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67화 〉6. 북부 (67/100)



〈 67화 〉6. 북부

"이것저것 고마웠소. 빌려준 무전기는 잘 쓰도록 하지."



"아닙니다. 이쪽이야 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웬만하면 무전기는 아무런 손상없이 돌려주셨으면 합니다. 값을 매기기 힘들 만큼 비싼 장비라..."




"물론이오. 나이를 적잖게 먹었지만 이런 물건을 본 게  꼽을 정도이니, 그 가치 쯤이야 알고있다오."



"알겠습니다. '그분'의 도제께서 하신 말씀이니...그럼 잘 다녀오십시오."




아침 일찍 일어난 일행은 랄로프의 배웅을 받으며 유적의 입구에 발을 딛었다. 하룻밤이나마 아무런 경계나 불침번 없이 푹 자서 그런지, 도로스들은 온 몸에 활력이 넘쳤다. 그러나,  새 없이 입을 열며 조잘댔어야 할 카지트는 평소완 다르게 아무런 말없이 입을 다물고 있었다.

곧게 폈던 등허리는 어느샌가 구부정하게 쳐졌으며, 재치와 입담으로 빛나던 입은 자물쇠로 잠긴 것처럼 굳게 다물려있었다. 눈은 살짝 풀려있고 오히려 어딘가 멍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카지트, 빨리 와요."


"어,어? 어어.."




도로스의 재촉에 카지트는 그제야 알아챘다는 듯이 어물쩍거리며 도로스들의 뒤를 따라왔다. 한 눈에 봐도 상태가 그리 좋아보이진 않는 까닭에 도로스를 위시한 일행은 걱정어린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카지트는 술취한 사람처럼 휘청거리며 그들에게 다가왔다. 그러나 술냄새는 나지 않았다. 필시 어제의 곰 계통의 수인 때문인게 분명했다. 그러나 그들로선 도와줄 수 있는  없었다.


카지트가 걱정되었으나 그렇다고 유적 조사를 미룰 수는 없었다. 시간을 미룰 수록 광신도들에게 시간을 주는 꼴이니, 결국 손해보는  무한동력을 되찾아야 하는 그들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카지트에 대한 신뢰도 있었다. 제아무리 마음이 어지럽다고 해도, 카지트는 제 본분이나 역할 마저 잊어버릴 정도로 어수룩한 녀석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적의 입구에 섰을 때, 카지트는 그들의 기대를 무참히 배신했다.

"도로스, 네가 앞장서줘."

카지트는 무표정으로 말했다. 도로스는 일순간 잘못 들었는지 고민했다. 평소의 그라면 제일 신나하며 앞장섰을 텐데. 그는 혹시나 해서 다른 닥터 윌슨과 프로바움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옅은 당황이 그들의 얼굴에도 퍼져있었다.

"예? 제가요? 항상 카지트가 길을 안내했잖아요."




"이제..모르겠다. 그냥 모르겠어."

그는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손에 파묻었다. 그답지 않았다. 처음보는 그의 약한 모습은 도로스들을 당황케 하기 충분했다. 프로바움 또한 카지트의 저런 모습을 본  없는  흐트러진 모습을 보였으나, 이내 침착함을 되찾았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도로스에게 말했다.




"도로스, 일단은 자네가 앞장서게. 저 녀석 상태를 보아하니 당분간은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군."


그는 카지트에게 뭐라고 하고싶은 눈치였으나,  또한 얼마전까지만 해도 저런 상태였으므로 말을 아꼈다. 대신 그는 한숨섞인 파이프 연기를 내뱉었다. 하는 수 없이 도로스는 일행의 선두에 섰다. 신경이 자꾸 맨 후미에  카지트에게 쏠렸으나, 그는 이내 마음을 다잡고 발을 내딛었다.




공동 안에 홀로 우뚝 선 폐가.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눈속임일 뿐이다. 유적으로 향하는 진정한 길은 폐가의 마루 밑에 교묘하게 숨겨져있었다. 그러나 발굴대가 이미 한 번 휩쓸고  덕분에, 도로스들은 별다른 노력없이 손쉽게 그 입구를 발견 할 수 있었다.

수 백년의 세월에 마모되고 녹슨 철문이 발 밑에서 그들을 반겼다. 덕지덕지 녹과 먼지가 붙은 문은 문이라기보단 오히려 뚜껑이라는 표현이 어울렸다. 지옥을 덮고 있는 뚜껑. 그것을 탐욕스럽게 감싼 적갈색에선 희미하게 피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도로스는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곤 무언가 위협이 될 만한 게 있는지 조심스레 살폈다. 그러나 그의 감각에 걸리는 것은 없었다. 그는 문을 열었다. 납작하게 짜부러진 문은 그리 뵈도 통짜 쇠로 만들었는지 그 무게가 중화기처럼 무겁기 그지없었다. 얼마나 무거운지 둘이 달라붙어서 간신히 문을 들 수 있었다.

쇠의 비명. 지옥의 단말마. 그런 것이 문이 열리며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손톱으로 철판을 긁는 듯한 불쾌감. 한 차례 고개를 흔들며 불쾌감을 털어낸 도로스는, 방독면 너머로 아래에 깔린 무저갱과 같은 어둠을 노려봤다.



그의 가슴께에 달린 라이트가 빛을 비추자, 겁먹은 어둠이 그를 피해 도망쳤다. 덕분에 그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수 미터 아래에 존재하는 하나의 통로. 마치 파이프와도 같았다. 그는 일행들과 눈으로 대화했다.


