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화 〉4. 구출
프로바움의 걱정과는 달리 둘은 무사히 발굴대와 거래를 마칠 수 있었다. 어떠한 위협이나 언쟁조차 없이 거래 내내 시종일관 부드러운 분위기였는데, 다행히도 제롬은 프로바움이 우려했던 것처럼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총알이 없다는 소리를 듣고 바로 총을 꺼내 겨누는 놈들과는 달르다. 오히려 그의 인성은 꽤 좋은 편에 속했다. 인망이 두터운 듯 부하들은 어떠한 불만없이 그의 명령을 충실히 따랐으며 그에게 존경어린 눈빛을 보냈다. 그 자신 또한 항상 밝게 웃는 모습이 절로 호감가는 모양새였다.
물론 그러나 그렇다고 마냥 착하지도 않았다. 제가 챙길 건 확실히 챙기면서도 적당히 양보할 줄아는 성격. 대장이란 직위는 단순히 공부만 해서 딴 건 아닌지, 거래의 주도권을 능수능란하게 다룬 덕에 꽤나 힘겨운 입씨름을 해야했다. 장장 두세 시간동안 꼬박 협상을 진행한 후에야 간신히 둘 다 만족할 만한 타협점을 찾을 수 있었다. 고작 탄환 좀 얻고자 쓸데없이 많은 노력을 들인다는 비아냥을 살 수도 있겠지만, 덕분에 부가적인 정보들을 얻을 수 있었다.
끝맺음이 확실한 제롬의 성격 덕분에 프로바움도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이유없이 호의적이거나 뒤가 구리다면 수색이고 뭐고 바로 마을로 향하자고 했을 것이다.
무사히 탄약을 보충한 둘은 유적 주위의 파이프를 간단하게 한 번 훑고는 길을 나섰다. 제롬과 협상 끝에 얻은 것인데, 간단하게나마 주변 파이프가 기록되어있는 덕분에 꽤 많은 도움 될 것 같았다.
..물론 3시간 전까진 그렇게 생각했다.
"이쪽은 길이 막혔는데?"
"또인가?"
프로바움은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막힌 파이프만 벌써 세 번째 였다. 어디 한 군데가 파손되었는지 그 사이를 가득 메운 흙더미가 라이트에 비쳤다. 더욱이 카지트의 감은 아무런 반응도 없는 터라 대체 이 길이 맞는 길인지 조차 알 수 없었다. 길이 막혀있으니 할 수 없이 다시 돌아가야했다. 입맛이 썼다.
"쯧, 최근들어 손상된 파이프가 많이 보이는군."
"그러게. 전에 한 번 조사 의뢰 받았었는데 여기저기 부서진 게 많더라고."
카지트는 애꿏은 파이프 바닥을 발끝으로 찼다. 길잡이임에도 제대로 올바른 길을 찾지 못한 게 조금 부끄러운 모양이다. 그러나 가끔 있는 일이라 프로바움은 그의 부끄러움을 모른 척 했다. 동료의 실수를 트집잡을 정도로 얄팍한 사람은 아니었다. 결국 둘은 다시 왔던 갈림길까지 돌아가서 다른 길로 향했다.
"이렇게 무너진 파이프가 많은데 유적의 통로라도 멀쩡할 지 의문이군."
프로바움은 카이저 수염 끝을 배배 꼬았다. 물론 그 둘이 죽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혹시 모른다. 사람의 일이란 건 한치 앞도 모르는 것이니. 카지트 또한 말에 담긴 걱정을 느꼈으나 내색 않고 쾌활하게 말했다.
"도로스나 나는 길잡이라고. 그것도 녀석은 아마 나보다 더 뛰어날 걸."
카지트는 검지손가락으로 머리를 톡톡 두들겼다.
"자네보다 머리가 좋다는 건 부정하지 않겠네."
"아니, 그거말고."
그는 다시 머리를 두들겼다.
"'감'말야. 잘은 몰라도 그거 하난 나보다 훨씬 뛰어나니까, 제 살 길은 알아서 찾을 거라고."
자동인형은 눈썹을 꿈틀였다. 단언하듯 말하는 카지트의 발언은 사뭇 어제완 달랐다.
"어젠 불길하다고 하지않았나."
어제 느낌이 좋지않다 해서 기껏 이곳까지 왔건만. 그의 지적에 살쾡이는 머리를 긁적였다. 표정을 보아하니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는 이내 입을 열었다.
"어. 근데 아직도 좀 그런 느낌이 있어. 왜, 괜시리 불안한 느낌있잖아. 똥싸고 나왔는데 안닦은 것 같은 그런 느낌."
"..비유도 참."
고작 그런 느낌따위 라고 하기엔 그 느낌에 도움받은 것이 많아 프로바움은 입을 다물었다. 비논리적인 것에 대해 왈가왈부 해봤자 논리적인 그가 얻는 것은 없었다.
또 다시 한 시간.
둘은 망자처럼 파이프를 배회했다. 벌써 네 시간 째다. 감 하나에 매달려 돌아다니기엔 이미 충분하고도 넘쳤다. 수색이란 단어를 꺼냈던 카지트마저도 지쳐 나가떨어지기 직전, 둘은 무언가를 발견했다. 너저분한 바닥 위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무언가. 멀리서 봤을 땐 긴가민가 했으나, 조금 더 가까이 가서 살펴보자 확실해 졌다.
"닥터 윌슨의 공구군."
삽과 곡괭이. 유적 안에서 그들이 뺀질나게 썼던 공구들. 색상이나 조그맣게 난 잔 상처 따위등등이 눈에 익숙해서 한 눈에 쉬이 알아 볼 수 있었다. 그들이 유적에서 썼던 도구가 확실했다.
