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5. 대면
도로스와 닥터 윌슨은 지하에 쌓인 무기의 총화를 보고 경악했다. 얼핏 봐도 꽤 넓어보이는 지하실을 가득 메우고있는 무기들은 한 번 쯤 본 적 있는 녀석부터 이런 무기가 존재할 수 있구나 생각하게 만드는 무기까지 다양했다. 무엇보다도 그 양이 압도적이라 둘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대, 대체 이게 다 뭔가요?"
"자네도 알겠지만 무기라네. 전쟁이 있을 때마다 열심히 모았지."
약간의 자랑스러움마저 묻어나는 어투에 둘은 반쯤 질려버렸다. 모르긴 몰라도 이 정도 양이라면 과장 좀 버태서 마을 몇 개는 찜쪄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닥터 윌슨과 도로스는 테러리스트를 보는 듯한 눈으로 그를 쳐다봤지만, 그는 아랑곳않고 동료들이 질리건 말건 태연하게 말을 꺼냈다.
"아무튼 무기나 몇 개 골라보게나. 원숭이놈들에게 무기고 뭐고 다 빼앗겼지않은가. 최소한 무기라도 갖추는 게 좋을 거라네."
그렇지않아도 무기가 필요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많았다. 둘은 잠시 서로 마주보고 쭈뼛쭈뼛 무기의 산을 마주했다. 갈팡질팡하는 시선. 너무 많아서 뭐부터 봐야 할 지 모르는 것이다.
자동인형이 몇 번이고 재촉하고 나서야 둘은 그 안으로 뛰어들었다. 도로스는 무기의 산에서 화약식 리볼버 라이플을 골랐다. 다른 것을 고른다는 선택지도 있지만, 리볼버 라이플만큼 마음에 드는 무기가 없었다. 6발 들이 실린더에 팔 한쪽 만한 총신. 둔탁한 강철색과 황동색이 서로 깔끔하게 맞물려 고아한 외관을 이루고 있었다.
사실 파괴력이나 장탄 수 등 각 분야에서 리볼버 라이플보다 좋은 성능을 가진 무기는 많았다. 파괴력이라면 페퍼박스나 산탄총에 밀리고 장탄 수 또한 6발로 적은 편이다. 그러나 그는 성능을 떠나서 리볼버 라이플이 마음에 들었다. 유려하고 매끄러운 디자인과 적당한 성능. 어차피 화약식 총알은 가격 때문에 그리 많이 쓸 수는 없었다.
거기에 꽤나 튼튼해 보였기에 유사시엔 총검을 달고 창 대용으로 써도 될 것 같았다. 그는 총 끝에 끼울 바요넷을 집어들었다.
"하나만 고르는 건가? 더 골라도 된다네."
프로바움의 제안에도 그는 넌지시 거절했다. 이 이상 가져다녀봤자 오히려 그의 기동성이 떨어진다고 판단한 까닭이다. 또한 그 탄알값만 해도 이미 충분히 버거웠다.
어차피 장갑이 얇은 녀석들이라면 보우건으로 충분하니까. 도로스는 무의식적으로 허리춤을 쓰다듬다가 문득 깨달았다. 그의 애기愛器인 보우건은 플라잉 몽키즈에게 빼앗긴지 오래였다. 뒤늦은 허탈함이 몰려왔다. 그는 우울한 눈으로 진열된 무기들을 살폈지만 무엇 하나 보우건 만큼 그의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보우건이 있었더라면.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편 닥터 윌슨 또한 그의 무기를 고르고 있었다. 그는 아무래도 자신의 빈약한 무장을 의식한 듯 중화기 쪽을 기웃거리는 듯 했으나 이내 포기했다. 탄약값도 탄약값이지만 그 무게 또한 상당한지라 상대적으로 빈약한 그의 근력으론 감당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한 참을 고민하던 그는 결국 기압식 저격 소총 한 정과 기압식 피스톨 두 정을 집어들었다. 그의 네 손이라면 피스톨을 들고도 두 손이 남으니 여유롭게 압력을 충전 시킬 수 있다. 연사력이 조금 흠이지만 저격 소총이라면 거의 화약식에 버금가는 파괴력을 낼 수 있으니 나쁘지 않았다.
그 이상은 딱히 필요는 없어, 닥터 윌슨은 프로바움의 곁으로 돌아왔다. 무기 두 세 개를 집어왔어도 별로 티가 나지 않았다.
"이걸 전,부 팔면 꽤 많,은 돈이 나올 것 같습,니다."
닥터 윌슨의 감탄섞인 말에 프로바움은 고개를 저었다. 물론 그도 생각해 본 적이 있긴 하지만 실행에 옮긴 적은 없었다. 거기엔 콜렉터 특유의 애착도 있었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여기있는 것들 중 거의 대부분은 불법적인 무기라네. 어느 것 하나라도 풀린다면..글쎄, 그 뒤는 상상하기 두렵군 그래. 가령 폭탄 하나가 시중에 풀린다고 한다면..전 도시가 미쳐날 뛰겠지. 악용의 소지는 많으니까. 그리고 갑자기 어마어마한 물량의 무기들이 시중에 풀린다면 그 누가 의심하지 않겠나? 무슨 수를 써서라도 추적할 테고 결국은 내가 했다는 걸 잡아내겠지. 별로 반길만한 일은 아니라네."
