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화 〉5. 대면
도로스는 다각열차를 출발시키려던 슈나이더를 멈춰세웠다. 찰나의 동요. 슈나이더는 무표정했으나 그 목소리에 깃든 미약한 흥미와 당황마저 감출 수는 없었다. 그것마저 금방 사라지긴 했으나 그 미묘한 차이를 놓칠 만큼 둔한 이는 없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도시에서 우리를 감시하고 있었죠?"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또 한 번의 동요. 돌려말하는 도시의 화법에 익숙한 그는 도로스의 거칠고 직설적인 화법에 적잖이 당황한 듯 했다. 카지트를 위시한 나머지는 방관자의 시선으로 그 광경을 즐겼다. 고고한 척 하는 녀석의 체면이 구겨지는 게 재밌지 않을 리 없었다.
딱봐도 슈나이더는 모른척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문제는 물증이 없기에 잡아떼면 그만이라는 점. 처음은 당황했지만 사장을 모신다는 그 위치는 노름으로 딴 게 아닌 듯 순식간에 제 페이스를 회복한 녀석은 끝까지 저는 모르는 일이라는 듯 잡아뗐다. 결국 한참 말씨름을 하던 도로스는 먼저 손을 떼고 물러섰다. 계속 이야기해봤자 시간낭비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슈나이더는 다른 일행을 힐끗 본 후 문을 열고 다각열차의 앞부분으로 이동했다.
"무슨 저런 사람이 다 있습니까? 분명히 그 때 잠깐 느꼈던 그 시선이 맞는데 인정하질 않으니."
"큭큭, 진짜 확실하긴 해? 네가 감각이 날카롭다는 건 알고있긴 한데 그래도 우리 중 누구도 못느꼈다고."
"확실해요. 그 땐 그냥 착각인가 싶었지만 저 사람이랑 만나고 보니 딱 알겠어요."
"답답한 건 알겠는데 조금 진정하게나. 사실 자네가 그 이야길 꺼냈을 때부터 저 슈나이더라는 자가 할 말은 정해져있었다네. 감시하고 있었다는 걸 인정해버리면 에메랄드 컴퍼니가 의뢰받은 용병들을 신용하지 못한다는 걸 광고하는 꼴이기 때문이지. 대외적인 이미지를 생각할 수 밖에 없을테니 명백한 증거라도 있지 않은 이상 절대로 인정하려들지 않을 거라네. 뭐, 그래도 한 가지 건진 건 있잖은가?"
"예? 건진 거라뇨?"
"마을,이나 도시 내,에선 꼬리가 붙는 다,는 것 입니다. 아마 에메랄드 컴퍼니는 좀 더 은밀,하게 꼬리를 붙일 겁,니다. 앞으로 그 사실,을 주지하고 있는 것만으,로 상대에게 빌미를 줄 가능,성을 최대한 줄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음, 하고 생각에 잠겨 두뇌를 풀가동하고 나서야 도로스는 가까스로 이해했다. 그러니까, 에메랄드 컴퍼니는 어떤 식으로 그들을 구속하거나 아래에 두려 할 테고, 감시를 의식하고 있다면 그러한 함정에 걸릴 위험을 조금이라도 낮출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에겐 조금 이상하게 들렸다. 마치 에메랄드 컴퍼니를 잠재적인 적으로 간주한 듯한 발언이다.
"에메랄드 컴퍼니는 적..인가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네."
도로스는 무슨 의미인지 몰라 고개를 갸우뚱했다. 프로바움은 뻐억 담배연기를 허공에 그렸다. 곁에서 설명하고 싶어 안달이 나 있는 닥터 윌슨의 그의 말을 이어받았다.
"아직 저희,를 어떤 목,적으로 부르는 건지 자세,히 모릅니다. 그 가능,성 중엔 최악의 경우 적,이 된다는 선택지 또한 있기 때,문에 그에 대비해,놓는 편이 좋,습니다."
