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화 〉5. 대면
"...북쪽으로 향한다. 놈들을 잡아라."
어둠 속에 몸을 파묻은 인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명령이 적힌 쪽지를 소리내여 읽어내린 사내는 이를 드러내며 힐쭉하니 웃었다. 이 명령을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렸던가! 치욕적이었던 그동안을 생각하면 절로 이가 갈렸다.
공교롭게도 '놈들'에게 원한이 있는 건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이 또한 마찬가지이다. 새까만 어둠 속에서 샛노란 눈만이 요요로히 빛났다. 그 속에 득시글 거리는 부의 감정은 끔찍하다는 말 한 마디로는 표현이 불가능 했다.
"잘 되었습니다. 받은 만큼 돌려줘야죠. 아니, 이자까지 쳐서 돌려줘야 하겠군요."
큭큭, 어둠 속에서 한 사내가 걸어나왔다. 덩치는 그 옆의, 쪽지를 쥔 사내보다 월등히 작다. 아니, 어둠 속에 숨어있던 사내의 덩치는 표준보다 약간 호리호리한 정도. 다만 비교대상이 옆에 선 사내이다보니 아무래도 왜소해질 수 밖에 없었다.
표준보다 약간 마른 체형을 왜소하다고 표현해야 할 정도로 쪽지를 든 사내는 거대했다. 검은 털 아래 용솟음치는 근육은 마치 강철 로프를 꼬아놓은 것 같았다. 격전 속에서 단련된 몸은 이미 전투기계와 같다. 그는 흉악한 기백을 흩뿌리며, 방금 전까지 어둠 속에서 몸을 숨기고 있었던 사내를 바라봤다.
"다른 놈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다만 그 고철덩이만큼은 손대지 마라. 그 놈은 내 거다."
바위처럼 묵직한 목소리가 진동했다. 그 목소리의 진원지를 향해서, 호리호리한 사내를 입을 열였다.
"그런 쓰레기 따윈 어찌되든 제 알 바 아닙니다. 하지만 살쾡이 자식만은 제가 죽일 거니 손대지 마시죠?"
둘은 서로 이글거리는 시선을 마주하다, 고개를 돌렸다. 서로 바라는 바는 부합했다. 목표 중엔 각자 원하는 녀석 외에도 다른 두 명이 더 있었지만, 그들은 관심없었다. 부하에게 맡길 셈이었다.
둘은 천천히 어둠에 녹아들 듯 사라졌다. 그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북부. 복수자들은 복수를 꿈꾸며 그곳으로 향했다.
"대체 저 위에 무엇이 있을까요?"
"글쎄. 다만 무한동력이라 불리는 것을 단순한 열쇠로 사용 할 정도니...감이 잡히지 않는군."
공교롭게도 오르카와 사장이 나누었던 대화가 이곳에서도 흘러나왔다. 달리는 다각열차 안, 도로스와 일행은 서로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걔 중 유일하게 프로바움만이 멀찍이 떨어져 앉아, 홀로 수심에 잠긴 얼굴로 사색하고 있었다.
이야기나누는 내내 도로스와 닥터 윌슨의 눈길은 강철조각상처럼 가만히 앉아있는 그의 동료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에메랄드 컴퍼니의 사장과 대면한 이후로 침울하다 못해 음침해져가는 동료가 걱정되는 까닭이다. 그러나 둘은 자동인형을 위해서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다는 것을 알고있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그의 문제이지, 그들이 참견하고말고의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카지트는 점점 추욱 쳐지는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노력했다. 이런 우울한 분위기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닥터 윌슨과 도로스 사이에 파고들어 어깨동무를 했다.
"자 자, 영감은 내버려두라고. 영감도 뭔가 사연이 있겠지. 저럴 땐 생각을 정리 할 수 있도록 혼자 내버려두는 게 상책이야. 괜히 끼어들어봤자 서로 기분만 상하거든."
어물쩡한 대답이 양 팔에서 들려왔지만, 둘의 시선은 여전히 프로바움을 흘낏거리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카지트는 둘을 데리고 프로바움에게서 멀찍히 떨어져 앉았다. 그 자리에 계속 있었다면 부모님 눈치보는 죄지은 꼬맹이 마냥 힐끔거릴 게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주제를 바꿀 필요성을 느꼈다. 관심을 확 끌어올만한 주제가 아니라면 언제까지고 프로바움 쪽을 주시하고 있을 게 뻔히 보였다. 그리고 때마침, 카지트는 그 적절한 주제 하나를 알고 있었다.
"야, 좋냐?"
