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화 〉6. 북부
카지트는 돌바닥 위에 걸터앉았다. 머릿속은 어지러웠으며 정신은 멍했다. 과거의 연과 맞닥뜨릴 줄은 몰랐다. 아니, 언젠간 마주해야하는 운명이란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게 바로 지금이라곤 생각치도 못했을 뿐이지. 그는 얼굴의 상처를 매만졌다. 멍든 곳들이 점점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래도 반사적으로 피해를 최소화한 덕분에 피는 흘렸을지언정 어디 한 군데 부러진 곳은 없었다.
그는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의 몸은 분명 현재에 존재하지만, 그의 눈은 먼 과거를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녹슬어버린 톱니바퀴처럼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알고..있었는데.."
입에선 녹슨 쇳소리가 흘렀다. 동시에, 그것은 차디한 금속의 소리였다. 그는 어느새 자신이 예전의 그로 돌아가있음을 깨달았다. 뼈를 깎는 고된 훈련과 냉철한 이성으로 제련된 한 자루의 비도였던 그 때의 모습으로.
이런 모습을 일행들에게 보여주긴 싫었다. 명령에 따라 적을 죽이는 사냥개. 그것만큼은 일행들에게 감추고 싶은 마음이다. 이제는 그런 생활을 청산했다고 하나 여전히 그 기억은 주박처럼 그를 따라다녔다. 특히 같은 부대에 속했던 이들에게 저질렀던 일이.
그는 제일 금기시 되는 동료 살해를 저질렀다. 그것도 한 명이 아닌 세 명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하나 동료를 소중히 여기던 그에겐 커다란 충격이었다.
그는 고민했다. 대체 어떤 얼굴로 그들을 봐야 할까. 용서받을 수 있기나 한 걸까. 의문이 도진다. 그는 너무나 큰 죄를 지었다.
고민은 깊어지나 나오는 해답은 없었다. 그리고 문득 의문이 들었다. 어째서 카라마조프가 이곳에 있는 걸까? 카지트가 깨어났을 때 그는 이미 남부에서 벗어나 있었던 까닭에 남부에 관한 소식이라곤 남부가 문을 닫았다는 것 정도 밖에 들을 수 없었다.
"어째서..카라마조프가 북부에 있는 거지?"
불안한 예감. 등골을 찌르르 훑어내리는 것이 있었다. 몇 가지 가정들이 머리속에 스쳐지나갔으나, 어느 것이든 좋지않았다. 입 안이 마르는 것 같았다. 기분나쁜 불쾌함이 엄습했다.
한동안 고민하던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먹먹한 마음이지만 그래도 가만히 앉아있을 수만은 없었다. 내일 유적 안으로 들어가야하는데 그 때문에 다른 일행에게까지 민폐를 끼칠 수는 없잖은가? 적어도 유적으로 향하기 전에 다시 한 번 카라마조프와 대화해보고 싶었다.
"카지트, 이 새끼!"
카라마조프는 카지트에게 달려들기 위해서 몸부림쳤으나, 그의 팔다리를 의자에 구속한 수갑은 그리 쉬이 끊어지지 않았다. 그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증오스럽다는 듯 사지를 구속하고 있는 수갑을 노려봤다. 마치 철근을 끊어서 만든 듯한 그것은, 곰 계통 수인의 강인한 힘 앞에서도 멀쩡했다.
"난 이야기를 하러 왔어."
카지트는 주위의 의자를 빼서, 그 위에 걸터앉았다. 삐걱, 하고 어디선가 소리가 났다. 필시 의자가 낡은 것이 틀림없었다.
"너 따위와 이야기 할 건 없다."
그르릉, 하고 그는 낮게 위협음을 냈다.
"..카라마조프. 내 이야기를 들어줘."
"닥-쳐-라!!"
카라마조프는 어마어마한 음성으로 거칠게 포효했다. 그가 몸을 뒤흔들며 용틀임 칠 때 마다 수갑과 의자가 부서질 듯 팽팽해지며 연신 비명을 질러댔다. 카지트는 가라앉은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다 고개를 숙였다. 잡아먹을 듯 으르렁 거리는 목소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천천히 씨근덕거리는 헐떡임으로 바뀌었다. 카지트는 그 씨근덕거림마저 잦아들었을 때, 카지트는 고해하듯 입을 열었다.
