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화 〉6. 북부
"..결정했네."
북부에 도착한 후 프로바움이 내뱉은 첫마디. 일행은 반색하며 자동인형을 쳐다봤다. 오는 내내 말없이 침묵을 고수하던 그가 마침내 입을 연 것이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그는 천천히 그의 결심을 털어놓았다.
"나는...스승님을 뵈러가지 않겠네. 바로 유적으로 출발하도록 하지."
프로바움은 말을 마치곤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 결심은 담겨있었으나 설명은 없었다. 다양한 궁금증이 잇따랐다. 대체 그의 스승이란 누구인가? 그와 스승은 대체 어떤 관계이길래 저리도 만나길 거부하는가? 그러나 의문을 표한다고 해도 고집스런 자동인형은 그리 쉬이 말해줄 것 같지는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일행은 프로바움을 쫓아갔다.
북부의 대도시, 하겐은 많은 부분에서 다른 대도시들과 달랐다. 도로스들이 도시에 대해 가진 첫 인상은 바로 삭막하는 것이다. 그동안 보아왔던 시대별로 다양한 양식의 건물이나 장식 따위는 일체 찾아볼 수 없었다. 대부분의 건물은 성냥갑같은 직사각형이었는데 일체의 장식없이 그저 회색 페인트로 칠해져있는 게 전부였다.
다만 그 대신일까, 어느 도시보다 월등히 많은 톱니바퀴들과 기계장치들, 그리고 파이프가 도시 곳곳을 이어주고 있었다. 마치 파이프들의 도시같다. 도로스는 멍하니 생각했다. 뿌옇게 하늘을 드리운 연기와 그 사이로 얼굴을 내민 인공조명들의 빛. 삭막하지만 한편으로 몽환적인, 상반된 풍경이그들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도로를 거니는 사람들 또한 달랐다. 대부분이 동물계통의 수인으로 가득했던 도시들과 달리, 하겐은 자동인형들로 넘쳐났다. 카지트보다 키가 한 뼘은 더 큰 자동인형, 도로스의 반도 안되는 크기의 자동인형. 하나같이 같은 형태를 가진 이가 없었다. 수 십 혹은 수 백의 자동인형들. 오로지 소수의 수인들만이 드문드문 모습을 보였다.
"여긴 엄청 다르네요."
놀람과 신기함으로 가득찬 도로스의 음성에 카지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긴 북부니까. 자동인형들이 대부분이지. 근데 그 대부분이 진짜 재미없고 삭막한 녀석들이라 북부는 그리 인기있는 장소는 아냐. 닥터는 와본 적 있어?"
닥터 윌슨은 고개를 흔들었다.
"처음,입니다. 그동,안 말만 들었,지, 이런 곳,일 줄은 몰랐습,니다."
"말? 무슨 말을 들었는데?"
"무언,가를 기록하고 연구,하기 좋아하는 자동인형,들의 특성상 학자,들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한 번 쯤 이,야기를 나누어보고 싶습,니다."
"것 참, 배운 녀석들이란."
학자다운 발언에 카지트는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학문에 관한 심도있는 토론같은 건 그의 성미에 전혀 맞지않았다. 오죽하면 책을 읽었다고 일행들이 놀라 자빠질까.
"그런데 카지트, 혹시 프로바움의 스승이 누군지 압니까? 그 사장님도 함부로 못하는 사람
인 것 같던데."
"아니. 나도 저 영감탱이에 관해선 모르는게 많아. 잘 알려주지도 않거든. 그리고 남의 사생활이나 과거를 캐는 건 불문율이고."
"에이, 그래도 한 번 물어보고 올게요."
카지트는 저 앞을 걸어가고 있는 프로바움에게 달려가려는 도로스를 잡아세웠다. 괜히 그를 자극하는 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다가 혹시 프로바움이 정말로 화를 낸다면 해결하는 건 일행의 리더인 그의 몫이 될 터. 카지트는 그런 귀찮은 일 따윈 사양이었다.
"아서라. 저 영감이 잘도 가르쳐 주겠다. 십 년을 넘게 알고 지냈는데도 가르쳐준 적도 없
어."
"혹,시 프로바움은 카지트,의 사생활이나 과,거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까?"
"어..아니? 아마 물어본 적도 없을 걸?"
에메랄드 컴퍼니 하겐지부에 도착할 때까지 도로스들은 프로바움의 스승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열띈 토론을 벌였지만 쓸만한 내용은 하나도 건질 수 없었다. 애초에 그 주제의 대상인 프로바움이 입을 다물었기 때문이다.
하겐지부는 에메랄드 컴퍼니 본사만큼 거대하고 화려하지 않았다. 북부의 다른 건물들처럼 장식하나 없는 수수한 외관과 크기는 실용성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지부를 맡은 이의 성품이 어렴풋이 드러난 것 같았다. 내부 또한 최소한의 장식으로 구색만 갖추고 있었고, 직원의 수 또한 건물 크기에 맞게 많지 않았다. 조금 특이한 점은 직원의 반이 자동인형이라는 점 정도일까. 그것 외엔 에메랄드 컴퍼니의 지부라기보단 중소회사에 가까운 이미지였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카운터에 있던 토끼 계통의 수인 여성이 그들을 반겼다. 카지트는 하얀 털을 가진 그 여성이 마음에 드는 듯 끊임없이 윙크를 날리며 추파를 던졌다. 교섭이나 대화는 보통 카지트의 일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저대로 내버려두면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엄습했다. 도로스는 닥터 윌슨과 눈을 마주쳤다. 그 또한 그와 비슷한 느낌을 받은 것 같았다.