타당한 설명에 닥터 윌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 말을 꺼내려던 닥터 윌슨은 문득 들려오는 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여기저기 무기들을 헤치고 있던 도로스 또한 하던 것을 멈추고 소리가 난 곳을 쳐다보았다.
문. 소리는 분명 위층의, 그들이 안가로 들어왔던 문에서 들렸다. 셋은 천천히 무기를 꺼내고 발걸음을 죽인 채 거실로 올라갔다. 거실엔 이미 날카로운 눈을 빛내며 카지트가 문가에 기대어 있었다. 한 손에 꼬나쥔 프란시스카. 문을 여는 것과 동시에 도끼날과 막대 사이의 움푹 들어간 부분으로 침입자의 목을 낚아챌 작정이다.
모두 잔뜩 몸을 긴장시킨 채 문을 노려봤다. 잠깐의 기다림. 숨조차 멎을 듯한 적막이 그들을 에워쌌다.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누군가 안에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는 듯한 노크 소리. 상대가 누구인진 모르겠지만 그들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있다. 프로바움과 카지트는 시선을 교환했다. 카지트의 손이 천천히 문 손잡이 쪽으로 접근했다. 꿀꺽, 누군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일촉즉발의 상태. 카지트의 손이 문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한 순간.
그는 문을 안으로 열어제끼며 프란시스카를 일직선으로 찔렀다. 노리는 곳은 목 바로 옆의 허공. 찌른 그대로 끌어당기면 자연스레 녀석의 몸이 딸려들어 올 것이다.
그러나 상대는 이미 거기까지 예측했다는 태도로 문이 열리자마자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끝까지 찔러들어간 프란시스카와 종이 한 장 차이의 간격. 반격은 없었다. 오히려 일행이 움직이기 전에 정체불명의 방문자는 두 손을 들어올리며 별다른 저항의사가 없음을 밝혔다.
"다들 과격하시군요. 상황이 이런 터라 어쩔 수 없는 건 알고있습니다만 조금 자제해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차분하며 지적인 목소리. 일행은 그 발원지를 노려보았다. 검은 색 일색의 사내였다. 집사복이라 불리는 검은 정장, 그리고 검은 털. 단 두 군데, 눈썹과 툭 튀어나온 입 주변만이 새하얬다. 마치 수염처럼 입 주변의 털이 입을 가리고 있어, 누군가 복화술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관록붙은 외견을 하고 있으나 복슬복슬한 털 때문에 나이를 짐작하기 힘들었다. 목소리 또한 나이를 판별하기 어렵다.
탐색에 가득찬 눈으로 쏘아보는 일행과 반대로 개과 수인은 심유한 검은 눈으로 일행을 지긋이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제 이름은 슈나이더라고 합니다. 과분합니다만 에메랄드 컴퍼니의 사장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한 손은 뒷짐을 지고 다른 손을 가슴에 대며 허리를 숙인다. 우아한 인사는 상류층 예법의 교과서와 같았다. 기품이란 걸 형상화 한다면 바로 눈 앞의 사내가 아닐까. 복슬복슬한 털은 제멋대로 엉키고 더러워지기 쉽상이었지만 그의 것은 방금 전까지 미용실에서 관리받고 온 것 마냥 깔끔하고 단정했다. 그가 얼마나 자기관리에 철저한지 알 수 있다.
뒷짐진 손과 살짝 치켜든 턱. 프로바움과는 또다른 중후한 멋이다. 프로바움이 전장에서 돌아온 노귀족이라면 이 자는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노련한 집사.
"귀하께서 맡으신 의뢰에 대한 사장님의 전언이 있습니다.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
"미안하지만 증거를 보여주시겠소? 요즘 정세가 뒤숭숭한 터라 증명할 만한 걸 보고싶소만."
"좋습니다."
그는 품 안에서 에메랄드 컴퍼니의 이름이 박힌 한 장의 명함을 꺼냈다. 특수한 공정을 거쳐 만든 고급스런 검은 종이. 그 위에 박힌 황금색 데코레이션은 전부 순금이다. 도저히 잘못 보려해도 잘못 볼 수 없다. 이런 사치스러운 명함을 만드는 곳은 몇 군데 없으니까. 거기에 일행이 맡았던 의뢰에 대해서 알고 있다면 더 이상 말할 필요는 없겠지.
일행은 순순히 길을 비켰다. 그러나 경계는 거두지 않았다. 아무리 그가 의뢰주라고 해서 꼭 그들에게 호의적이라는 보장은 없다. 혹시모를 상황에선 그를 제압하고 인질로 써먹어야 할 지도 모른다.
이들이 경계하는 걸 알면서도 슈나우츠는 태연하게 움직였다. 마치 이들은 그에게 아무련 위협조차 되지 못한다는 태도다. 오히려 문을 닫으면서도 주위를 경계하는 이들의 모습에 그는 그 외의 인원은 없다며 못을 박았다. 그는 발 뒤로 가려둔 검은 여행가방을 들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