 헤집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