제가 먼저 아래. 경계.

닥터 윌슨과 프로바움은 고개를 끄덕였다.




도로스는 한 손에 보우건을 꼬나쥐고 조심스럽게 아래로 뛰어내렸다. 무기와 군장에 쌓인 몸은 무게가  나가는지라 낙하속도는 빠르기 그지 없었다. 그러나 뛰어난 사냥꾼이기도 한 그에게 별다른 어려움은 없었다.

착지 후, 한 바퀴 구르며 충격을 최소화. 그리고 그대로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 보우건을 전방에 겨눴다. 아직 곳곳에 군더더기가 묻어있긴하나,  나쁘지않았다. 프로바움이 그의 뒤를 따라 내려왔다.



강철로 이루어진 몸은 무게가 적잖이 나가는 터라, 쿠웅 하고 육중한 착지음이 통로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그는 도로스와 등을 마주하며 그의 반대편을 경계했다. 닥터 윌슨과 카지트도 차례차례 아래에 착지했다.

한참을 경계했지만 걸리는 것은 없었다. 금방이라도 침침한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낼 것만 같은 돌연변이들은 없었고, 등골을 싸늘하게 훑어내리는 죽음의 기척 또한 찾아  수 없었다.



"랄로프씨,의 말대,로  것 같,습니다. 돌연변이,들은 없고 함정,만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내부의 보존 상태로,봐선.."



닥터 윌슨은 넓직한 통로를 요묘조묘 살펴보며 쉴새없이 나불대기 시작했다. 그 내용의 대부분이 박사 수준의 고고학적 전문지식을 요구했으므로 도로스는 가볍게  귀로 흘러들었다. 어차피 들어봤자 이해하지 못할  뻔했다.



대신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부는 랄로프의 말마따나 대형파이프를 연상시킬 정도로 넓었다. 일방향으로  이어지는 통로. 전체의 3분의 1에 달하는 구간까진 발굴대가 함정을 전부 해체해두었다고 하니, 딱히 걱정 할 건 없었다.



문제는 그 이후인데.



도로스는 카지트 쪽을 힐끗거렸다. 여전히 기운없이 축 쳐져있는 모습을 보건대 단시간 내에 회복하긴 힘들어보였다. 하긴, 프로바움 또한 과거의 잔재에서 회복하는데 오래걸렸지 않은가. 만약 카지트가 멀쩡했더라면, 아마  기간은  더 길었을 것이다.



대충 주위를 둘러본 도로스들은 앞으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통로는 일방향인 덕분에 길을 헤멜 여지는 없었다.



"..처참하군."

길을 따라 걸을 수록 점점 그 모습을 드러내는 함정들과 즐비한 시체들의 모습에, 프로바움은 혀를 찼다. 대략 함정 하나    꼴의 시체가 있었는데, 전부 좌우 끝으로 밀려나있는 것을 보면 발굴대가 길을 트기 위해 양 옆으로 치워놓은  했다.

시체의 상태를 볼 때 함정 또한 다양했다. 꼬챙이에 꿰어진 시체부터 불에 탄듯 숯덩이가 되어버린 시체까지 가지각색이었는데, 제정신을 가지고 볼만한 광경은 아니었다.


"미친놈들.."


프로바움의 중얼거림에 도로스와 닥터 윌슨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이런  명령한 사람도, 그리고 그걸 그대로 따른 사람도 도저히 제정신이라곤 생각  수 없었다.

"함정, 수도 꽤,나 많은 것 같습,니다."

"두  걸음마다 하나 꼴로 있는  같네요. 근데 대체 이 많은 사람들은  어디서 왔을까요?"



"글쎄. 아마 각지에서  걸테지. 그리고 그게 바로 광신도의 무서운 점이라네. 평범한 사람들 속에 섞여 있으니 구분 할 수 없으니 누가 그 정체를 알겠나. 오로지 때가 되면 이렇게 사방에서 몰려들어 덥치는 거지."



도로스는 조금 소름이 돋았다. 다양한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한 마음  뜻이 되어, 목숨조차 도외시하며 달려들다니. 도대체 이들을 이끄는 자는 누구란 말인가? 도대체  정체가 무엇이길래 이런 정신나간 집단을 꾸린단 말인가.



그는 불편한 얼굴로 일행을 이끌었다. 양 옆에 즐비한 시체들 때문에 얼굴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나마 다행히도 일행 중에 비위가 약한 이는 없었다. 애초에 도로스들 가운데 피나 시체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프로바움과 카지트는 말  것도 없고, 닥터 윌슨은 의사였으니. 그나마 도로스가 제일 익숙치않겠지만, 약간의 불편함을 내비친 것 외엔 별다른  없었다.



시체와 함정의 수가 늘어갈 수록 도로스들의 대화도 점점 줄어들었다. 깊어지는 통로에 우울하게 메아리치는 목소리는 마치 시체들의 장송곡 같았기 때문이다. 결국  걸음 더 가선 대화는 단절되었다. 그들은 오로지 서로에게 달린 불빛과 익숙한 기척에 의지해 기계처럼 앞으로 나아갔다.




그때였다.




치이익, 하는 잡음소리와 함께, 무전기에서 말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약간의 놀람과 함께 일행의 눈이 닥터 윌슨이 들고 있는 무전기로 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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