그들은 프로바움을 넌지시 쳐다보았지만, 이내 고개를 내젓고 한숨을 내쉬었다. 도시로 들어온 이후부터 그는 주위를 살피거나 초조해하는 듯, 명백히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행동을 보여주었다. 분명 전에 언급된 '스승'이라는 자와 관련이 있는 듯 했지만, 어째서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 이해 할 수 없었다.
"저,희가 나,서야 할 듯 합,니다."
닥터 윌슨의 말에 도로스는 동의했다. 프로바움의 조력은 얻을 수 없을 듯 하고, 카지트는 임무따윈 새까맣게 까먹은 듯 추파나 던지고 있으니. 결국 총대를 멘 닥터 윌슨이 나섰다. 아무래도 대인관계능력이 도로스보다 뛰어난 까닭이다.
카운터의 직원은 닥터 윌슨의 얼굴을 보고 살짝 겁에 질린 듯 했지만, 카지트와 그를 번갈아 바라본 후, 주의를 닥터 윌슨에게 돌렸다. 그래도 먹히지도 않는 추파를 끊임없이 던져대는 남자보단 낫다고 판단한 듯 했다.
"어떤 일로 오셨습니까?"
"이,것 때문,에 왔습니,다. 지부장님,을 뵙고 싶습니다,만."
그는 본사를 떠나기 전에 슈나이더에게 받은 명령서를 보여주었다. 뻣뻣한 하얀 종이 위에 금박 테를 씌운 그것은 한 눈에 봐도 한 두푼 하는 게 아니었다. 직원은 그것을 한 차례 훑어본 뒤, 눈을 크게 떴다.
사장인 게름하르트의 인이 새겨진 종이는 눈 앞의 기괴한 일행이 사장과 관련있음을 암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일행에게 양해를 구하고 혼비백산하며 지부장을 부르러 달려갔다. 에메랄드 컴퍼니의 사장이란 직함의 무게는 황금보다 무거웠기에, 지부장이 그들을 맞이하러 오는덴 채 십 분도 걸리지 않았다.
발에 불이 붙은 것처럼 부리나케 달려온 이는 예상 외로 동물 계통 수인이 아닌 곤충 계통 수인이었다. 그는 다종다양한 일행의 면면을 보고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웃으며 다가왔다. 자신을 아치발드라고 소개한 이는 갈색 메뚜기를 닮은 외관을 하고 있었는데, 키는 거의 도로스와 비슷할 정도였다.
"잘/ 오셨습/니다. 필/요한 것은 준비되/어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물론 전 그 내/용을 알지 못하니 비밀엄수/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갈라지는 듯한 메뚜기의 목소리 또한 곤충 계통 수인 특유의 구강구조 덕분에 기이하게 들렸다. 닥터 윌슨과는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도로스는 놀람에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그건 비단 구강구조의 신기함 때문은 아니었다. 아치발드는 그들에게 갈색 봉투를 내밀었다. 봉투는 확실하게 밀봉되어있었는데 종이를 넣는 입구부분엔 사장의 인이 찍힌 밀랍으로 봉인되어 있었다.
"그런데 다들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다음 방/문 때엔 좀 더 나은 서비스/를 드리겠/습니다."
사장 휘하의 인물들에게 잘 보여서 사장에게 어필하겠다는 속셈이 훤히 보였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딱히 나쁜 제안은 아니었기에, 일행은 차례차례 이름을 말했다. 도로스, 카지트 그리고 닥터 윌슨의 순서를 마치자, 그는 남은 자동인형에게 주의를 돌렸다.
"귀하/께선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웃는 낯으로 물었으나 돌아오는 것은 굳게 다물린 입 뿐이었다. 일행은 말없이 둘을 응시했다. 아치발드의 표정에 난감한 기색이 서릴 때 쯤에야 프로바움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프로바움이라고 하오."
"그, 그렇/군요! 프로바움님/이라...프로바움?"
어디선가 들어본 것같다며 한참 자동인형의 이름을 되풀이하던 그는, 이내 눈을 크게 떴다. 어디서 그 이름을 들어봤는지 떠올린 까닭이다.
"날..아는가?"
"혹시..레프코위츠님/의 도제 분, 이십/니까?"
오랫만에 듣는 스승의 존함에 기억 위로 쌓였던 녹들이 부서지듯 깨어졌다. 이 얼마나 오랫만에 듣는 존함인지! 그리고 하얀 도화지 위에 찍힌 검은 점처럼 그 스승의 명성에 누를 끼치는 게 바로 그였다. 그는 음울함마저 풍기는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이거 참! 만나 뵙게 되서 영광입니다. 설마 그 베일에 쌓인 도제분과 만날 수 있다니!"
"베일에 쌓인? 그게 무슨 말이지?"
이번엔 프로바움이 당황 할 차례였다.
"안면이 있는 자동인형에게서 들었습니다. 오래 전에 그분께서 도제를 들이셨지만 아무도
그 정체를 모른다고. 아주 극소수만이 그 이름이 '프로바움'이라는 것만 안다고."
프로바움은 문득 스승이 그를 배려해주었다는 것을 느꼈다. 그렇지않다면 북부를 떠난 70여년 간의 세월동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모를 수가 없었으니까. 모든 자동인형들의 존경을 받는 분들의 후계자인 도제라면 수많은 관심 속에서 이름이 알려질 수 밖에 없을 터였다.
스승님, 당신은 언제나 이 불민한 제자를 보살피시는 구려.
그는 말없이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