그제야 이해가 가 도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위험하단 걸 인지하고 있는 것만으로 많은 게 달라지긴 한다. 최소한 주변에 무언가 잠재적인 위협이 있는지 주기적으로 확인하게 되니까.
"골치아픈 이야긴 나중에 하자고 아직 도착하려면 며칠이나 남았다고? 그건 그렇고 이 소파 진짜 괜찮은데? 거기다가 흔들림도 없고 말야."
화제를 전환하려는 듯 카지트가 소파에 드러누워 말했다. 그에게 이렇게 골치아프고 머리쓰는 일은 딱 질색이었다. 일행 또한 벌써부터 골치아픈 일로 머리를 썩히기 싫은지 순순히 카지트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듣고보니 그렇군. 보통의 다각열차였다면 정신없이 흔들렸을 텐데 말이야. 그래서인가? 도로스, 자네 꽤 멀쩡해 보이는 군 그래?"
셋의 시선이 도로스에게 향했다. 카디프에서 다각열차를 타고 오면서, 다각열차를 탄 도로스의 멀미가 병적인 수준이었다는 걸 기억하는 일행의 눈이 동그랗게 뜨여졌다. 도로스 또한 그 사실에 깜짝 놀랐다. 원래대로라면 반시체가 되어있었을 텐데.
온갖 최고급으로 도배해놓았기 때문에 그런지 진동은 없었다. 그 덕분인지 그는 헛구역질이나 메스꺼움 따위없이 멀쩡히 깨어있을 수 있었다. 보통이라면 바닥에 누워서 한 사발 게워내거나 카지트의 물리치료로 잠들어있을 게 분명했다.
역시 돈의 힘은 대단했다. 그는 경이에 찬 눈으로 내부를 둘러보았다. 일반 다각열차와 내부 또한 색달랐다. 보통의 다각열차라면 맨 앞의 기관사 석과 승객석 사이만 두꺼운 철벽으로 가로막혀 있을 터였는데, 이 열차는 승객석 또한 앞부분과 뒷부분으로 나뉘어져있는 듯 했다. 그 증거로 앞부분과 뒷부분 사이엔 하나의 문이 가로막고 있었다.
좌석 또한 그렇다. 좌우 각각 둘씩 네 좌석이 줄지어있는 게 아니라, ㄷ자 모양으로 갈색 소파가 기다랗게 배치되어있었다. 그 가운데 설치된 테이블 또한 매끄럽게 마감된 것이 장인의 작품인 듯 했다. 일행은 잠시 무거운 주제에서 눈을 돌리고 처음 맛보는 상류층의 가구와 문화를 즐기기로 했다.
카지트는 소파에 누워서, 프로바움은 파이프를 즐기며 제각기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용병 생활에 이골이 난 그들은 한가한 때를 어떻게 보내야 할 지 잘 알고 있었다. 일이 없을 땐 남는 게 시간이니. 그러나 닥터 윌슨과 도로스는 짬짬히라면 몰라도 이렇게 며칠이나 시간이 남아도는 때엔 무엇을 해야 할 지 몰랐다. 공부와 사냥은 그들의 생존과 직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하루하루 전념하기 바빴던 까닭이다. 그러니 남는 시간같은 게 있을 리가 없다.
결국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그들은 이야기거리마저 떨어지자 관심을 새로운 무기로 돌렸다.
도로스는 마치 생이별한 연인을 만난 것 마냥 보우건을 쓰다듬었다. 그의 반신이나 다름없는 무기다보니 애착이 남달랐다. 또한 그는 리볼버 라이플을 검사했다. 구조 자체는 간단해서 몇 번 분해하고 조립해보면서 손에 익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고향을 떠올렸다. 에메랄드 컴퍼니의 사장. 일행의 말을 들어보면 그다지 호의적인 인물은 아닌 것 같았지만 혹시 모르지. 잘하면 토벌대를 요청 할 수도 있을 터다. 괜히 마음이 들떴다.
