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화 〉6. 북부
"젠장맞을! 이제 유적이라면 쳐다도 보기도 싫군 그래!"
프로바움은 신경질적인 태도로 파이프담배를 휘휘 내저었다. 희끄무레한 담배연기가 허공에 기하학적인 예술작품을 그렸다. 그는 진절머리난다는 듯 땅을 몇 번 퍽퍽 걷어찼다. 도로스와 닥터 윌슨도 프로바움의 말에 공감한다는 듯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추적자들을 먼저 보내고 입구까지 돌아오는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않았지만, 체감상으론 만 하루가 지난 것 같았다. 그간의 정신나간 경험으로 일행은 모두 정신적으로 지쳐있었다.
닥터 윌슨은 한 구석에서 열심히 최근에 무엇을 먹었는지 조사하는 작업에 한창이었다. 땅바닥은 열심히 그가 늘어놓은 음식들을 게걸스럽게 주워먹고 있었다. 이것저것 뒤섞인 음식이라도 맛은 좋은지 불평 한 마디 없었다. 그는 어떻게든 구토를 멈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듯 했으나, 몸에서 풍기는 냄새가 그를 방해했다. 시쳇물이 든 옷에서 냄새를 떨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카지트는 닥터 윌슨과 조금 떨어진 곳에 누워있었는데, 말없이 끙끙대고 있는 것이 상태가 그리 좋아보이진 않았다. 하긴 일행 중 제일 영향을 많이 받았을 이는 아마 그일 것이다. 제 아무리 후각을 끊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가까이서 향수보다 수 백배는 지독한 악취를 맡았으니 제정신이기 힘들 것이다. 그는 반쯤 기절한 것처럼 보였다.
평소라면 다가가서 괜찮냐고 한 두 마디라도 물어봤을 도로스 또한 피로와 악취에 찌든 얼굴로 주저앉아있었다. 그는 방독면을 벗고 폐부 깊숙히 바깥 공기를 탐했다. 텁텁하고 쿱쿱한 공기였지만 그래도 통로 안의 때묵은 악취와 비교하면 몇 천배 나았다. 그는 목을 간지럽히는 먼지 탓에 몇 번 쿨럭쿨럭 기침을 내뱉곤 물통을 꺼내들었다.
"도로스, 정,말 죽는 줄 알았습,니다."
"..진짜, 그러게요."
울렁거리는 속을 한 손으로 누르며 닥터 윌슨은 힘겹게 말했다. 도로스도 질린다는 어조로 동의했다. 그 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심장이 벌렁벌렁 거리고 속이 철렁했다. 가까이서 속삭이는 죽음의 목소리엔 등골을 얼리고 닭살을 일으키는 무언가가 있었다.
사소한 실수로 발각될 뻔한 그 때, 도로스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한 걸음 앞에서 진득하니 풍기는 죽음의 향기와 미친 듯이 경종을 울려대는 감의 경고. 반쯤 나간 정신으로 그는 일말의 망설임없이 감이 가리키는 대로 행동했고, 그 덕분에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종이 한 장 두께를 사이로 바닥에 깊숙히 박힌 도끼. 만약 조금이라도 감을 무시하고 망설였다면 도끼가 쪼개는 것은 바닥이 아닌 그의 몸이 되었을 것이다. 도로스는 침을 삼켰다.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머리가 쭈뼛 곧두서는 느낌이었다.
잠깐의 휴식을 취한 도로스들은 주위에서 무게가 나갈 만한 것들을 가지고 와서 유적으로 향하는 입구 위에 얹었다. 입구는 바닥에 나 있기 때문에 단순히 그 위에 물건 한 두 개를 얹는 것만으로도 큰 효과를 발휘 할 것이다. 그럼에도 도로스들은 편집증적으로 주변의 무게가 좀 나간다 싶은 것을 전부 그러모았기 때문에, 바닥에 나 있는 철문 주위를 제외하면 허름한 폐허 내부는 금방 텅텅 비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죠?"
"마음같아선 폭탄이라도 잔뜩 쑤셔박아서 붕괴시키고 싶지만, 일단은 이 정도로 만족해야겠지."
이번만큼은 닥터 윌슨도 조용히 긍정했다. 끔찍한 경험이 학구열이나 호기심을 말소시켰기 때문이다. 프로바움이라면 정말로 실행 할 것 같아서 도로스는 주위를 훑었지만, 다행히 폭탄이나 터지는 것은 주변에 없었다. 정말로 그런 짓을 저질렀다간 도저히 뒷감당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보다 다행이군."
프로바움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폭탄이 없는지 확인하는 도로스의 모습을 보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 도로스는 갑자기 무슨 말이냐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그에게 반문했다.
"예?"
"그 왜, 들킬 뻔 했잖은가. 사실 시체들 사이에 숨는 게 그리 좋은 방법은 아니라네. 전쟁이 끝나면 확인 사살을 위해 시체를 찌르고 다니는 녀석들도 많았으니."
