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5. 대면
일행은 그를 거실로 안내했다. 슈나이더와 프로바움은 서로 마주보며 소파에 앉았고 그 뒤엔 도로스와 닥터 윌슨이, 그리고 근처의 벽에 카지트가 기대어 섰다. 넷이 하나를 반원으로 둘러싼 형국이지만 슈나이더는 어떠한 두려움도 느끼지 못하는 듯 했다. 그는 일행의 날선 눈길을 신경쓰지않은 채 마실 걸 기다리기까지 했는데 어떠한 접대도 나오지 않자 미세하게 눈가를 찡그렸다.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이것을 보여드리고 싶군요."
그는 커다란 여행가방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직사각형의 커다란 여행가방.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그런 종류다. 그러나 그 내용물은 전혀 평범하지 않았다. 그가 무엇을 하는지 구경하던 이들은 이내 그 내용물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내 보우건!"
"제 연,구자료들!"
도로스와 닥터 윌슨이 플라잉 몽키즈에게 빼앗겼던 물건들. 그 모든 것이 고스란히 여행가방 안에 들어있었다. 일행은 의문어린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어째서 플라잉 몽키즈가 가져간 것을 이 사람이 가지고 있단 말인가? 그리고 어째서 그들이 탈출할 것을 예측한 것 마냥 그 짧은 시간 안에 물건들을 가져온 건가?
수많은 질문들과 물음표가 일행을 휘저었으나 막상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온갖 감정을 담아 그를 바라볼 뿐. 무언의 재촉에 그는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 대답은 시원찮았다.
"모종의 방법으로 얻었습니다."
그 모종의 방법이라는 게 걸렸지만 그는 가르쳐 줄 생각은 없는 듯 했다. 그는 각 얼굴들을 기억하겠다는 듯 일행을 한 번씩 훑고 품 속에서 편지 한 장을 꺼냈다. 순백의 편지. 한 군데도 더럽혀진 곳없이 깨끗하다. 그 위에 화려하게 치장된 금장식들은 보내는 이는 위엄이 깃들어있다. 고풍스런 필기체로 카지트 외 귀하께 라고 적혀있었다. 누구의 편지인지는 자명했다.
"그럼, 사장님의 전언을 들려드리겠습니다."
그는 우아하면서도 군더더기없는 손짓으로 편지를 개봉했다.
[먼저, 그대들의 노고와 뜻있는 발견에 깊은 감사를 전해드리오. 또한 그 불귀不歸의 유적에서 모두 무사히 살아돌아 것. 그대들의 실력이 경지에 접어들었다는 것이겠군. 그만한 실력자라면 꼭 한 번 만나보고 싶소.]
짤막한 내용. 슈나이더는 제 할 일을 마쳤다는 듯 편지를 다시 곱게 접어 품 안에 넣었다. 그러나 그 때까지도 일행은 말이 없었다. 언어로 표현 할 수 없는 수많은 상념이 그들의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슈나이더는 어떠한 말없이 조용히 그들을 관찰했다.
문득 그의 시선을 마주한 도로스는 기시감을 느꼈다. 어디선가 그와 같은 시선을 느낀 적 있었다. 그러나 그에 대해 생각 할 새도 없이 그는 프로바움에게 집중했다. 그가 입을 연 것이다.
"..대체 어떤 부분이 마음에 들으셨는지 모르겠군."
사색의 껍질을 깨고 프로바움은 입을 열었다. 편지 상엔 유적에서 유일하게 살아 돌아온 일행의 실력이 깊은 인상을 준 듯 하지만, 편지 내용 곧이 곧대로 믿을 수는 없었다. 어느 부분일까, 그는 고심했다. 유적에서 발견한 것들인가? 아니면 플라잉 몽키즈에게 한 방 먹여준 것? 혹은 편지에 쓰여진 대로 순수하게 그들의 실력 때문인지도 모른다. 짐작가는 게 너무나 많아서 골치가 아팠다. 프로바움은 머리를 싸맸다. 공교롭게도 닥터 윌슨 또한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모양인지 작게 앓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잠,시 대화를 나눌 시,간이 필요합니,다."
닥터 윌슨은 슈나이더의 허락을 구했다. 다행히 그 정도 배려는 있는 듯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 받기 무섭게 닥터 윌슨과 프로바움은 나머지 둘을 끌고 지하실로 내려갔다.
"이제 어쩔텐가? 꽤나 골치아픈 상황이네만."
"글쎄..좀 갑작스러운데? 대체 갑자기 왜 우리를 보자고 하는 거지?"