카지트의 껄렁거리는 태도에 도로스는 당황하며 반문했다. 갑작스런 카지트의 태세변환에 놀란 티가 역력했다.
"네,네?"
"그렇게 원하던 토벌대도 보냈으니 문제 해결이잖냐. 더 이상 걱정 할 필요도 없고."
그제야 그는 카지트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알아챘다. 애초에 도로스가 마을을 나왔던 이유는 마을을 침공한 돌연변이들을 없애기 위해서였다. 그러기 위해선 토벌대를 부르는 것이 필수이고. 수많은 고난과 역경을 지나왔지만, 아직 갈 길은 멀 거라 생각했다. 그에게 주어진 기한에 비해 모아놓은 돈은 턱없이 부족했으니까.
그러나 차 한 잔 마실 시간만에 그 목표가 이루어졌다. 웃음이 실실 새어나올 정도로 기쁜 한 편, 순식간에 목표가 사라지자 약간의 허탈함 또한 남아있었다. 마치 꿈을 꾸는 것같다고 도로스는 생각했다. 분명 현실이건만 실감이 나지 않았다.
"예..그렇죠. 그런데 기쁘긴한데 조금 실감이 안나요. 그렇게 고생했던 게 고작 말 한 마디에 바로 이루어지다니."
"세상하는 게 다 그렇지 뭐. 안그래?"
그는 동의를 구하듯 닥터 윌슨을 쳐다보았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닥터 윌슨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그렇긴 합,니다. 갖고,싶은 책을 사려,고 돈을 모았는데, 다음 날 팔린 다,거나 하는 그런 일이 번,번한 게 세상,입니다."
아주 지독합니다, 덧붙이며 닥터 윌슨은 묘하게 구체적인 이유를 입에 담았다. 그의 말을 빌리면 될 것같은 일도 안되고, 안될 것 같던 일도 갑자기 이루어지는 게 세상이란다. 그의 특징이 묻어나는 해설에 도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 하려는지 알겠어요. 그런데 갑자기 소원이 이루어지니까 살짝 불안한 거 있죠? 그래도 뭐, 카지트랑 닥터 윌슨 말대로 별 일 없겠죠."
"..그러나 그것이 실제로 일어날 줄은 도로스는 꿈에도 몰랐다."
카지트의 초를 치는 발언에 도로스는 약간의 경멸마저 섞인 눈길로 그를 노려보았다. 잘 나가다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닥터 윌슨 또한 어이없어하는 시선으로 카지트를 쳐다보았다. 잘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악담을 퍼붓는 건 무슨 경우란 말인가.
둘의 싸늘한 시선에 카지트는 허둥거렸다. 그가 생각했던 반응과 다른 까닭이다.
"..그게 뭡니까?"
"그 왜, 소설책 보면 나오잖아. 나중에 뭔가 일어날 거라고 알려주는 거."
카지트는 필사적으로 닥터 윌슨에게 눈짓했다. 수많은 서적을 독파한 닥터 윌슨이라면 이런 구절 정도는 알 거라고 생각했는데! 애초에 도로스가 쓸데없는 걱정을 하길래, 분위기를 풀어줄 겸 농담을 해본 거였다. 카지트는 도로스라면 몰라도 박학다식한 닥터 윌슨이라면 분명 적절한 대답을 적절한 타이밍에 적절하게 해줄 것이라 믿었었는데..
카지트가 우울해하던 말던, 도로스와 닥터 윌슨은 카지트의 입에서 나온 한 단어에 얼어붙었다. 소설. 즉, 다시 말해서 책. 그 책이란 것은 그들이 아는 바로 그 책인가? 사전적인 정의부터 철학적 관념까지, 책에 관한 모든 것을 훑고있던 두 정신은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듯한 충격에 빠르게 몸으로 복귀했다.
"어이, 얌마! 둘 다 왜 그리 놀라고 있어?"
카지트는 다시 한 번 둘의 등을 퍽퍽 두들겼다. 분명 사심이 깃든 손짓이다. 한 번 씩 등을 두들길 때마다 몸이 너풀너풀 흔들렸다. 그렇게 두어 차례를 하자, 둘의 반응은 한 발자국 늦게 뒤따라왔다.
"카..지트가, 책을 읽는다고?!"
"맙소사. 도로스, 제 뺨 좀 꼬,집어주,십시오. 지,금 제가 꿈을 꾸,는 겁니까?"