"내가 녀석들을 죽였다."
세 명. 일언반구도 없이 같은 레인저 소속의 세 명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는 반사적으로 총을 쏘았다. 행동은 간단했으나 그 결과는 최악의 형태로 그에게 날아들었다. 살의에 반응해서 반사적으로 쏜 총알은, 언제나처럼 치명적인 급소를 관통해버린 것이다. 어떻게 손을 써볼 새도 없이 달려들었던 셋은 즉사했다.
나중에 곰곰히 생각해봤을 땐, 아마 그 셋은 목줄 혹은 감시원이었을 것이다. 최정예 특수부대인 '레인저' 내에 누군가 배신 할 낌새가 보이면 바로 처리하는. 다만 그 때 당시엔 그런 생각 조차 할 수 없었다. 일그러진 얼굴로 그에게 무기를 겨누는 동료들. 식어가는 세 명의 시체. 계약. 그 모든 것들이 머릿속에 휘몰아치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 원래대로라면 감시원들은 목격자가 없는 곳에서 쥐도새도 모르게 그를 암살해야했지만, 급박하게 돌아가는 당시의 상황에 무턱대고 달려들었으리라. 그러나 그런 감시원이라도 한 때나마 동료였다. 그리고 동료들 앞에서 동료를 죽인 죄는 컸다. 상대가 먼저 덤벼들었다곤 해도 결과적으론 그가 덤벼든 셋을 죽여버렸으니, 그 광경을 목격한 다른 레인저들이 그에게 달려든 것도 무리가 아니다. 카지트는 입술을 깨물고 재차 입을 열었다.
"셋이라곤 하나, 난 충분히 제압 할 수 있었어. 적어도 녀석들한테 기회라도 줬어야했는데.."
"그런 스파이놈들 따윈 내 알바 아니다."
"무슨..?!"
"녀석들이 스파이가 아니었다면 네 놈 한테 달려들 이유도 없었겠지. 당시엔 반사적으로 움직이느라 깨닫지 못했지만, 나중에 차분히 생각해보니 그렇더군. 우리가 그런 것조차 모른다고 생각했나?"
"그럼 어째서.."
나를 그렇게 증오하는 거냐. 그 말이 쉬이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카라마조프는 카지트가 삼킨 뒷말을 이해하고는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악의와 살의로 점칠된 미소였다.
"네놈 때문에 얼마나 많은 인원이 죽었는지 아나?"
"..잠깐, 그게 무슨 소리야? 많은 수가 죽었다니?"
카지트는 당황했다. 그 때문에 목숨을 잃은 자들은 단 셋 뿐이었다. 동료 살해를 목전에서 목격하고 뒤늦게나마 그에게 달려든 다른 레인저 대원들은 크고작은 상처는 입었을 지언정 목숨을 잃은 이는 없었다. 오히려 그들과 맞상대하던 카지트가 사경을 헤메다가 간신히 몸만 빼냈을 뿐.
카지트는 대화가 살짝 엇도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지금까지 몇 번 느껴본 적 없던 강렬한 불안함이 그를 덮쳤다. 꿀꺽 하고 침삼키는 소리가 그 무엇보다 크게 들렸다.
"아직도 모르겠나?"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카라마조프의 추궁에도 카지트는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는 정말로 알 수 없었다. 아니, 모른 척하고 있었다. 이미 그의 머릿속 한 구석에선 최악의 가정이 떠올랐다 사라지고 있었다. 다만 그는 그것을 외면했다.
"크하! 이 빌어먹을 새끼! 넌 네가 죽인 세 명이 다라고 생각하는데, 개소리!"
"...세 명 이외에 죽은 사람은 없을 텐데?"
크흐흐, 하고 카라마조프는 괴성섞인 신음을 억눌렀다. 카지트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의 코앞까지 닥쳐든 잔혹한 진실이 역겨운 피냄새를 흩뿌리고 있었다. 불안감이 그를 살라먹으며 점점 덩치를 부풀렸다.
"아쉬드 그 역겨운 돼지새끼가 정말로 우리를 그냥 내버려두었을 거라고 생각했나? 응?"
"..설마.."