"짐,작 가는 게 너무 많아서 잘 모르,겠습,니다."
"함정일 가능성은?"
카지트의 추측에 프로바움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그건 너무 허무맹랑했다.
"별로 함정일 것 같진 않군. 그런 큰 회사의 입장에선 우리같은 피래미는 함정따위 없이
손쉽게 잡을 수 있는 먹이라네. 굳이 힘들게 함정까지 파서 잡을 필요는 없지."
셋은 침중한 얼굴로 작게 침음성을 흘렸다. 왜 그들을 불렀을까. 어떤 목적으로 그들을 불렀을까. 셋은 고민했다. 아직 상황 파악이 제대로 되지않는 도로스만이 그저 머리를 긁적였다.
"그냥 가면 되지않나요? 일단 좋은 보상을 해줄 것 같던데..우리 실력이 좋은 인상을 남긴 것 같으니까."
도로스는 예전에 카지트와 나눴던 이야기를 떠올랐다. 에메랄드 컴퍼니같은 큰 회사에서 실력있는 용병들의 편의를 봐준다는 이야기. 잘 하면 토벌대를 요청할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작은 기대감에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러나 도로스의 간단명료한 발언에 셋은 미묘한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일단 가긴 할 거라네. 아니, 갈 수 밖에 없지. 이런 좋은 기횐 흔치않거든."
"예? 그럼 뭘 걱정하는 건가요?"
"음..그게 좀 복잡한데. 지금 우리가 걱정하는 건 대체 뭣 때문에 우릴 불렀냐는 거야. 빼앗긴 무기들을 되찾아 줄 정도면 우리와 원숭이 놈들의 관계를 알 정도라는 건데..설마 팔아넘기진 않겠지?"
"최악의 경,우엔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럴 거였,다면 진작,에 습격당했을 겁니,다."
닥터 윌슨의 의견 역시 프로바움과 비슷했다. 에메랄드 컴퍼니의 입장에선 굳이 함정을 팔 필요조차 없다는 소리다. 전투부대를 파견하거나 플라잉 몽키즈에게 그들의 소재지를 알리는 것만으로 도로스들은 손도 써보지 못한 채로 잡힐 확률이 높았으니까.
닥터 윌슨은 도로스에게 가르치듯 말했다.
"그리고 저,희가 지금 고민,하고 있는 건 상,대가 대체 무엇을 원하느,냐입니다. 의중을 모르,고 끌려다니다간, 쓸모가 없어,졌을 때 입,막음 당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상대가 바라는 걸 안,다면 거래를 저희,에게 조금 유리,한 쪽으로 끌어올 수도 있을,지도 모릅니다."
다들 대단하구나. 도로스는 멍하니 감탄하는 한편 그런 것도 모른 채 태평한 소리나 내뱉었던 자신이 조금 부끄러워졌다. 시골사람인 그에게 뒤를 읽어야하는 도시의 화법은 여전히 어려웠다. 그러나 배우지않으면 안된다. 정신차리자. 도로스는 정신을 집중해서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파악하기 위해 애를 썼다. 계속 신세만 지는 건 사절이었다.
계속되는 문답. 그러나 어느 것 하나 명확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추론과 추측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나마 다행히도 토론과 비슷한 이 방법은 생각을 정리하는데 꽤나 효과적이어서, 대화가 계속 될 수록 프로바움과 닥터 윌슨은 조금씩 감을 잡아가고 있었다.
"가장 높은 확률은 오즈,라는 인물 때문인가?"
"키워드는 오즈, 인 것 같,습니다."
동시에 비슷한 결론을 내린 둘은 서로 잠시 마주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를 싸매며 궁리한 끝에 내린 한 가지 결론. 아무래도 에메랄드 컴퍼니의 사장이 그들을 부른 까닭은 그들이 지하광장에서 발견한 '오즈Oz'라는 단어 때문일 확률이 제일 높았다. 고고학에 정통한 닥터 윌슨마저 모른다는 걸 보면 그들이 최초발견자일 게 분명하니까.
그 밖에도 이런저런 질문들이 오갔지만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그들을 초대한 사장의 성격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대략적인 대책 밖에 세울 수 없다. 한참을 더 이야기한 후에 그들은 거실로 올라왔다. 슈나이더는 그들이 내려갈 때 그 자세 그대로 앉아서 조용히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시선. 어디서 잠깐이라도 느낀 적 있는 것 같은데. 도로스는 또다시 기시감을 느꼈다.
소파에 앉은 프로바움은 입을 열였다. 일행들과 상의한 대로 상대를 떠보는 겸 이득을 취하기 위해서.