"이게 왜 여기있는 거지?"
"글쎄, 나도 묻고 싶군 그래. 다만 확실한 건, 그다지 좋은 소식은 아니라는 걸세."
그의 공구가 이유없이 나와있을 리가 없다. 무언가 이유가 있으리라. 가령 무게를 줄이고 뛰어야하는 사건이 있었다거나 하는 등의. 그러나 확실한 건 없었다. 다만 이번만큼은 프로바움 또한 정체모를 불길함을 느낄 수 있었다. 프로바움과 카지트는 또다른 단서가 될 만한 무언가를 찾아 둘러보았다. 그러나 주위엔 핏자국이나 단서가 될 만한 것은 없었다. 그저 공구만이 오롯이 남겨졌을 뿐. 둘은 공구를 다가가 주웠다.
"어라? 여기 뭔가 메세지같은 게 적혀있는데?"
카지트가 삽을 주워들자, 그 아래에 놓여있던 천 쪼가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재질로 보아 옷감인 것 같았는데, 급하게 휘갈겨 쓴 글씨가 쓰여져있었다.
[도로스=인간. 플라잉 몽키즈에게 쫓기는 중.]
둘은 잠깐 말을 잊었다. 쪽지는 그야말로 터무니 없는 내용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건 또 무슨 정신나간 소리야? 도로스가 인간이라니?"
인간이란 게 무엇인가. 잊혀진 종족 내지는 전설의 생물 등 그 수가 극히 적은 종족이었다. 카지트는 10년 남직한 용병 생활 동안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으며, 프로바움 또한 일백년에 달하는 기나긴 세월 동안 몇 번 인간으로 추정되는 사람들과 만난 것이 전부였다. 가끔 인간을 만났다는 사람들이 나오긴 하지만 그게 사실인지 어떤지는 당사자들 밖에 모를 일이다.
둘의 입장에선 너무나 갑작스런 말이다. 동료가 인간이었다니? 둘은 복잡한 감정을 담아 서로 마주봤다. 약간의 배신감. 그러나 이해 할 순 있었다. 진작에 인간임을 드러내고 다녔다면 진작에 수많은 정신나간 녀석들에게 쫓겼을 것이다. 둘은 한숨을 내쉬었다.
받아들이는 데엔 약간의 시간이 걸렸으나, 다행히 별다른 감정은 생기지 않았다. 어쨌거나 그는 그들의 동료였다.
"만약 이게 맞다면 둘은 잡혔겠군. "
플라잉 몽키즈는 잔뼈가 굵고 끈질긴 녀석들이라 적으로 두면 골치아프다. 아마 십중팔구 잡혔을 것이다. 카지트 또한 그에 관해선 긍정했다. 무리지어 다니는 녀석들이 대부분이니 머릿수를 이용한 몰이사냥에도 능했다.
"엉. 인간을 잡았으면 어디로 데려갈까? 아마 모르긴 몰라도 부르는 게 값일텐데. 설마 죽이진 않겠지?"
"플라잉 몽키즈가 좀 돌아버린 녀석들이라고 해도 그 정도 생각은 있을 거다. 아마 산 채로 잡아서 팔겠지. 가령.."
"뒷경매라거나?"
솔직히 거기 밖에 없지, 그는 덧붙였다. 뒷경매는 온갖 불법적인 무기, 약품, 심지어는 노예까지 거래된다는 음지의 경매장이다. 판매자와 구매자의 익명성은 거의 완벽에 가깝게 보장되기 때문에 동부 북부 할 것 없이 수많은 고객 -특히 상위층을 추정되는-들이 많이 방문한다고 한다. 그리고 플라잉 몽키즈가 뒷경매와 어떠한 커넥션이 있다는 사실은 이 바닥에서 알 만한 녀석들은 모두 알고 있다. 애초에 플라잉 몽키즈의 본거지가 서부이니. 경매장의 위치는 서부의 대도시인 뉴 펜리스에 있다고 들은 바 있으나 그 정확한 위치는 둘 모두 알지 못했다.
"위치는 알아? 난 가본 적 없어서 모르는데."
"나도 모른다."
"허, 영감이 모르는 곳도 있단 말이야?"
"그런 곳은 되도록이면 발 들이고 싶지 않아서 말이지. 그런 곳은 한 번 발을 들이면 빠져나오기 어렵다네."
"이것 참, 곤란한데."
카지트는 고양이 수염을 만지작 거렸다. 수만가지 생각과 가능성이 그의 머리속을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거리와 시간. 장소. 뉴 펜리스로 가는 길에 바스톤을 거쳐지나가는 게 제일 빠르다. 이곳에서 바스톤까지 이틀. 그리고 바스톤에서 뉴 펜리스까지 이틀. 총 4일. 도로스들과 헤어진지는 4일째. 둘이 유적을 탈출하는데 최저 하루나 이틀이 걸렸다고하면 카지트와 프로바움보다 이틀 정도 앞서있을 터.
"영감, 혹시 뒷경매가 언제 열리는지 알아?"
"글쎄, 얼핏 삼 개월에 한 번씩 열린다는 소린 들어본 것 같다만, 정확히 언제 열리는지는 모른다네."
"음..그렇다면, 서두르자. 대충 하루나 이틀정도 앞서있을 테니까 서두르면 거릴 좁힐 수 있을 거야."
프로바움은 고개를 끄덕였다. 첫째와 둘째는 셋째와 막내를 구하기 위해 부지런히 발을 놀렸다.