도로스의 곁에서 닥터 윌슨은 그의 기압식 피스톨을 만지작 거렸다. 전에 빼앗겼던 피스톨과 프로바움의 창고에서 얻은 피스톨을 모두 합해서 4정. 한 손으로 기압을 충전 할 수만 있다면 네 손을 이용해 모두 사용 할 수 있겠지만, 아쉽게도 그건 불가능했다. 실제로 사용하는 건 두 정이 고작이리라. 남은 두 정은 팔아버리거나 예비용으로 가지고 다녀야 할 듯 했다.
피스톨의 구조에 익숙한 그는 자유자재로 분해와 조립을 반복할 수 있었지만, 아쉽게도 저격 소총은 피스톨보단 구조가 조금 더 복잡하기 때문에 분해까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길들인다고 계속 이 부분 저 부분 만져댔으니 한결 다루기 편한 느낌이 없잖아 있었다.
저격 소총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닥터 윌슨은 아직 약실에 탄환 한 발이 장전되어있는 상태라는 것을 깨달았다. 잠금장치로 잠궈두었다고 해도 빼내는 편이 나았다.
"앗!"
약실에서 탄환을 빼내던 도중 손이 미끄러졌다. 손에서 벗어난 탄환은 땅그랑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굴렀다. 화약이 들어간 탄환 특유의 길다란 탄피에 박힌 에메랄드 컴퍼니의 로고. 그것이 빙글빙글 돌아가며 바닥을 굴렀다.
닥터 윌슨은 괜한 한숨을 한 번 푸욱 쉬고 허리를 굽혀 탄환을 집어들었다. 화약식 탄환. 그 비싼 가격 때문에 그에겐 낮선 모습이다. 화약식 총탄은 짜리몽땅하거나 둥글둥글한 기압식 탄환과 달리 탄피가 탄환을 감싸고 있는 구조였다. 기다란 총탄은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날카로운 점으로 끝맺었다. 매끄러운 놋쇠의 색을 훑어내리던 손가락에 무언가 걸렸다.
원 안에 N자 모양의 번개. 에메랄드 컴퍼니의 로고다.
그는 아무런 생각없이 탄환을 돌려가며 그 문장을 구경하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에메랄드 컴퍼니의 문장을 돌리자 N자 모양이 옆으로 누워 Z가 되어버린 것이다! 원 안에 Z. 그의 머릿속에서 번개가 내리쳤다. 무언가 번뜩이기 시작했다.
그는 재빨리 품 안에서 수첩을 꺼내 폈다. 한 글귀. 인간의 해골로 가득찬 광장에서 맞이한 글귀. 그것이 수첩 위에 숨긴 몸을 드러냈다.
[위대한 지도자, Oz를 위하여.]
"..맙소사.."
닥터 윌슨은 무언가가 연결되기 시작한 걸 느꼈다. 무언가, 아주 거대한 무언가가 보이지않는 베일 너머에 있었다. 그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헛숨을 들이키곤 다시 탄환을 다시 들어올렸다. 원 안의 N자 모양의 번개. 옆으로 눕히면 Oz. 머리속에 번개가 치는 듯 했다. 이게 과연 우연일까? 광장에서 발견한 오즈를 찬양하는 글귀. 그가 발견한 에메랄드 컴퍼니의 상표 속에 그려진 오즈라는 단어. 일행을 초대한 에메랄드 컴퍼니의 사장. 정말 이게 단순한 우연의 일치일까?
닥터 윌슨은 차오르는 흥미와 위험한 향기를 느꼈다. 잃어버린 700년 전에 대한 환상. 목을 옥죄는 듯한 매혹적이면서 동시에 치명적인 위험. 더 이상 이것에 관여했다간 다시는 원래의 생활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란 기이한 확신이 있다. 그는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 혼자 생각하기엔 너무나 중대하고 너무나 거대한 문제였다.
늘어져있는 일행을 불러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