"가고는 싶지만 아쉽게도 '지금 상황'이 조금 곤란해서.."
'지금 상황'을 알고있다는 건 그들의 사정을 전부 파악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는 건 도로스의 정체 또한 알고 있다는 소리겠지. 혹여 그 때문에 도로스들을 부른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그들에게 '간다' 이외에 선택지는 없었다.
정말로 곤란하다는 듯한 어조로 말을 흐리는 프로바움의 모습에 슈나이더는 무감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플라잉 몽키즈의 추적이라면 당분간은 무마시켜 드릴 수 있습니다."
그렇구만, 프로바움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역시 눈 앞의 사내는 모든 사정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다지 별로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그래도 건진 게 있다면 슈나이더가 플라잉 몽키즈의 추격을 막아줄 수 있다는 것. 이득이라면 큰 이득이다.
당분간이라도 녀석들의 추적이 없다면 카디프로 돌아가 몸을 숨기면 된다. 제 아무리 천둥벌거숭이같은 녀석들이라고 해도 에메랄드 컴퍼니가 주름잡고 있는 동부에서까지 날뛸 수 있을 리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슈나이더는 "다만" 하고 경고했다.
"다만, 제게 허용되어있는 권한은 여기까지 입니다."
눈썰미 좋은 이들이라면 슈나이더의 무표정한 얼굴에 희미하게 떠올라있는 불쾌하단 감정을 잡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와 동시에 일행은 그가 꽤 많이 양보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리고 슈나이더가 양보를 해서 데려가야 할 정도로 사장의 명령은 절대적이란 것 또한. 다시 굳은 얼굴로 프로바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시죠. 다각열차가 대기중입니다."
용건을 마쳤다는 듯 슈나이더는 지체없이 일어났다. 스스럼없이 상대에게 등을 내보이는 모습에 카지트들이 당황하건 말건, 그는 문가로 다가갔다. 따라오라는 듯한 태도에 일행은 복잡한 감정을 숨기고 말없이 일정거리를 유지한 채 그를 따라갔다.
그가 일행을 안내한 곳은 다각열차들이 즐비한 곳. 서부의 대도시 답게 각지의 대도시와 도시로 이어지는 다각열차들이 오와 열을 이뤄 서있었다. 바스톤으로 향할 때 다각열차를 갈아타며 보았던 광경이지만. 집채만한 다각열차들이 한 곳에 모인 그 모습은 여전히 압도적이었다.
슈나이더는 일행을 한 다각열차로 데려갔다. 다른 녹슬고 낡은 다각열차 사이에서 홀로 우뚝 빛나는 열차가 그곳에 있었다. 어느 곳 한 군데 녹슨 것없이 강철의 색을 유지하고 있는 다각열차. 얼마나 관리를 철저하게 했는지 도색이 반짝이며 광이 날 정도였다. 그는 정중하면서도 품위있는 태도로 다각열차의 입구를 가리켰다.
"타시지요. 동부의 대도시, 뉴 런던으로 향하는 다각열차입니다."
시뻘건 녹과 고철에 익숙한 그들에게 이런 깨끗하고 고급스런 다각열차는 부담스러웠다. 다른 사람의 시선에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 카지트마저 꼭 이걸 타야만 하는지 물었지만 슈나이더의 반응은 단호했다. 에메랄드 컴퍼니의 본사로 향하는데 너저분한 고철을 탈 수 없다는 까닭이다. 일행은 하는 수 없이 다각열차에 발을 올렸다.
문득 도로스는 열차 내부에 들어서는 순간 낯익었던 슈나이더의 시선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깨달았다.
"떠올랐다! 바스톤에서 유적으로 출발 할 때! 그 때 지켜보던 시선!"
바스톤에서 나갈 때, 누군가의 시선이 일행 전체에 따라붙었던 적이 있었다. 유적을 나가자마자 뚝 끊겼기에 도로스는 그동안 잘못 느꼈다 여기곤 까먹고 있었지만, 사실 잘못 느낀 게 아니였던 것이다. 어딘선가 본 적 있던 시선. 슈나이더가 바로 그 시선의 주인이었다.
바스톤을 나갈 때 아주 잠깐 느꼈던 것 뿐이지만, 아마 그는 일행이 도시에 있을 때 항상 그들을 감시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렇게 짧은 시간 안에 도로스와 닥터 윌슨이 빼앗겼던 물건들을 가지고 왔는지 설명이 된다. 도로스는 방독면 안의 얼굴을 굳히고 슈나이더를 쏘아봤다.
도로스를 보는 슈나이더의 눈이 이채롭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