프로바움은 파이프를 입에 물고 여운에 잠겼다. 그의 머릿속에선 수 십년 전의 격전들이 좌르륵 흘렀다. 수많은 전장의 기록을 되새김질한 그는 그윽한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다만, 상황이 상황이고 시체의 부패도나 악취 때문에 나나 그놈들이나 미처 생각은 못했지. 제정신 박힌 놈이라면 그런 역겨운 걸 보고도 거기에 숨는다는 생각은 못할 테니까."
도로스는 문득 호기심이 고개를 내미는 것을 느꼈다. 프로바움의 말대로라면 분명 들킬 위험이 그리 낮지않았다. 그럼에도 프로바움은 일언반구 않고 도로스의 말을 따랐다. 도로스는 알 수 없다는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좋게 넘어가서 다행이지, 만약 발각되었다면 크나큰 희생을 감수해야 했을 것이다. 그는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질문했다.
"그래도 들킬 수도 있었을 텐데 왜 제 의견에 따른 거죠?"
프로바움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말했다. 물론 거기엔 노련한 그조차 단번에 떠올리지 못했다는 이유도 있다. 전쟁 경험이 어느 정도 있어보이는 멕도너 역시 시체 속에 숨는다는 것을 생각치도 못하고 지나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로바움은 그런 것을 일일이 말하는 대신, 오로지 단 한 마디를 입 밖으로 꺼냈다.
"길잡이니까."
도로스는 그 말의 무게에 숨이 턱 막혔다. 모든 것이 축약된 그 문장은 강철 괴 수 십개를 합친 것보다도 무거웠으며 도시 한 개 보다 컸다. 그는 한쪽 구석에 뻗어있는 카지트를 힐끔 쳐다봤다. 이런 어마어마한 시련을 카지트는 도대체 어떻게 견뎌냈던 걸까. 도로스는 좌절한 카지트에게서 미래의 자신을 보았다. 그리고 그는 어렴풋하게 카지트가 어째서 저렇게 변한 것인지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어째서 그렇게 믿을 수 있는가. 호기심이 솟았다. 그는 그것을 입 밖으로 꺼냈다. 반쯤 충동적으로 꺼낸 질문이었다. 어쩌면 맹목적인 믿음에 대한 반항심리라고 치장 할 수 있을.
"어째서죠?"
"길잡이의 결정을 최우선으로 따른다. 길잡이가 곧 팀의 구명줄이니까."
"혹시라도 길잡이가 틀린 길을 고른다면요?"
도로스의 질문에 프로바움은 턱을 매만졌다. 눈을 감고 흠, 하고 낮은 비음을 흘리며 한참을 생각하던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부정의 의미로 고개를 저은 것이 아니다. 모르겠다는 의미에 가까웠다.
"흠, 생각해 본 적 없어서 모르겠군. 틀린 길인지 옳은 길인지 판단하는 건 내가 아니라 길잡이일세. 우린 그저 믿고 따를 뿐이지. 다른 놈들은 몰라도 이건 내 솔직한 의견이라네. 어쨌든 잡담은 이만하고 가세. 발굴대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군."
도로스는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서 입을 열었으나 나오는 것은 없었다. 길잡이의 판단에 대한 맹목적이라 해도 좋을 신뢰. 믿어주는 그에게 고마움이 있으나 막중한 책임에 대한 부담감 또한 상당했다. 만약 틀린 길을 고른다면, 그 결과가 구체적인 모습을 갖추고 나타났을 때 어떻게 될 것인가.
그는 어깨너머로 흘낏 카지트를 바라봤다. 어쩌면 저기에 누워있는 것이 그 자신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로스는 그것에 관해 진지하게 생각해봤으나 이내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아무래도 깊게 생각하는 것은 그에게 그다지 맞지않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디까지나 미래의 일이다. 지금 당장 그가 해야 할 것은 굳이 실패에 대한 가정 따위 없이 모두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일이다. 나중의 일따위 벌써부터 고민해봐야 머리만 아플 뿐 일 터. 그는 미래의 일보다 당면한 현실의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지금은 그거면 되는 거야. 도로스는 간단명료한 결론에 속으로 만족했다.
도로스가 홀로 만족 할 만한 결론을 내리는 사이, 닥터 윌슨은 프로바움의 말에 그동안 랄로프와 발굴대에 관해서 완전히 까먹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쉴새없이 몰아치는 상황 덕에 도저히 그들에게 신경 쓸 정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의 이야기가 나오자, 그는 모두 무의식적으로 랄로프의 무전을 떠올렸다.
마지막에 들린 그의 비명은 단말마와도 같았다. 닥터 윌슨들은 걱정 섞인 발걸음으로 발굴대 캠프로 향했다. 물론 오만정 떨어진 유적은 실수로라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도로스는 다시 방독면을 쓰고 걱정과 우려 섞인 표정으로 그들을 뒤따랐다. 그들의 생사에 관해서 그다지 좋은 느낌이 들진 않았다.
그리고, 그들의 걱정은 그대로 현실로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