카라마조프의 발언에서 무언가를 잡아낸 카지트는 말을 잃었다. 최악의 가정이 천천히 머릿속을 잠식한다. 제발 부디. 그는 다리를 떨었다. 어디선가 딱딱 하고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소리는 가까웠다. 주위를 둘러본 그는 그게 그의 입에서 나는 소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째서.."
나온 목소리는 탁하고 갈라져있었다. 그의 두 눈에 카라마조프가 입을 여는 게 슬로우모션처럼 보였다. 제발, 말하지마. 당장이라도 지옥의 불꽃을 토해낼 것만 같은 저 입을 막아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무력했다. 온 몸엔 힘이 들어가지 않았으며 탈력감과 피로감이 그의 전신을 내리눌렀다.
그의 간절한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카라마조프는 씹어먹듯 내뱉었다.
"크흐흐, 이딴 자식이 한 때나마 같은 소속이었다니, 수치스럽군 그래. 그 잘나신 네 새 주인님께선 친히 우릴 소탕하시더군. 덕분에 모두 죽어버렸다. 흐,흐하하하! 모두 죽었다고!! 살아남은 건 나를 비롯해 한 손가락에 꼽을 정도일 걸?"
카지트는 할 말을 잃었다. 최악의 가정은 언제나 그렇듯 맞아 떨어졌다. 그것은 그가 예전에 세웠던 계획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가 소속되어있던 부대는 그야말로 최정예 중의 최정예인 특수부대이다. 단순히 몰살시키기엔 그 가치가 너무나 높았을 텐데.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카지트는 아쉬드에게 협력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모두 죽어버렸다고? 누군가 거대한 망치로 그의 머리를 후려친 것 같았다. 시야가 빙글빙글 돌고 정신이 명멸했다. 호흡이 가빠졌다. 손끝과 발끝이 점점 얼어가는 것처럼 감각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카라마조프는 충격에 얼어붙은 카지트를 노려보며 물었다.
"너는 왜 배신했지?"
"..녀석이 제안했어. 녀석을 도와준다면, 이후에 우린 더 이상 더러운 뒷구멍을 닦아줄 필요는 없다고. 더러운 일을 처리하는 특수부대 따위가 아니라 그냥 평범한 군인이나 치안대 따위로 배치시켜 줄 수 있다고."
대답을 들은 카라마조프의 얼굴이 분노를 넘어 격노의 색으로 울그락불그락 물들었다. 흉신악살의 입에선 그 무엇보다도 저열하고 역겨우면서도 차갑게 몸을 옥죄는 저주가 끊임없이 터져나왔다. 그를 구속한 의자와 수갑이 비명을 지르며 터져나갈 듯 팽팽해졌다. 삐걱, 하고 또다시 쇳소리가 났다.
"고작 그 따위것에 우리들을 팔았나!!"
카라마조프의 포효에 카지트는 반사적으로 변명을 내뱉었다.
"빌어먹을, 아니야! 다들 말했었잖아. 더 이상 이 따위 구질구질한 짓은 질색이라고! 제기랄, 난 길잡이로써.."
"넌 틀렸다! 네 선택이 우리들을 죽였어!"
그것만은 부정 할 수 없었다. 카지트는 입을 다물었다. 의도했던 하지않았던, 그는 한 때 동료였던 자들을 모조리 죽음의 구렁텅이로 밀어넣었다. 그래, 인정하자.
나는 틀렸다.
카지트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피가 진득하니 배어나왔지만 그는 신경쓰지 않았다. 따끔해야 할 고통은 그에게서 아무런 감흥조차 줄 수 없었다. 그의 선택으로 레인저의 대부분이 죽었다. 그의 선택으로. 그 때엔 맞는 길이다 생각했었지만, 결과는 그가 틀렸다는 걸 말해주었다. 그는 틀렸다. 그렇다면 그들이 옳았던 걸까? 도대체 어떤 모습으로 그들을 바라봐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독을 토해내는 카라마조프를 앞에 두고, 카지트는 말없이 걸어나왔다. 형용할 수 없는 무기력감이 그를 지배했다. 끼긱, 하고 또다시 의자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아니, 의자에서 나는 소리가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은 마음이 꺾이는 소리인지도 모른다.
카지트는, 그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할 지 알 수 없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