반쯤 패닉에 휩싸인 둘은 목소리를 높이며 소란을 피웠다. 에메랄드 컴퍼니의 다각열차라 아무도 없어서 다행이지, 만일 공용 다각열차였다면 주위에서 시끄럽다며 한 소리 들었을 게 뻔했다.
도로스는 닥터 윌슨의 부탁아닌 부탁에 장갑 낀 손을 그의 뺨에 가져다대였다. 하지만 매끄러운 키틴질의 외골격은 인간의 그것과 달리 유연성은 0에 가까웠다. 어떻게든 꼬집어보려고 했으나, 손이 미끄러질 뿐이었다.
"딱딱하고 미끄러워서 못 꼬집겠는데요."
"그럼 뒤,통수 한 대만 때,려주십시,오."
퍽, 하고 도로스의 손이 깨끗한 궤적을 그리며 닥터 윌슨의 뒤통수에 꽂혔다. 그는 짤막한 신음을 내뱉고 엎어졌다. 귀뚜라미는 말없이 일어서서 절망적인 표정으로 도로스와 시선을 나누었다. 카지트가 책을 읽는다는, 그 무엇보다도 이질적이고 괴리감있는 사실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오, 데우스 엑스 마키나시여. 둘은 나즈막히 기계신의 이름을 읊조렸다.
"아오! 다들 왜 이래? 내가 책을 읽는 게 그렇게 이상해?"
둘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카지트가 책을 읽는다는 건 게름하르트가 사실은 여자였다거나 프로바움이 사실은 12살이라거나, 그런 거짓말과 동급이었다. 도로스는 약간 분하다는 듯 물었다. 심지어 카지트도 책을 읽는데, 그는 지금까지 책을 손에 대본 적조차 없었다.
"혹시 그 책의 제목이 뭔가요? 도박묵시록 뭐 그런 겁니까?"
"이건 또 무슨 참신한 헛소리야. 나도 책쯤은 읽는다고. 내가 읽은 건 으쌰으쌰 파라다이스라는 건데, 알고있...을 리가 없지. 깡촌꼬맹이니까. 닥터는 들어봤어? 이거 꽤 유명하다던데. "
도로스는 어리둥절했지만, 만물박사의 조수 쯤 되는 지식을 가진 닥터 윌슨은 알 것 같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 때 꽤나 유명했던 소설이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 유명세는 보통의 그것과 궤를 달리하긴 했지만.
"ㅇ, 예...유명,한 야설 아닙,니까. 그것,도 수위 높기로 소,문난. "
"오, 꽤 잘 알고있네? 읽어봤어?"
닥터 윌슨은 침묵하며 시선을 피했다. 카지트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닥터 윌슨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둘 만 아는 분위기에 도로스는 저도 알고싶어 끼어들었다.
"야설? 그건 또 뭐에요? 들어보니까 책인 것 같은데."
닥터 윌슨과 카지트는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마치 서로 짜기라도 한 것처럼 똑같은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좋아, 이 순수한 녀석한텐 비밀로 하자. 굳이 순수한 녀석을 타락시키고 싶진 않았다.
"난 설명같은 거 잘 못하니까, 닥터가 알려줄거야."
그렇지? 카지트는 입꼬리를 올리며 닥터의 어깨를 다시 두들겼다. 닥터는 반항의 몸짓을 해보였지만 통하지 않았다. 카지트는 한바탕 터지려는 웃음보를 꾹 부여잡고, 한 걸음 물러나서 둘이 입씨름하는 광경을 쳐다보았다.
보기 좋군. 카지트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곤 슬쩍 프로바움 쪽을 바라봤다. 그는 여전히 굳은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사실 무슨 연유인지 카지트도 잘 몰랐다. 프로바움과 십 년 가까이 어울리긴 했지만, 사적인 영역까지 발을 들이진 않았기 때문이다. 과거의 행적같은 사적인 일에 접근하지 않는 것이 용병들 사이의 불문율이었다.
일부로 다른 두 녀석들을 프로바움과 떨어뜨려 놓은 것은 추욱 쳐지는 분위기가 싫어서이기도 했지만 프로바움 때문이기도 했다. 주위를 잊고 골몰한다고 해도 곁에서 힐끔힐끔 쳐다보는 시선은 분명 성가시기 짝이 없을 테니까. 카지트 나름의 배려였다.
다행히 도로스와 닥터 윌슨 또한 무르익은 대화에 빠져, 더 이상 프로바움을 신경쓰는 눈치는 아니었다. 어이, 영감.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빨리 정신 좀 차리라고. 카지트는 프로바움에 대한 걱정을 마음 한 곳에 숨긴 채 웃는 낯으로 일행을 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